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과 고난(고전 1: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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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 고난(고전 1:22-24)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돈의 부족이다. 돈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넉넉하지는 않을지라도 필요한 만큼은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돈이다. 둘째는 병고(病苦)이다. 질병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 또 질병은 돈을 먹는 하마이다. 돈이 없으면 필요한 치료를 받을 수 없다. 셋째는 원증회고(怨憎會苦)이다. 원망스럽고 미운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것을 인생이 겪는 여덟 가지 고통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불편한 환경이다. 환경이 나쁘면 매일처럼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야한다. 북한사람들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고통 속을 헤매야 한다. 침수지역 사람들은 폭우 때마다 침수피해를 입는다.
그래서 인간은 기적을 바란다.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조차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기적은 인간의 한 가닥 희망이다. 신자들 가운데는 기적을 바라고 교회를 찾는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행하신 여러 기적들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 기적들이 지금도 가능하다며 신유집회를 열고 있고, 또 사람들은 신유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을 찾아가 안수를 받는다. 목회자들은 치유목회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기도를 받고나서 병 고침을 받거나 문제해결을 받는다면, 목회자로서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교회부흥에 동력이 되겠는가? 실제로 기도 후에 병 고침을 받았거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신다. 우리가 그것들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응답하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깊이 알고 깨달아야할 것은 영웅성이 기적을 일으키는데 있지 않고, 고난을 이기는데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유대인들은 기적을 바랐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써 내리는 표적을 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구한 것은 모세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게 한 것처럼 빵과 연관된 기적이었다. 그러나 요나의 표적은 고통과 죽음을 이긴 부활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영웅성이 기적과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고난을 참고 이기는데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예수님이 위대한 것은 그분이 큰 능력들을 행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신 기적들에 있지 않고,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신 그 고통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고 하였다. 우리를 구원하는 힘은 큰 능력 행함이나 기적에 있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부과된 고난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데 있다. 진정한 영웅성은 강함에서 시작되지 않고 약함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절반인 1-8장까지는 예수님이 갈릴리지방에서 행하신 기적이야기, 나머지 9-16장까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겪으신 고난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기적과 고난은 상반된 내용이다. 기적과 고난은 매치가 어렵다. 성난 바람과 풍랑을 잠재웠고, 죽은 자를 살려내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친 능력자가 어느 날 갑자기 시시한 군인들 몇몇에게 체포되어 심한 매를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스토리는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이야기처럼 들린다. 마치 사랑과 정의가 상반된 개념인 것처럼, 그래서 사랑이 웃으면 정의가 울고, 정의가 웃으면 사랑이 우는 것처럼, 또 우산장사가 웃으면, 짚신장사가 울고, 짚신장사가 웃으면 우산장사가 우는 것처럼, 기적과 고난은 뭔가 상반되거나 모순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가복음서는 총 18개의 기적이야기를 소개한 직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고난이야기를 싣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이야기에서 기적이야기는 서론에 불과하고, 고난이야기가 본론에 해당된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서론치고는 너무 길기 때문에 ‘긴 서론’이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본론부분의 고난이야기보다는 서론부분 기적이야기를 훨씬 더 친근하게 느낄 것이고, 한층 더 좋아하리라 생각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기적을 바라고 고난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깊이 알고 깨달아야할 것은 영웅성이 기적을 일으키는데 있지 않고, 고난을 이기는데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정보 사이트(www.jinfo.org)에 따르면, 1901년부터 2009년까지 유대인 노벨상 수상자가 179명에 이른다고 한다. 조직이나 단체를 뺀 전체 개인 수상자들 가운데 22퍼센트를 차지하는 엄청난 숫자이다. 유대인 신분을 감춘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전체 수상자의 3분의 1이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2002년 핀란드 헬싱키대학이 세계 185개국 국민의 평균 IQ를 조사해 본 결과, 이스라엘의 IQ는 95(26위), 미국은 98(19위)인 반면, 한국은 106(2위)으로써 세계에서 두 번째로 IQ가 높은 나라로 판명되었다. 인간의 영웅성이 IQ의 높고 낮음에 있지 않고, 그들이 극복해온 고난의 세월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가복음은 이 사실을 밝히 보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뱃세다 장님의 눈이 열리듯이 우리들의 영안이 열리고, 귀먹고 어눌한 자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듯이 우리들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야 한다고 교훈한다. 그때 비로소 예수님의 영웅성이 그가 행하신 기적에 있지 않고, 그가 당하신 고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신 다음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4-38).
누가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영웅성을 네 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는 배척과 반대를 당하셨다는 것이다. 얼핏 우리 생각에 예수님이 사람들로부터 환영과 영광만을 받으셨을 것 같지만, 실상은 고향인 나사렛과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즉 전 이스라엘 땅에서 배척과 반대를 받으셨고, 그 끝은 십자가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에게 부과된 이 운명을 피해 가지 않았다. 둘째는 기도하셨다는 것이다. 얼핏 우리 생각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기도가 필요치 않았을 것 같지만, 예수님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셨고, 운명의 순간에도 기도하셨다. 셋째는 성령님으로 충만하셨다는 것이다. 얼핏 우리 생각에 독생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할 이유가 없을 듯싶지만, 예수님은 늘 성령님으로 충만하셨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셨다. 넷째는 순례자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떠돌이였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하셨다. 예수님이 도달할 목적지는 골고다언덕이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였다. 이처럼 예수님의 영웅성은 그분이 행하신 기적들에 있지 않고, 그분이 당하신 고난에 있다. 고난을 당하되, 기도하시고, 성령님으로 충만하시며, 운명으로 지워진 십자가를 묵묵히 감당하셨다.
사람들은 기적에서 영웅성을 찾는다. 힘이 세고 엄청난 괴력을 가진 헤라클레스와 같은 인물을 영웅이라 부르며 추앙한다. 사람들은 이런 물리적인 괴력에서 영웅성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의 진정한 영웅성이 그가 가진 괴력에 있지 아니하고, 그가 당한 험난한 고난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적에서 영웅성을 찾으면 찾을수록 인간은 천박해지고 가벼워진다. 그 점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숙고할 필요가 있다.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있지만,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만큼 무거운 운명의 짐을 짊어지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성실하게 수행해낸 인물이 많지 않다. 헤라클레스는 ‘알케이데스’가 자신에게 운명으로 부과된 극한의 시련과 역경을 다 이긴 후에 얻게 된 이름이다.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가엾은 운명과 치열하게 싸웠고, 싸우되,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하였으며, 옳은 가치와 정의를 위해서 했다. 그는 지혜의 신 아테나의 도움을 끊임없이 받았다. 신은 그런 그에게 고난을 극복할 방법을 항상 예비하였고, 헤라클레스는 그 방법을 찾아 난관을 극복하였다. 신은 앞문을 닫으면, 반드시 뒷문을 열어두신다는 확신이 헤라클레스에게 있었다. 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련을 주지만, 그 시련으로 그를 성숙하게 만들고, 진정한 영웅이 되게 하여 영광을 누리게 한다. 그러므로 헤라클레스는 최후까지 신 앞에서 겸손하였다. 그런 그에게 그를 그토록 괴롭혔던 헤라 여신까지도 박수를 보냈고, 자신의 딸까지 주어 부인을 삼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헤라의 영광’이란 이름을 받게 되었다. 이런 점 때문에 무신론철학자 니체가 고독한 인간들에게 ‘신이 죽었다’고 외치면서 종교에서 위안을 찾지 말고, 헤라클레스처럼 모든 고난을 극복한 초인이 되라고 권한 것은 정말 잘못 말한 것이다. 인간이 고독할 때는 그가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을 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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