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운명(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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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운명(요 3:16)
인간에게는 자유도 있고, 운명도 있다. 자유는 활짝 열린 문과 같고, 운명은 굳게 닫힌 문과 같다. 열린 문은 출입이 자유롭지만, 닫힌 문은 출입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운명이란 닫힌 문을 여닫을 수 없다. 운명을 바꿀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운명을 바꿀 능력을 갖고 계시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함부로 운명의 문을 여닫는 것은 아니다. 만일, 하나님이 닫힌 문을 여신다면, 그 문은 더 이상 운명이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결정한 일을 번복하시지 않기 때문이며, 전지전능하시므로 실수가 없으시고, 오류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결정은 완벽 그 자체이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은 번복할 일을 행치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함부로 특히 나쁜 일로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는다. 인간에겐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닫힌 것이 많지 않은 대신에 자유와 기회는 활짝 열려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들 자유와 기회를 선용하여 자신의 발전과 유익을 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어진 자유와 기회의 소중함을 모른 채 방종하고 악용하는 사람도 있다. 자유란 것은 좋은 것이지만, 반드시 책임이 따라 붙는다. 만일 운전자가 운전 중에 문자를 보내거나 보내온 문자를 읽는다면, 그 행위는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지만, 그로 인해서 사고가 발생한다면, 그 대가는 자유를 악용한 사람이 치려야한다.
인간에게는 어떤 면에서 하나님보다 더 많은 자유가 허락되어 있지만, 자유를 누린 다음에는 반드시 선악간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고 안 하고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대부분 인간이 결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책임도 함께 져야한다. 그러므로 죄를 짓게 되면, 심판을 받게 된다.
인간에게는 운명이란 것이 있다. 운명이란 마치 굳게 닫힌 문과 같아서 아무리 열고 싶어도 열 수가 없다.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이 자연법칙이다. 자연법칙은 엔트로피법칙 또는 제2열역학법칙으로써 죽음의 법칙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 반드시 죽는다. 설사 생명이 없더라도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썩거나 병들거나 소모되어 사라진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운명이다.
죽음은 운명이지만 수명은 운명이 아니다. 인간은 주어진 자유와 기회를 활용해서 어느 정도 수명을 늘린다든지, 노화와 부패를 지연시킬 수 있다. 또 현상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여 치료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피조물은 만들어진 것이고, 만들어진 것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죽음이다.
예전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가 운명처럼 생각된 적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식물의 유전자 조작은 물론이고, 인간의 유전자까지 조작하여 맞춤형 아기를 생산할 수 있다. 타고난 신체를 고치는 성형은 유전자 조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기술이다. 이런 행위들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한다는 우려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능력이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궁극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다면 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반대로 인간이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운명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수많은 자유와 기회를 주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인간의 책임이 크고 피나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에게도 인간처럼 자유가 있고 운명이 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마음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결정하실 수 있다. 그래서 자유만 있고 운명은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기가 쉽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일 수도 있다. 인간이 오히려 하나님보다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누릴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책임감이 완벽하지만,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실수가 많고, 허물이 클 뿐만 아니라, 책임감이 약하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자유 자체가 하나님의 것이지만, 스스로 자유를 제한하시는 반면, 피조물인 인간의 자유는 허용된 것이지만, 과분하게 누릴 뿐 아니라, 오만이 하늘을 찌를 때가 많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자이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처럼 오만하게 자유를 누리지는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께 자유가 있다는 것은 함부로 혹은 마음대로 모든 것을 결정하거나 독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기 때문에 당신의 절대주권을 제한하시고 스스로 권한을 내려놓는다. 마치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 자유로운 동작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도 절대적인 능력과 지혜를 스스로 조절하고 제한하지 않으시면 자유를 누리실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결정하실 수 있지만, 한번 결정하신 것을 번복하거나 바꿀 수 없기 때문에 함부로 결정하시지 않는다. 만일 결정하신 후에 번복하거나 바꿀 일이 생긴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게 된다. 따라서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일단 무언가를 예정하시게 되면, 그것을 번복하거나 바꿀 수 없게 된다. 번복하거나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유가 많지 않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결정하신 것을 번복할 수 없는 운명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함부로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시지 않는다. 만일 인간들의 운명을 모두 결정해 버리시면, 하나님은 인간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실 수 없게 되고, 인간들을 위해서 하실 수 있는 일이 없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유를 즐기시기 위해서 대부분의 일을 미리 정해놓지 않고 열어 두신다.
하나님은 누구와의 상의도 없이 독자적으로 결정하시고 시행하시는 일도 있지만, 이런 것은 천지창조와 자연법칙이라든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것과 같은 큰 스케일의 일들이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독단적으로 결정하시기보다는 계명을 주시고 지키게 한 후에 상벌을 주시거나 인간이 바라고 소원하는 것을 허용하시는 등의 방법으로 관계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훈계의지와 허락의지라 부른다.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대부분 열어 두고 계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한 때 복을 내리셨던 인간에게 벌을 내리실 수 있고, 반대로 벌을 내리셨던 인간에게 복을 내리실 수가 있다. 벌을 내렸다가도 눈물을 흘리며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하실 수 있고, 진실한 이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욕심쟁이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수 있다. 하나님의 이런 자유롭고 임시적인 결정은 항상 모든 것이 열려 있는 상황에서 가능하다. 문이 항상 열려 있는 상황이면, 하나님도 그 문을 수십 번씩 여닫을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된다. 그래야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서 상벌을 반복해서 주실 수 있고, 인간은 최선을 다해 노력함으로써 자기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유를 제한하시면서 인간을 위해서 이렇게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계신다.
하나님은 관계의 신이시다. 유아독존을 즐기는 신이 아니라, 피조물과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매우 특별하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과의 이 특별하고 인격적인 행복한 관계를 계속 만들어 가시려면, 우리가 소위 말하는 ‘운명’이란 것을 많이 만들면 안 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정해버리시면, 그것들을 번복하실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없고, 인간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실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많은 것들을 열어 놓고 계시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이 분명하게 결정하신 것이 있다. 결코 번복될 수 없고, 포기될 수 없는 운명적인 결정, 그것이 바로 인간을 사랑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며,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겠다는 것이었다. 이 결정의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로써 하나님은 먼저 히브리 민족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다. 일찍이 하나님은 히브리민족과 시내산 기슭에서 언약을 맺은 일이 있다. 언약의 핵심내용은 히브리민족은 하나님 한분만을 참 신으로 알고 그분만을 섬기며, 우상숭배하지 않고, 그 어떤 형태의 우상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그 보상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하나님은 초지일관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배신하지 않으셨으며, 끝까지 그들을 버리시지 않고 품에 안으셨다. 그들이 사랑스러워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헌신짝 버리듯이, 고무신짝 바꿔 신듯이 하나님배신하기를 밥 먹듯이 하였다. 역시 인간은 믿을 것이 못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한번 맺은 언약을 끝까지 지키셨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셨다. 하나님은 믿을만하셨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셨다. 하나님은 오류가 없으셨다. 하나님은 한번 사랑하면 끝까지 영원토록 사랑하는 그런 고마운 분이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운명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눈물겨운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목숨을 건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운명을 함부로 결정짓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목숨을 걸고 사랑하신다. 그 사랑의 크기를 결정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고통을 감당하셨다. 이 하나님의 운명적인 사랑이 히브리민족에게는 모형과 그림자와 예표로써 나타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들에게는 원형과 실체로써 나타났다.
하나님의 눈물겨운 운명은 이렇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통 속에서 죽으실망정 한번 사랑하신 것을 싫다고 번복하실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운명적 사랑이고, 그것이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밖에 없는 복된 운명이다. 우리는 구원받을 수밖에 없고, 영생을 누릴 수밖에 없으며,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를 목숨 걸고 사랑하시는 절대 신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후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그분의 사랑을 기꺼이 받아드리기를 원하시고 기다리고 계신다. 운명적으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끝까지 우리 편에 서시고, 끝까지 책임지실 절대 신은 하나님 한분뿐이시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지 않으시겠는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복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자들이야말로 만세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 있던 자들이며, 예정되고 선택된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감싸 안으실 것이며, 구원에로 인도하시고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목숨을 주고 얻은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지 않으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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