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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성(요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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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370 2009.06.05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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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성(요 1:12)

삶이 녹록치 않고, 힘들고 고달프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 남하고 ‘나,’ 또는 남들과 ‘우리’를 비교하게 되면, 자신이 짊어진 인생의 짐이 훨씬 커 보이고, 슬픔이 절반쯤 섞인 아련한 아픔이 가슴을 저며 온다. 기억의 수면아래에 있던 ‘외롭다,’ ‘쓸쓸하다’는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것이 자주 반복되면, 우울증이 되고, 심하면 죽음에 이르는 절망에 빠지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약간씩 센티멘털한 기분을 갖고 산다. 그런 기분이 자신을 돌아보게도 하고 시인이 되게도 한다.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또 뭔가? 이런 물음이, 마치 잔잔한 호수에 물결이 일듯, 마음에 일 때, 가끔씩 헤라클레스의 영웅적 삶을 생각해 본다. 결코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의 삶을 동경해본적도, 율리우스 카이사르, 칭기즈칸, 나폴레옹과 같은 전쟁영웅들의 삶을 부러워해 본적이 없다. 최고 권력에 도전한 전쟁영웅들의 삶은 허무한 것이었다. 그들 안에 진정한 영웅성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떠날 때 빈손으로 갔다.

알렉산드로스가 소아시아를 정복할 때, 골디온의 신전기둥에 그 누구도 풀지 못한 매듭이 있는데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세상을 지배하는 왕이 된다는 전설을 듣고 달려가 단칼에 그 매듭을 잘라버렸고, 실로 그는 칼로써 세계를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그가 망령처럼 헤맸던 전쟁터에서 병을 얻어 33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후손과 가족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그가 병으로 죽음에 이르렀을 때 자기가 누웠던 침상을 바라보다가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 “죽어서 내 육신이 누울 공간은 한 평뿐인 것을… 이 한 평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며, 수만 리 길을 달려왔단 말인가... 내가 죽거든 나의 두 손을 관 밖으로 나오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천하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언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알렉산드로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칭기즈칸, 나폴레옹과 같은 전쟁영웅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영웅성을 갖고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이들 전쟁영웅들과는 다르게 자신에게 부과된 가엾은 운명과 싸웠고, 싸움을 하되,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했으며, 옳은 가치와 정의를 위해서 했다. 그는 지혜의 신 아테나의 도움을 받았다. 신의 도움 없이 혼자의 힘으로 영웅의 반열에 오른 게 아니다. 신은 고난을 극복할 방법을 항상 예비했고, 헤라클레스는 그 방법을 찾아 난관을 극복했다. 신은 앞문을 닫으면, 반드시 뒷문을 열어두신다는 확신이 헤라클레스에게 있었다. 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련을 주시지만, 그 시련으로 그를 성숙하게 만들고, 진정한 영웅이 되게 하여 영광을 누리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헤라클레스는 최후까지 신 앞에서 겸손했다. 그런 그에게 그를 그토록 괴롭혔던 헤라 여신까지도 박수를 보내며, 자신의 딸까지 주어 부인을 삼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헤라의 영광’이란 이름을 받게 되었다. 이런 점 때문에 무신론철학자 니체가 고독한 인간들에게 ‘신이 죽었다’고 외치면서 종교에서 위안을 찾지 말고, 헤라클레스처럼 모든 고난을 극복한 초인이 되라고 권한 것은 잘못 말한 것이다.

삶이 녹록치 않고, 힘들고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 때, 자신이 짊어진 인생의 짐이 평소보다 커 보일 때, 슬픔이 절반쯤 섞인 아련한 아픔이 가슴을 저며 올 때, ‘외롭다,’ ‘쓸쓸하다’는 기억이 되살아날 때, 마음이 우울해지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란 물음이, 마치 잔잔한 호수에 물결이 일듯, 마음에 일어날 때, 신에 대한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한 헤라클레스의 영웅적 삶을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신의 존재와 도우심을 부정하는 자들은 스스로 제 문제를 해결해야하며, 자기를 구원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신앙심을 나약한 자들의 자기투영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헤라클레스에게 있었던 깊은 신앙심을 간과하고 있다. 이들의 대표적인 인물, 니체는 권력지향적인 강한 ‘초인’이 되라고 말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과 좌절감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몸과 마음을 잘 단련하고 헛된 희망을 버려야 하며, 종교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니체는 행복이란 거짓 위안일 뿐, 슬픔과 고통이 더 인간적이라고까지 했다. ‘불행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강박관념이라고 했다.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이나 그런 고집스런 주장이 세상을 모순덩어리로 보게 만든다고 했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뿐 아니라, 책임져야 하며, 타고난 운명이외에 아무 것도 되기를 원치 않는 인간이 되라고 했다. 만약 운명의 신이 당신에게 나타나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야할 당신의 인생이 가감 없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라고 묻는다. 또 모든 행동에 앞서 또는 모든 행동을 한 후에 ‘이 행동이 영원히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가?’라고 묻고, 그 물음에 환희에 찬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다면, 그는 권력에의 의지를 긍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초인이라고 말한다. 약한 자는 내세에 희망을 걸고 살지만, 강한 자는 현재의 삶을 즐긴다고 했다.

니체는 영웅 헤라클레스를 닮으라고 했지만, 헤라클레스는 니체가 말한 대로 운명에 자신을 맡긴 채 자신의 운명을 즐긴 인물이 아니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헤라클레스는 신들이 인정한 영웅의 반열에 오를 수 없었다. 헤라클레스는 니체처럼 숙명론자가 아니었다. 그는 우연과 숙명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가엾은 운명과 싸웠다. 싸움을 하되,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했고, 옳은 가치와 정의를 위해서 했다. 그는 지혜의 신 아테나의 도움을 받았다. 신의 도움 없이 혼자의 힘으로 영웅의 반열에 오른 게 아니다. 신은 고난을 극복할 방법을 항상 예비했고, 헤라클레스는 그 방법을 찾아 기어이 난관을 극복했다. 헤라클레스는 최후까지 신 앞에서 겸손했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아테나의 영웅 테세우스가 복잡한 미궁에 들어가 괴물과 싸울 때에 아리아드네가 건넨 실타래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과 같다.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그 복잡한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덕분이었다. 우리가 믿음의 끈을 놓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일의 시인 쉴러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용감한 헤라클레스는 끝없이 싸우며 괴로운 가시밭길을 걸었다.... 헤라의 증오는 지상의 모든 고뇌를, 지상의 모든 수고를 그에게 짐 지웠으나, 운명의 생일로부터 저 장렬한 최후의 날까지 그는 이 수고를 훌륭하게 참아내었다.”

헤라클레스가 오른 곳은 하늘의 신전이었다. 히브리서는 성도들이 올라가 도달할 곳을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나라라고 했다. 니체가 하늘에 거는 소망은 모두 헛것이니, 땅에 것인 권력에의 의지를 불태우라고 한 것처럼, 유대인들은 소망을 오로지 팔레스타인 땅과 그 권력에 두었다. 그들은 그 땅, 예루살렘과 시온에 가는 것을 오름이라고 했다. 그러나 땅의 것은 유한하고 일시적이다. 땅에 것에 소망을 두었던 유대인들은 2600년이 넘도록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희망을 노래하지만, 그들의 희망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에게 오름의 방향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하늘의 것’과 ‘영원한 것’에로 오를 것을 권하고 있다. 땅의 것은 그림자요 모형일 뿐, 실체와 원형은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하늘의 것,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현실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름을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헤라클레스처럼 적극적으로 삶의 갈등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를 끝내고, 저 하나님의 나라에 오르는 날,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군천사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승리자로서 월계관을 받아쓰게 되고, 진정한 의미의 안식과 쉼을 얻을 것이다.

이 오름의 행진을 앞장서서 인도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고린도후서 5장 5절을 보면,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이 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지만, 영어성경에서는 이 말씀이 “장차올 것을 보장하는 보증금으로써”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번역되었다. 여기서 성령님은 ‘장차올 좋은 것’에 대한 ‘약속’의 ‘보증금’과 ‘인감’으로써 설명되었다. 그리고 바울서신들에서 ‘장차올 좋은 것’은 ‘영원한 집,’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생명,’ ‘부활’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히 사는 부활의 몸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보장하는 보증금과 인감으로써”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한다.

바울은 또 ‘장차올 나라’에서 받을 상속을 ‘기업’이란 말로 설명하였다. 에베소서 1장 14절을 보면, 고린도후서 5장 5절에서 사용된 “장차올 것을 보장하는 보증금”이란 말 대신에 ‘기업에 대한 보증’이란 말을 쓰고 있어서 우리가 장차 받을 기업, 상속의 내용은 ‘장차올 좋은 세상’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베소서 1장 18절에서는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게 되기를 간구하고 있다.

헤라클레스가 죽어서 신전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늘 함께 했던 신이 아테나 지혜의 여신이었다. 이 여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헤라클레스가 비록 제우스의 아들이었을지라도 그는 결코 그의 고달픈 삶과 무거운 인생의 짐을 영웅적으로 질 수 없었고, 슬픔이 절반쯤 섞인 아련한 아픔이 가슴을 저며 오는 죽음에 이르는 절망을 극복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록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을지라도 보호자로 우리 곁에 와 계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면, 결단코 영웅적인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움을 끊임없이 구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 성령님은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의 삶을 영웅적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성령님을 선물로 주시는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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