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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의 손을 잡아주기(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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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339 2009.05.03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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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의 손을 잡아주기(엡 6:4)

한 때 ‘자수성가’란 말을 즐겨 썼던 사람이 있었다. 그가 2살 때 그의 부친이 모친을 버리고 나가 재혼을 했고, 그의 모친은 그를 외가에 맡겨놓은 채 입주가사도우미를 하였다.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외가댁이 빚더미에 몰려 집을 처분하고 쪽방으로 이사를 하자, 그는 부친에게 보내져 초등학교 1-2학년을 농사를 거들며 힘겹게 보냈다. 그리고 초등학교 3년 때인 1960년 이른 봄날 집을 떠났다. 집을 나온 후 늦여름부터 7개월간 연세 많은 할머니와 손녀가 사는 한 시골집에서 머슴을 살았고, 1961년 봄부터 여름까지, 곧 5.16군사혁명 때에는 서울의 한 보육원에서 지냈으며, 여름 한철을 마포의 한 굴다리 밑에서 넝마주이들과 함께 보냈고, 가을과 겨울 한철을 서울역 주변 남대문시장과 자유시장 등지에서 보냈다. 그리고 5.16 군사혁명 직후 일제단속으로 거리에서도 굴다리 밑에서도 지낼 수 없게 된 그는 굴다리 밑에서 잠간동안 함께 지냈던 형들과 그들을 보육원에 보냈던 한 외국인의 극적인 배려로 1962년 1월 말에 형들이 이끌어준 보육원에 들어갔으며, 1971년 여름까지 9년 반 동안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친 후에 자립의 의지를 갖고 퇴원하였다. 대학을 보내줄 테니 퇴원하지 말라는 원장 선교사의 간청을 뿌리쳤다. 농공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3학년 2학기는 실습기간으로 취업할 수가 있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각각 한 차례씩 경기도 교육감 상도 받았고 장학금을 받아 약간의 저축금도 있었다. 보육원을 떠나 다시 객지생활에 접어든 그는 6개월간 인생실습을 한 끝에 신학공부를 결심하게 되고, 담임목사의 추천을 받아 신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르고 수석장학생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노동과 공부를 절반씩 하면서 신학교 4년 과정을 마쳤고, 최우수 학업우수상도 받았다. 학업 중에는 3년의 군복무도 마쳤고, 졸업 후에는 곧바로 결혼도하였다. 무일푼이었고, 숫한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그의 손을 붙잡아준 고마운 분들이 있어서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
졸업 후 3년간은 교회에서 전도사와 고등기술학교 학생과장의 일을 하다가 미국에 유학할 수 있는 길이 열려 1982년 1월에 미국에 있는 한 신학대학에 근로를 겸한 장학생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그가 당시에 그토록 취득하기 어려운 복수여권과 유학 비자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1981년 전두환 씨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고등학교 성적 상위 20퍼센트 이내에 든 졸업자들에게 복수여권과 유학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플시험을 치르고, 입학허가서를 발급받은 후에 복수여권과 유학 비자를 받아서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가 미국에 건너갈 때 손에 쥔 돈은 60만원, 800불뿐이었다. 그 후로는 단돈 천원도 한국에서 가져다 쓴 일이 없었다. 오히려 약간의 돈을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부치곤 하였다. 학부를 마친 후에 대학원에 들어갔고, 미국에 간지 2년 4개월 만에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던 가족비자를 미국상원의원의 협조를 얻어 받을 수 있었다. 가족부양과 학비 일부를 벌기 위해서 노동을 겸해야 했지만, 어려움에 처한 그의 손을 힘껏 잡아준 고마운 분들이 있어서 신학대학원에 머문 만4년 동안 122학점을 취득했고, 평균성적 94.8로 졸업하였다. 학교를 졸업하자 한국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쳐달라는 학장의 권고를 받고 37살에 처음 교단에 선 후로 20년 넘게 가르치는 동안 16권의 책을 써서 엮고, 4권을 번역하였으며, 수많은 교회들이 개척되고 교단이 발전되는 일에 힘을 보탰다.
그는 한 때 ‘자수성가’란 말을 자주 썼지만, 그것이 잘못된 표현이란 것을 이내 깨달았다. 그의 성공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라, 그의 손을 붙잡아준 수많은 이들이 합작하여 만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축복의 통로로 쓰신 하나님이 만들어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열심히 공부해서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도 물론 있었겠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께서 축복의 통로로 쓰신 수많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처럼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일은 가정을 일으켜 세우고, 교회를 부흥시키며, 나라를 강성하게 만드는 일이다.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순간이 바로 그들에게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아이들의 인생이 쓸모없이 버려지느냐, 아니면 훌륭한 인재로 성장되느냐는 어른들의 관심과 기도와 후원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일에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한다.
요즘 멘토링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언급하고 있다.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영적, 정신적, 물질적 멘토가 되는 일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앞당기는 소중한 일이다. 자기 자녀에게만 잘하려하지 말고, 남의 자식도 내 자식처럼 돌볼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하다. 베풀면, 베푼 만큼 그 복이 되돌아온다.
일본에서 성녀로 추앙되는 조선인이 있다. 이름은 ‘오다 줄리아’(1590?-1651)이다. 오다 줄리아는 임진왜란 당시 세 살 무렵에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의 신앙 선조이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대영박물관과 로마에 있는 예수회본부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1971년이었다.
전쟁고아였던 이 소녀는 임진왜란(1592년-1598년)때 한반도에 출병한 일본군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끼나가’(少西行狀)에 의해 일본으로 보내져서 고니시의 처(妻)에 의해 길러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녀의 삶을 소설로 그린 ‘모리 노리꼬’는 고니시의 딸 마리아 밑에서 쓰시마 섬에서 성장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어떤 주장이 옳던 간에 전쟁터에 버려진 어린아이를 거둬들여 돌본 이들이 없었다면, 일본인들의 가슴에 길이 남을 조선인 성녀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에서 오다 줄리아는 세 살 무렵에 진주성 근처 강가에서 도자기 흙을 구하려고 나왔던 도공 부자에 의해서 발견된다. 아이를 업은 어머니가 강가로 피난했다가 일본군의 겁탈을 피하려고 아이를 곁에 둔 채 장도로 자결을 했던 것이다. 세 살배기 어린아이를 불쌍히 여겨 집에 데려온 가난한 젊은 도공은 이미 자녀가 다섯 명이나 있었지만, 발견된 아이를 모른 채할 수가 없었다. 그 후 몇 년이 못 되어 이들 도공들은 일본군에 납치되어 고니시 유끼나가와 그의 사위인 쓰시마의 성주 ‘소오 요시도시’가 진을 치고 있던 웅천 성을 거쳐 쓰시마 섬에 잠시 머문 후에 나가사키로 보내졌다.
포로를 실은 배가 쓰시마 섬에 잠시 머무는 동안 일본군 졸개에 의해서 사창가에 팔릴 뻔했던 오다 줄리아는 골목 구멍가게 앞에서 매를 맞고 있다가 때마침 고니시의 딸 마리아에게 발견되었고, 그녀 밑에서 기품 있는 아리따운 가톨릭 여성으로 변모하였다. 고니시 유끼나가와 그의 딸 마리아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마리아의 남편 소오 요시도시도 신자였다. 오다 줄리아는 병약했지만 성품이 착한 마리아의 귀여움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한편, 고니시는 임진왜란 직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를 이어 권좌에 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교회를 탄압하자 이를 막기 위해 전투에 참가했다가 패배하였고, 1600년 43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다. 교오또의 로꾸조오 강변에서 처형된 고니시의 시신은 예수회로 운구 되어 장례가 치러졌다. 고니시는 가족에게 남긴 유서에서 자신에게 닥친 불운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므로 감사한다면서 “앞으로 너희들은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봉사하라”고 당부하였다.
고니시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서 마리아도 29살의 나이로 아버지의 군목으로서 조선의 웅천성에서 왜군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던 ‘세스페데스’ 신부의 임종미사를 받으며 눈을 감았다. 이후 십대 후반의 꽃다운 미모를 가진 오다 줄리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로 들어가 쇼군의 총애를 받았지만, 일신의 안일을 생각지 않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해 동정과 믿음을 지키려고 했다. 이 점에 대해서 선교사 ‘이론죠 뮤노스’가 마닐라 관구장에게 1607년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숙녀는 신심이 깊고, 또한 자비와 자비의 표본이며,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에게 친절을 베풀 뿐만 아니라, 때때로 교회에 와서 열심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밝혀야한다면 내가 가장 먼저 나서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다른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쇼군의 첩으로 생각되었기에 성체를 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제게 말했습니다. ‘만일 쇼군이 다른 여자들을 부르는 것처럼 그의 방에 나를 부르더라도 거기에서 빠져 나오는 것은 간단합니다. 안되면 장군의 요구를 들어주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오다 줄리아는 끝내 도쿠가와의 수청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배교를 거부하다가 1612년 4월 20일 오오시마(大島)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니이시마(新島)로 옮겨진 후에, 다시 무인도인 고즈시마(神津島)로 옮겨졌다. 그녀가 이렇게 점점 더 외딴 섬으로 옮겨진 이유는 그녀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감화시켜 예수님을 믿게 하였기 때문이다. ‘마테우스 코로스’ 신부가 1612년에 예수회에 보고한 문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싣고 있다.
“쇼군은....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줄리아가 배교할 수 있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줄리아는 ‘쇼군에게 많은 혜택을 받은 것은 사실이며, 나는 그에 걸맞은 봉사를 할 생각이지만, 그 이전에 나를 있게 하신 하나님은 내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시어 하나님의 진리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땅의 왕을 즐겁게 하기 위해 하늘에 계신 주님을 슬프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줄리아는 40년간의 유배생활의 끝인 1651년에 유배지인 고즈시마에서 사망하였다. 가난한 도공 부자의 박애정신과 고니시 유끼나가 가문의 그리스도의 정신이 불행한 역사의 희생자로 전쟁터에 버려졌던 한 어린 소녀를 일본의 성녀로 만들어냈다. 줄리아는 자신의 부모와 조국을 짓밟았던 일본인들을 미워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녀가 익힌 한방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들에게 한없이 쏟아 부었다. 어린아이는 미래의 기둥이다. 그들을 어떻게 돌보느냐에 따라서 한 가정의 미래뿐 아니라, 교회의 장래와 나라의 미래가 걸려있다. 우리 모두는 그들의 미래를 책임진 멘토들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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