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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카리스마 넘치는 떠돌이 예언자적 삶의 추종자 김은석 목사(고전 9:16, 벧후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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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284 2009.10.30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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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카리스마 넘치는 떠돌이 예언자적 삶의 추종자
김은석 목사(고전 9:16, 벧후 1:4-7)

김은석 목사는 ‘하나님’이란 단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창세기에 실린 ‘하님’이란 단어에 일일이 체크를 해놓고 그 사용빈도수를 209회로 체크했던 그는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이란 단어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사용빈도수를 112회로 체크하였고<성경 66권 전체에 쓰인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주'란 단어에 동그라미 마크를 해놓았다>, 총 1134절로 되어 있음을 적고 있다. 이는 그의 생각이 온통 하나님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김은석 목사는 등불과 관련된 생각이 많았다. 등불은 말씀(계시)의 불, 기도의 불, 성령의 불을 상징할 수 있다. 출애굽기 27장 21절에서 “燈天恒常(등천항상)”, 즉 ‘하나님 앞에 항상 등불을 밝힘’이라 적고 있고, 헌금관련 성구를 적은 메모지 옆에 열왕기하 8장 19절을 근거하여 “恒常一燈(항상일등) 주심,” 즉 ‘항상 한 등불을 주심’이라고 적고 있다. 또 출애굽기 29장 39절에서는 “朝夕(조석)으로 獻燈(헌등),” 즉 ‘아침저녁으로 등불을 밝힘’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그가 말씀과 기도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얼마나 희구(希求)하며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김은석 목사의 성서통독에는 한 가지 특이한 원칙이 있다. 구약과 신약을 함께 읽을 때에는 구약의 책은 장(章)의 순서대로 읽고, 신약의 책은 장(章)의 역순으로 끝장에서 시작하여 첫 장을 향해서 읽곤 하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구약과 신약을 함께 읽을 때에는 언제나 이 원칙을 취하고 있다.

김은석 목사는 가정보다는 교회와 복음전도에 최우선순위를 두었다. 예를 들어, 그는 출애굽기를 통독했던 1955년 1-2월 중에서 대전 자택에 머문 날은 단 하룻밤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광주 집회소(김재순)에 있다가 대전 선화동교회로 바로 갔고, 다시 경북 금능군(김천시) 대보교회를 거쳐 충북 괴산군 소수면의 수리교회(장천호)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6일을 머문 후에 대전의 집에 와서는 단 하루 밤만 지내고 다시 논산 충곡교회(안영천)로 옮겨 가서 5일 이상을 그곳에서 머물다가 전남 영광으로 떠나 그곳에서 출애굽기 통독을 마치고 있다. 1954년 2월 2일에도 해남군에서 영산포행 차를 기다리는 중에 출애굽기 통독을 마치고 있고, 1956년 1월 19일에는 목포에서 출애굽기 통독을 마치고 있다. 출애굽기 통독을 마친 54, 55, 56, 57년의 시점이 모두 1-2월경이고, 57년만 부강교회이고, 나머지 세 번은 전남의 끝자락이어서 김은석 목사는 가정보다는 하나님의 교회와 복음전도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살았던 분으로 여겨진다. 또 이런 남편과 아버지를 이해하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낸 김완례 사모와 명순, 성철 자녀들의 희생은 김은석 목사에 못지않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김은석 목사는 일 년이면 대부분의 날들을 전국의 교회들과 성도들을 순방하는데 할애하였다. 도대체 그에게는 무슨 일이 그토록 많았고, 집에도 잘 가지 못했을까? 교통은 물론이고 생활형편이 심히 어려웠던 당시에 타지에서 옷가지들의 세탁은 어떻게 했고 또 무슨 일을 하고 다녔을까? 이런 몇 가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가 성서에 남긴 메모를 통해서 이런 것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김은석 목사의 이동수단은 버스, 기차, 배 그리고 도보였고, 이렇게 자주 이동했던 것은 집회와 강의와 전도 때문이었다. 숙식은 교회주택이나 성도의 집에서 해결하였고, 세탁은 형편에 따라서 손수 하거나 맡겨서 해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김은석 목사의 교회 순방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집회를 포함한 전도활동과 성서강의였을 것이다. 그의 메모는 주로 성서를 어느 장소 누구의 집에서 몇 장까지를 읽었는가에 제한되기 때문에 어느 장소 어느 교회에 왜 갔었는지에 대해서는 혼인, 모친방문, 병석 등 특별한 경우들을 빼놓고서는 자세히 적어놓지 않았다. 그러나 “간다고만 하면 섭섭해 하니 답답함”이라고 적어놓은 것은 교회나 성도들이 그의 설교나 강의를 더 많이 듣지 못하는 데서 오는 서운함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에 그가 가는 곳에서는 항상 크고 작은 집회들이 열렸을 것으로 보인다. 최용호 목사의 박정자 사모는 처녀 때 이 일의 목격자로서 김은석 목사가 교회를 방문할 때면 늘 집회가 있었다고 말한다. 실로 그는 존경받는 목사였던 것이다.

김은석 목사가 전도하는 날은 365일 매일이었다. “1955년 3월 3일 목요일 마음에 감화되어 전도하는바 매일 일인씩 할 작정”이라고 적고 이어서 한 폐이지 촘촘하게 전도한 일자와 장소와 대상자의 성별, 이름, 나이를 적고 있다. 그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하였는가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가 남긴 성서의 한 페이지, 모세오경이 끝나는 신명기와 여호수아 사이의 빈 공간에 3월 3일부터 10월 말일까지 매일 일인 이상씩 전도하였다. 일일 단위로 전도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를 빼곡히 적고 있다. 그는 심지어 주일에도 전도를 빼놓지 않았다. 한번 마음에 결정한 것을 실천에 옮기데 그것을 끝까지 이루고 마는 김은석 목사의 의지력과 실천력은 가히 놀랄만한 것이었다. 10월 26일자에 더 이상 글씨를 쓸 공간이 없어서 아주 작은 깨알 같은 글씨로 이렇게 적고 있다. “26일부터 29일까지는 우연이 耳痛症(이통증)이 생기여서 外出不能(외출불능)으로 젼도 못함.” 병이 들어 외출을 하지 못할 경우가 아니면, 비록 그날이 주일이든, 생일날이든, 추석같은 무슨 특별한 날일지라도 전도를 빼놓지 않았던 김은석 목사였다.

김은석 목사의 전도대상은 남녀노소 군인 경찰 교사부인 등, 구분이 전혀 없었다. 4월 17일 주일날에는 “校先妻(학교 선생의 처) 一人게 젼도”라고 적기도 하였다. 10월 22일 날에는 “목포 평화하숙 주인에게”라고 적고 있다.

김은석 목사의 전도 장소는 부강, 대전, 연산, 소태, 충주, 서울, 강진, 상월, 목포 등 대한민국 구석구석이었다. 김은석 목사는 이동이 잦았기 때문에 성서통독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와 기차를 이용하여 이동 중일 때에도 전도하였고, 출발지와 도착지에서도 전도하였다. 전도를 하지 못한 날은 “불젼인” 혹은 “젼불인”이라고 적고 있는데, 그 숫자가 일 년을 통틀어 몇 번 되지 않는다. 특히 8월 20일자에서는 “주님 앞에 죄송함. 금일은 불젼인”이라고 적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고 한 사도 바울의 전도열정에 못지않은 김은석 목사의 열정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토록 김은석 목사는 그의 짧은 일생을 전도 집회와 성서강의를 위해서 헌신하였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입양한 남매가 살고 있는 자신의 집이 있었지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떠돌이 전도인의 삶을 그대로 추종하였던 것이다. 분명 그는 예수님의 떠돌이 카리스마 넘치는 예언자의 삶을 추종하였던 것이다.

김은석 목사의 성공적인 사역의 배후에는 인간관계가 있다. 한 인간의 성공과 실패의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관계가 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크고 작은 공과(功過)가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관계가 좋았을 경우에는 과(過)보다는 공(功)이 앞세워지게 된다. 뛰어난 하나님의 일군들에게도 크고 작은 실수가 없지 않다. 이 점은 김은석 목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후대에까지 존경을 받는 것은 공(功)이 과(過)보다 크고 인간관계가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은석 목사의 좋은 인간관계를 말해주는 증거들은 많다. 먼저, 그가 관계한 혼인의 일만 보더라도 중국에서 2쌍, 일본에서 8쌍, 본국에서 60쌍, 총 70쌍이나 된다. 이들 중에는 지철희 목사(벧엘교회), 문원섭 목사(유성교회), 김태수 목사(미국), 최요열 목사(조동호 목사의 소년시절 교회 담임목사), 김규상 목사, 박점상 목사, 최순국 목사(미국 시카고) 등이 포함되어 있다. 61세의 짧은 일생을 마친 김은석 목사로서 70쌍 이상의 혼인에 관계하였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는가를 말해준다.

김은석 목사가 1960년에 연하장을 보낸 곳은 개인 38명, 교회 31곳이었다. 당시는 형편이 곤궁한 때였기 때문에 꼭 받아야할 사람들에게만 연하장을 보냈다. 그런 면에서 개인 38명과 교회 31곳은 결코 작지 아니한 숫자이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이들과 친분을 쌓고 있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또 양녀 김명순의 결혼통첩을 개인 37명 교회 25곳에 보내고 있다. 연하장을 보낸 곳과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다른 이름들도 꽤 발견되었다. 이뿐 아니라, 김은석 목사는 별세자들의 명단까지 적어두었는데, 여기에는 정창성 목사(1957년 4월 25일), 김재순 목사(1958년 2월 26일), 강순명 목사(1959년 3월 12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동료의 기일까지 챙기는 그의 인간적인 면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믿어진다. 이런 점 때문에 그의 전도사역은 성공적일 수밖에 없었고 동역자들이 늘 곁에 있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믿음과 행위의 일치를 위해서 분투하였다. 그의 이런 모습은 그의 다음의 글에서 발견된다.

1956년 1월 19일 아침 목포시 죽교동 39번지 진성구 장로 댁에서 출애굽기 37-40장 끝까지 봉독하였다. 그런대 이번 또한 출애굽 성경을 봉독하는 중 더욱 깨달은 것은 출애굽이 문제인 동시에 애급에서 나와서 장막 치는 법과 장막 위에서 구름이 덮여서 떠오르고 덮이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는 것을 더욱 깨달은 점이다. 지금 교회들도 다만 한 가지 믿음만으로도 아니요, 사랑만으로도 아니요, 믿음으로써 구체적 문제를 가르치신 말씀은 베드로후서 1장 4-7절에 나타난 말씀을 아울러 생각할 것이다. 진실로 이런 것을 누구보다 주님 사명을 받아진 교역자가 분명히 알고 가르치면서 행하여야할 것임이니라.

베드로후서 1장 4-7절의 내용은 이렇다. “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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