기독교인의 현재적 부활체험(계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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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현재적 부활체험(계 21:1-8)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우리 인간이 꿈꾸고 상상하는 유토피아를 보다 확실한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게 한 역사적 사건이다. 죽음의 겨울을 끝내고 봄의 향연을 만끽하는 지구북반구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곤 했을 것이다. 인간들은 종종 영원한 봄을 꿈꿨다. 몇 가지 사례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로마 사람들은 낙원인 엘뤼시온의 들판(상젤리제)과 무한지옥인 타르타로스가 모두 다 음부(에레보스)인 지하세계에 있다고 믿었다.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서 혼령으로 가야하고, 비통과 시름과 타오르는 불과 망각의 강들을 건너야 한다. 음부의 봄은 지상과는 반대로 겨울처럼 삭막하고 냉랭하다. 음부를 지배하는 하데스가 부인 페르세포네를 지상으로 보내놓고 그녀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시름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지상에는 페르세포네의 부활로 대 자연이 봄기운을 한껏 받아 새싹을 내고 꽃을 피운다. 그리스로마 사람들은 지상의 봄을 지하세계의 겨울로 이해했던 것 같다.
중국 사람들은 복사꽃이 활짝 핀 무릉도원의 봄을 가장 이상적인 유토피아로 꿈꿨다. 물과 곡물이 풍부하고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이곳을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차단된 세계이다.
유럽 사람들은 황금시대를 지배한 농경의 신(神)인 사투르누스의 영원한 봄의 정원 아르카디아를 유토피아로 보았다. 아르카디아는 그리스 중부지방에 실존했던 초원지역이었으나 원래 힘겹고 고단한 삶을 운명처럼 알고 살아야했던 황량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 땅은 베르길리우스에 의해서 음악을 창조하는 목동들이 가득한 풍요의 땅이자 시와 노래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장소로 묘사된 이후, 오비디우스가 이렇게 노래했다. “군대의 도움이 없이도 사람들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유지한다. 비옥한 토지는 굳이 곡괭이질을 하지 않아도 풍부한 과일을 선사해준다. 사람들은 아무런 수고 없이도 만족할만한 수확물을 거두어들인다. 봄날은 영원하고 잔잔한 서풍이 종자 없이 태어난 꽃들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잠시 후면 대지는 쟁기질을 하지 않아도 풍성한 수확물들로 가득찰 것이며, 들판은 돌보지 않아도 고개 숙인 이삭으로 하얗게 덮일 것이다. 우유와 감로주가 강물처럼 흐르고 녹색 호랑가시나무에서 황금빛 꿀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이후 유럽의 화가들은 다양한 해석을 통해서 아르카디아의 이상을 화폭에다 그려냈다.
영원한 봄을 꿈꾸는 인간들에게 그 꿈을 가장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 기독교가 제시하는 부활신앙이다. 기독교가 인생의 문제에 주는 해답은 부활이다. 인생의 문제란 죽음을 말한다. 죽음은 자연법칙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런 것이다. 그렇지만 죽음에는 고통이 따른다. 죽음의 포괄적인 의미 속에는 정신적인 죽음, 육체적인 죽음, 생태환경의 파괴, 각종 질병, 고통, 고난이 포함된다. 성서는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된 인간의 부활로 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한다. 기독교이외에 그 어떤 종교에서도 부활과 부활의 축복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앞서 소개한 이야기들도 부활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엘뤼시온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는 곳이고, 무릉도원과 아르카디아는 죽기 이전의 목가적인 삶을 말한다. 따라서 부활 없이 봄날이 영원히 지속되는 땅에서 산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일장춘몽이다.
성서가 말하는 부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영혼의 부활이고, 둘째는 육체의 부활이다. 부활은 죽은 후에 다시 사는 것을 말한다. 성서가 말하는 죽음이란 분리와 단절을 말한다. 죽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죽음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들의 영혼의 죽음을 말한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결국 인간들 사이의 단절로 이어진다. 이를 우리는 영적인 죽음이라 말한다. 그래서 영혼의 죽음 혹은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단절, 인간들 사이의 단절을 말한다. 둘째 죽음은 죄의 삯으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죽음으로써 인간의 육체는 썩어서 자연에로 돌아가고, 그의 영혼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낙원이나 타르타로스로 간다. 셋째 죽음은 악인들이 부활하여 불 못에 들어가 당하는 영원한 저주를 말한다.
성서는 단절과 죽음의 이유를 죄 때문이라고 말한다. 죄란 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항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관계가 깨지는데서 악이 생겨나고 악이 죄로 발전된다. 관계가 깨지는 가장 큰 원인은 소통의 단절과 무관심이다. 현대인들은 소통의 도구들을 발전시켜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핸드폰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사회는 단절과 무관심에 대한 대가, 곧 고통을 가장 크게 치르고 있다. 이익창출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는 현대사회는 이웃을 이익창출의 대상과 도구로만 삼는다. 그것에 반비례해서 마음에서 우러난 사랑과 관심은 사라져가고 있다. 사랑과 관심이 사라져간다는 뜻은 사회가 점점 극악해져 간다는 신호이다.
현대인들은 하나님과도 멀어져 가고 있고, 이웃들과도 담을 쌓고 지낸다. 안보면 멀어진다는 속담대로 예배와 기도회를 멀리하고, 기도와 성경읽기를 멀리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진다. 멀어지면 사랑이 식고 무관심해지며, 단절되고 분리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소통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부부관계, 부모자식관계, 교우관계, 인간관계 모두가 깨지고 만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태도란 말이 있다. 사랑의 종류에는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세 가지가 있다. 먼저 에로스는 이기적이어서 최초의 관심도 최후의 관심도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다. 둘째로 필리아는 상호적이어서 받는 만큼 주는 것이다. 셋째로 아가페는 이타적이어서 보답을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은 아가페이다.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사랑도 아가페이어야 한다.
모든 사랑은 자기 사랑이다. 크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는 ‘자기 사랑’을 네 가지로 정의한바 있다. 첫째로 자신을 위한 자기 사랑, 둘째로 자신을 위한 하나님 사랑, 셋째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 사랑, 넷째로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 네 가지를 말했다. 이 가운데서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과 이웃을 위한 자기 사랑이 가장 바람직한 사랑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하나님 사랑과 자신을 위한 이웃 사랑이 가장 잘못된 사랑이다.
이웃 사랑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웃의 마음에 들어야만 이웃 사랑이 되는 게 아니다. 이웃 사랑은 그 이웃이 좋아하든 싫어하던 간에 그에게 유익이 되게 하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한다면, 자식이 싫어할지라도, 회초리를 들어야할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올바른 사랑, 곧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자기 사랑만이 중생(거듭남), 곧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회복, 인간끼리의 회복을 낳게 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봄날을 이루게 한다. 이 중생체험 또는 관계회복체험이 현재적 부활체험이다.
통증이 심한 환자에게, 특히 진통제도 듣지 않고, 모르핀도 듣지 않는 환자에게 가장 효과가 큰 진통제는 곁에 앉아서 환자의 손을 꼭 쥐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때때로 간호사들이 교대로 손을 잡아줘야 할 정도로 통증이 심한 환자도 있지만, 사랑으로 손을 잡아주면 통증이 가라앉는다고 한다. 엔도 슈사쿠는 예수 지하철을 타다에서 자신이 병원에서 직접 보고 또 체험한 일을 통해서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엔도는 난치병으로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아야 했을 정도로 고치기 어려운 병이었다고 한다. 입원한 날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로 괴로움을 호소하는 폐암 환자를 보게 되었다. 그 환자는 의사였기 때문에 자신이 폐암에 걸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게다가 진통제도 듣지 않을 정도로 통증이 심하다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 환자에게는 모르핀도 소용이 없었다. 오로지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간호사들이 그분의 손을 꼭 쥐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통증이 차차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고통을 겪는 환자들에게 가족이나 간호사들이 손을 잡아주고 있는 모습들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리고 일 년 반쯤 후에 엔도는 수술을 받게 되었고, 수술 후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을 겪게 되었다. 의사에게 마취제를 놓아주기를 간청했지만, 의사는 중독의 염려가 있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대신 한 간호사가 그의 곁에 다가와 앉더니 그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이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아픔이 조금씩 가시는 것을 엔도는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그 일 후로 인간이 겪는 육체적 고통에는 반드시 고독감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통증을 앓는 환자들은 온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만이 그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떤 불행을 당하게 되면,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느냐?”며 고독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의 경우, 누가 곁에 앉아서 그의 손을 꼭 잡아 주면 고통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고독감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통의 정신적 측면이 사라지고, 육체적 고통만 남아 결국 고통이 반감되는 것을 엔도는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이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엔도는 예수님이 바로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나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곁에 앉아서 그들의 손을 꼭 잡아줬던 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바로 이 예수님의 행동, 병든 자의 손을 잡아주고,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그들의 고독감을 나누어 가지려했던 행동이 기적의 근본이었다는 것이다.
엔도의 깨달음처럼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심어주기를 원하셨던 인물상은 그분이 난치병을 고치는 능력자가 아니라, 좌절과 절망에 빠진 자들과 병든 자들의 손을 잡아주고, 어루만져줌으로써 주저앉은 그들이 일어설 수 있게 하고, 좌절과 절망에 빠진 그들이 위로를 받고 용기를 내게 하는 사랑의 실천자였을 것이다. 엔도의 생각을 듣고 보니,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했던 제자들이 새 힘을 얻고 180도 달라진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좌절과 절망에 빠져 주저앉았던 제자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조차 의심했던 제자들을 찾아다니시며, 그들의 손을 잡아 주시고,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봄볕처럼 따스하고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시며, 사명을 부여하셨기 때문이란 확신이 서게 되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랑으로 제자들의 손을 꼭 잡아주셨을 때, 제자들은 재기의 힘을 얻고 일어서는 현재적 부활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손을 잡아주는 순간이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우리 인간이 꿈꾸고 상상하는 유토피아를 보다 확실한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게 한 역사적 사건이다. 죽음의 겨울을 끝내고 봄의 향연을 만끽하는 지구북반구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곤 했을 것이다. 인간들은 종종 영원한 봄을 꿈꿨다. 몇 가지 사례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로마 사람들은 낙원인 엘뤼시온의 들판(상젤리제)과 무한지옥인 타르타로스가 모두 다 음부(에레보스)인 지하세계에 있다고 믿었다.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서 혼령으로 가야하고, 비통과 시름과 타오르는 불과 망각의 강들을 건너야 한다. 음부의 봄은 지상과는 반대로 겨울처럼 삭막하고 냉랭하다. 음부를 지배하는 하데스가 부인 페르세포네를 지상으로 보내놓고 그녀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시름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지상에는 페르세포네의 부활로 대 자연이 봄기운을 한껏 받아 새싹을 내고 꽃을 피운다. 그리스로마 사람들은 지상의 봄을 지하세계의 겨울로 이해했던 것 같다.
중국 사람들은 복사꽃이 활짝 핀 무릉도원의 봄을 가장 이상적인 유토피아로 꿈꿨다. 물과 곡물이 풍부하고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이곳을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차단된 세계이다.
유럽 사람들은 황금시대를 지배한 농경의 신(神)인 사투르누스의 영원한 봄의 정원 아르카디아를 유토피아로 보았다. 아르카디아는 그리스 중부지방에 실존했던 초원지역이었으나 원래 힘겹고 고단한 삶을 운명처럼 알고 살아야했던 황량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 땅은 베르길리우스에 의해서 음악을 창조하는 목동들이 가득한 풍요의 땅이자 시와 노래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장소로 묘사된 이후, 오비디우스가 이렇게 노래했다. “군대의 도움이 없이도 사람들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유지한다. 비옥한 토지는 굳이 곡괭이질을 하지 않아도 풍부한 과일을 선사해준다. 사람들은 아무런 수고 없이도 만족할만한 수확물을 거두어들인다. 봄날은 영원하고 잔잔한 서풍이 종자 없이 태어난 꽃들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잠시 후면 대지는 쟁기질을 하지 않아도 풍성한 수확물들로 가득찰 것이며, 들판은 돌보지 않아도 고개 숙인 이삭으로 하얗게 덮일 것이다. 우유와 감로주가 강물처럼 흐르고 녹색 호랑가시나무에서 황금빛 꿀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이후 유럽의 화가들은 다양한 해석을 통해서 아르카디아의 이상을 화폭에다 그려냈다.
영원한 봄을 꿈꾸는 인간들에게 그 꿈을 가장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 기독교가 제시하는 부활신앙이다. 기독교가 인생의 문제에 주는 해답은 부활이다. 인생의 문제란 죽음을 말한다. 죽음은 자연법칙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런 것이다. 그렇지만 죽음에는 고통이 따른다. 죽음의 포괄적인 의미 속에는 정신적인 죽음, 육체적인 죽음, 생태환경의 파괴, 각종 질병, 고통, 고난이 포함된다. 성서는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된 인간의 부활로 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한다. 기독교이외에 그 어떤 종교에서도 부활과 부활의 축복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앞서 소개한 이야기들도 부활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엘뤼시온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는 곳이고, 무릉도원과 아르카디아는 죽기 이전의 목가적인 삶을 말한다. 따라서 부활 없이 봄날이 영원히 지속되는 땅에서 산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일장춘몽이다.
성서가 말하는 부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영혼의 부활이고, 둘째는 육체의 부활이다. 부활은 죽은 후에 다시 사는 것을 말한다. 성서가 말하는 죽음이란 분리와 단절을 말한다. 죽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죽음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들의 영혼의 죽음을 말한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결국 인간들 사이의 단절로 이어진다. 이를 우리는 영적인 죽음이라 말한다. 그래서 영혼의 죽음 혹은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단절, 인간들 사이의 단절을 말한다. 둘째 죽음은 죄의 삯으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죽음으로써 인간의 육체는 썩어서 자연에로 돌아가고, 그의 영혼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낙원이나 타르타로스로 간다. 셋째 죽음은 악인들이 부활하여 불 못에 들어가 당하는 영원한 저주를 말한다.
성서는 단절과 죽음의 이유를 죄 때문이라고 말한다. 죄란 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항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관계가 깨지는데서 악이 생겨나고 악이 죄로 발전된다. 관계가 깨지는 가장 큰 원인은 소통의 단절과 무관심이다. 현대인들은 소통의 도구들을 발전시켜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핸드폰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사회는 단절과 무관심에 대한 대가, 곧 고통을 가장 크게 치르고 있다. 이익창출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는 현대사회는 이웃을 이익창출의 대상과 도구로만 삼는다. 그것에 반비례해서 마음에서 우러난 사랑과 관심은 사라져가고 있다. 사랑과 관심이 사라져간다는 뜻은 사회가 점점 극악해져 간다는 신호이다.
현대인들은 하나님과도 멀어져 가고 있고, 이웃들과도 담을 쌓고 지낸다. 안보면 멀어진다는 속담대로 예배와 기도회를 멀리하고, 기도와 성경읽기를 멀리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진다. 멀어지면 사랑이 식고 무관심해지며, 단절되고 분리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소통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부부관계, 부모자식관계, 교우관계, 인간관계 모두가 깨지고 만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태도란 말이 있다. 사랑의 종류에는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세 가지가 있다. 먼저 에로스는 이기적이어서 최초의 관심도 최후의 관심도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다. 둘째로 필리아는 상호적이어서 받는 만큼 주는 것이다. 셋째로 아가페는 이타적이어서 보답을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은 아가페이다.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사랑도 아가페이어야 한다.
모든 사랑은 자기 사랑이다. 크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는 ‘자기 사랑’을 네 가지로 정의한바 있다. 첫째로 자신을 위한 자기 사랑, 둘째로 자신을 위한 하나님 사랑, 셋째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 사랑, 넷째로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 네 가지를 말했다. 이 가운데서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과 이웃을 위한 자기 사랑이 가장 바람직한 사랑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하나님 사랑과 자신을 위한 이웃 사랑이 가장 잘못된 사랑이다.
이웃 사랑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웃의 마음에 들어야만 이웃 사랑이 되는 게 아니다. 이웃 사랑은 그 이웃이 좋아하든 싫어하던 간에 그에게 유익이 되게 하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한다면, 자식이 싫어할지라도, 회초리를 들어야할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올바른 사랑, 곧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자기 사랑만이 중생(거듭남), 곧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회복, 인간끼리의 회복을 낳게 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봄날을 이루게 한다. 이 중생체험 또는 관계회복체험이 현재적 부활체험이다.
통증이 심한 환자에게, 특히 진통제도 듣지 않고, 모르핀도 듣지 않는 환자에게 가장 효과가 큰 진통제는 곁에 앉아서 환자의 손을 꼭 쥐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때때로 간호사들이 교대로 손을 잡아줘야 할 정도로 통증이 심한 환자도 있지만, 사랑으로 손을 잡아주면 통증이 가라앉는다고 한다. 엔도 슈사쿠는 예수 지하철을 타다에서 자신이 병원에서 직접 보고 또 체험한 일을 통해서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엔도는 난치병으로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아야 했을 정도로 고치기 어려운 병이었다고 한다. 입원한 날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로 괴로움을 호소하는 폐암 환자를 보게 되었다. 그 환자는 의사였기 때문에 자신이 폐암에 걸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게다가 진통제도 듣지 않을 정도로 통증이 심하다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 환자에게는 모르핀도 소용이 없었다. 오로지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간호사들이 그분의 손을 꼭 쥐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통증이 차차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고통을 겪는 환자들에게 가족이나 간호사들이 손을 잡아주고 있는 모습들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리고 일 년 반쯤 후에 엔도는 수술을 받게 되었고, 수술 후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을 겪게 되었다. 의사에게 마취제를 놓아주기를 간청했지만, 의사는 중독의 염려가 있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대신 한 간호사가 그의 곁에 다가와 앉더니 그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이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아픔이 조금씩 가시는 것을 엔도는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그 일 후로 인간이 겪는 육체적 고통에는 반드시 고독감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통증을 앓는 환자들은 온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만이 그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떤 불행을 당하게 되면,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느냐?”며 고독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의 경우, 누가 곁에 앉아서 그의 손을 꼭 잡아 주면 고통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고독감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통의 정신적 측면이 사라지고, 육체적 고통만 남아 결국 고통이 반감되는 것을 엔도는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이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엔도는 예수님이 바로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나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곁에 앉아서 그들의 손을 꼭 잡아줬던 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바로 이 예수님의 행동, 병든 자의 손을 잡아주고,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그들의 고독감을 나누어 가지려했던 행동이 기적의 근본이었다는 것이다.
엔도의 깨달음처럼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심어주기를 원하셨던 인물상은 그분이 난치병을 고치는 능력자가 아니라, 좌절과 절망에 빠진 자들과 병든 자들의 손을 잡아주고, 어루만져줌으로써 주저앉은 그들이 일어설 수 있게 하고, 좌절과 절망에 빠진 그들이 위로를 받고 용기를 내게 하는 사랑의 실천자였을 것이다. 엔도의 생각을 듣고 보니,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했던 제자들이 새 힘을 얻고 180도 달라진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좌절과 절망에 빠져 주저앉았던 제자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조차 의심했던 제자들을 찾아다니시며, 그들의 손을 잡아 주시고,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봄볕처럼 따스하고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시며, 사명을 부여하셨기 때문이란 확신이 서게 되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랑으로 제자들의 손을 꼭 잡아주셨을 때, 제자들은 재기의 힘을 얻고 일어서는 현재적 부활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손을 잡아주는 순간이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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