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의 자료와 게시판을 분류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료 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

김은석 목사의 인생추수(마 10:34-39)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조동호
댓글 0 조회 12,548 2009.11.08 20:09

본문

김은석 목사의 인생추수(마 10:34-39)

마태복음 10장 34-39절의 말씀은 인생의 추수에 관한 말씀이다. 가을걷이에서 알곡을 수확하듯이, 인생추수에서는 ‘자기 목숨’을 수확한다. 재물도 명예도 권세도 아니다. 참 목숨, 영원한 목숨을 수확한다. 이 목숨은 값비싼 진주나 보물처럼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므로, 그것을 사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가치를 팔아야 한다(마 13장). 여기서 다른 모든 가치는 자기 육신과 일가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권세를 말한다. 이런 것들은 현세의 것이요, 참 것들의 그림자요 모형이다. 현세는 내세의 그림자요 모형이다. 그러므로 그림자와 모형은 참과 실체를 얻기 위해서 버려야 한다. 영원한 목숨을 수확하기 위해서 일시적인 목숨을 희생해야 한다. 김은석 목사는 참 자기 목숨을 수확하기 위해서 일생을 하나님의 농장에서 헌신한 농부였다.

김은석 목사는 세상 즐거움을 완전히 끊어버린 사람이었다. 성서에 남긴 메모를 통해서 추적할 수 있는 그의 행적은 1953년부터 1958년까지 무려 6년이나 된다. 일 년 365일 거의 매일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다. 그의 일상은 기도하고 성경 읽고 전도하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이었고 교회순방을 위해서 기차타고, 버스타고, 배타고 이동하는 것이었다. 낮이고 밤이고 시간만 나면 성경을 읽었다. 교회당에서, 강단 앞에서, 강단 옆에서, 강단 뒤에서, 교회의 골방에서, 목회자의 방에서, 자택의 방에서, 다락방에서, 심방한 성도의 방에서, 식사하던 식당에서, 기차에서, 버스에서, 배에서, 정류장에서, 터미널에서, 누구와 있든지, 누구와 동행하든지 상관없이,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어디로 향하든지 상관없이, 시간만 나면 성경을 읽었다. 매일 그렇게 읽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읽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조반 전에, 조반 후에, 오후에, 늦은 밤에, 새벽에 읽었다.

180센티미터의 훤칠한 키, 가름하고 잘 생긴 얼굴, 수심이 찬듯하면서도 예리한 눈빛, 짧은 머리, 굵은 테 안경, 허름한 옷, 낡은 성경가방, 이것이 50대 중후반의 김은석 목사의 초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소 사진을 찍어 남기는 것을 싫어했다고 하니, 실로 그는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리고, 세상 부귀 다 버리고, 세상 명예 다 버리고, 세상 행복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가치와 성경이 말하는 가치만을 귀하게 여기셨다.

김은석 목사는 사생활이 없었다. 일 년이면 거의 대부분을 남의 교회와 남의 집에 머물렀고, 그것조차도 동역자들과 함께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었다. 그가 어쩌다 자택을 찾는 경우에도 동역자들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다”(마 12:50)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김은석 목사도 함께한 주의 일군들이 그의 형제요 자매였다. 김은석 목사는 자기보다 어린 동역자들까지도 자주 ‘형’(兄)이라 썼고, ‘형제’라 호칭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김재순, 김명석, 이신, 최요한 등이 있었다. 진성구, 김교인 장로들을 호칭할 때는 항상 ‘님’를 붙여 썼다. 동역들이 여성인 경우에도 ‘님’자를 붙여, 박종예 자매님, 이원화 자매님, 전도희 자매님 하는 식으로 깍듯하게 불렀다.

김은석 목사에게 세상일은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그는 양아들 김성철이 자신의 대를 이어서 목사가 되어주기를 바랐으나 평소 세상공부는 필요치 않다며 학교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김성철 목사가 충남상고와 충남대를 졸업한 것은 순전히 개인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김성철의 친부인 김명석(김주일) 전도사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김은석 목사를 일본에 있을 때부터 추종하였으므로 그 역시 처자식들을 돌보지 못하였다. 처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 책망 받을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삼상 2:29 비교)는 말씀이 있다. 김은석 목사는 1955년 2월 25일(금)부터 6월 4일(토)까지 충북 괴산군 소수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일백일 성서연구집회를 열었는데, 이 마태복음 10장을 5월 27일에 강론하였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취해야할 가족에 관한 태도를 설파하는 김은석 목사의 목소리에 평소보다 더 무게가 실렸으리라고 생각된다.

1954년 4월 첫 주말에 전남 교회(최요한 목사)를 다녀온 김은석 목사는 다음날인 4월 6일 화요일 아침에 사무엘상 9:9-12:25까지를 대전시 선화동 2구 315번지 교회에서 읽었는데, 마음에 무슨 변화가 일었는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런 중에 특별한 일리 엇슴은 나는 금일부터는 가족을 아주 떠나는 것을 선언.” 또 같은 날 부강교회로 옮겨서 저녁에 강단 앞에서 사무엘상 13-14장을 읽고는 “사랑받으며 봉독함”이라고 적고 있다. 다음 날인 7일 수요일에도 아침부터 밤까지 사무엘상을 읽었다. 그리고 10일 토요일 주일예배 참석차 대전에 왔고, 주일인 11일에는 교회를 사임하고 유호성 전도사에게 전임시키고 있다. 그리고 다음날 12일 월요일 아침에 평소 습관대로 성경을 읽고 조반 후에 부강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부인 김완례 사모가 병이 났고, 병자를 두고 떠날 수 없게 된 상황이 벌어졌다. 할 수 없이 그는 13일 화요일까지 남아서 병상을 지키다가 14일 수요일 부강으로 떠나고 있다. 그러나 김완례 사모의 병은 그 주간 내내 완쾌되지 못했고, 김은석 목사는 16일 금요일에 돌아와 병든 사모 곁에서 성서를 읽고 있다. 그리고 18일 주일을 지킨 후 19일 월요일에 대전시 은행동 2구 1번지 10통 41반으로 이사하였다. 대전 선화동 교회는 김은석 목사가 구호물품의 잉여물자를 알뜰히 모아 팔아서 마련한 땅에 건물을 짓고 시작한 자기 교회였다. 그러나 사임을 했으니 집을 비어줘야 했을 것이고, 사모는 이 갑작스런 결정에 충격을 받고 쓰러졌을 것이다.

이 사건이 있었던 1954년 4월은 김은석 목사의 심경에 어떤 큰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이 기간에 그는 영적으로 심적으로 상당히 고무되고 업(up)된 상태였으며, 성경을 읽는 시간도 아침에 국한되지 않고, 늦은 밤이나 한 밤중까지 계속되곤 하였다. 그러나 1958년까지의 행적을 볼 때, 그가 가족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것은 부흥집회와 성서연구집회에 전념하겠다는 뜻이었지, 가족을 버리겠다는 뜻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떻든 그의 출가선언은 가족에게 적지 아니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렇듯 김은석 목사는 주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가족은 물론 재산까지도 포기할 수 있었던 희생적인 신앙인이었다.

김은석 목사에게 설날과 추석 혹은 생일과 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은 그의 인생에 전혀 의미가 없었다. 명절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거나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앉아 명절을 맞는 일이 적어도 그의 성서메모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다. 1954년 2월 3일(수)부터 5일(금)까지가 설 명절이었는데도 그는 집엘 가지 않고 교회를 예방하는 요무(要務)로 2일(화) 전남 해남군 성전시장에서 대전행 차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영산포행 차를 기다렸고, 기다리는 중에서도 출애굽기를 읽고 있었다. 1955년은 1월 23일(일)부터 25일(화)까지가 설날이었는데 그는 22-23일(토-일)에 광주 집회소에 있었고, 24일 월요일 설날에서야 대전 선화동에 도착하여 25일까지 이틀 밤을 묵고, 26일(수)에는 다시 경북 금능군(김천시) 개령면 대광동 2구 대보 그리스도의 교회에 갔다가 27일(목)에 수리교회로 올라갔다. 1956년은 2월 11일(토)-13일(월)까지가 설날이었는데, 집에서 가까운 부강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가지 않고 교회에 남아 성경을 읽고 있었다. 1957년에는 1월 30일(목)부터 2월 1일(금)까지가 설날이었다. 그는 이때에도 부강교회당 골방에 머물며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읽었다.

이토록 김은석 목사는 오로지 성경만을 읽고 성경만을 가르쳤다. 그는 성경을 사랑했고, 어디를 가든지 성경만큼은 반드시 지참하고 다녔다. 성경과 함께 먹고, 성경과 함께 자고, 성경과 동행하였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가 받은 은혜를 “1954년 4월 6일 저녁 11시경 근경에 부강교회 강단 앞에서 사무엘상 13-14장까지 사랑받으며 봉독함.”이라고 적고 있다. 그는 일 년 삼백육십오일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시간만 나면 성경을 읽었으며, 전국의 교회들을 순방하며 집회를 열고 또 날짜를 정하여 사람들을 불러놓고 성경을 가르쳤다. 특히 그는 일 년이면 몇 차례씩 일백일 또는 석 달 동안씩 집중적으로 성경연구집회를 열었다. 1954년 6월 1일(화)부터 10(목)일까지 대구 동인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10일간 부흥회 겸 성경공부를 인도하였으며, 1955년 2월 25일(금)부터 6월 4일(토)까지 소수교회에서 일백일 신학공부를 열었고, 이 기간에 소수교회에 머물렀으며, 1957년 1월 1일부터 3월말까지 3개월짜리 성경연구집회를 부강교회에서 열었으며, 김은석 목사는 이 기간 동안에 부강교회에 체류하였다.

김은석 목사는 기도의 용사였다. 그는 성경을 읽을 때 대부분 강단 앞과 강단 옆과 강단 뒤에서 읽었던 만큼 기도를 겸했음을 알 수 있다. 교회당을 찾아가 성경을 읽은 것은 기도를 겸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가끔씩 금식 중에 성서를 읽었다. 1955년 3월 16일 수리교회에서, 19일 부강교회에서 금식 중에 성서를 읽고 있다.

김은석 목사의 삶은 하나님사랑, 인간사랑, 특히 인간의 영혼을 사랑한 삶이었다. 따라서 그의 삶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가르치고, 바르게 실천하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경을 읽었고, 인간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전국 각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으며,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말씀 충만, 기도 충만, 성령 충만을 추구한 삶이었다. 그의 굵고 짧은 삶은 오늘 우리에게 “춘몽 같은 인생, 무엇을 하며,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김은석 목사는 그의 생애 마지막 부분인 15년을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몸 바쳤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해낸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초기 교회에 큰 부흥을 만들어낸 것처럼, 1950년대 김은석 목사와 그를 작은 예수로 생각할 만큼 그를 신뢰하고 따랐던 그의 동료들이 해낸 수고와 헌신은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 80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게 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공로가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김은석 목사와 일부 추종자들은,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는 마태복음 10장 37절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할 만큼 성서주의로 살았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그들의 가족들이 입은 고통이 상당히 컸다.

김은석 목사의 주일날 성서통독은 평일의 성서통독과 그 내용이 달랐다. 그는 주중에 읽던 책을 계속하지 읽지 않고, 다른 책들(욥, 시편, 잠언, 전도, 아가)을 읽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책이 욥기서이다. 김은석 목사는 1954, 56, 57년에 주일마다 욥기를 읽고 있다. 이 욥기서 40장의 여백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1955년 4월 17일 주일 석양 5시후 소수교회 방에서 욥기 38:27-40:11까지 봉독. 금일도 섭섭한 말을 듣게 되는 것은 김명석 형제 부인이 육적생활 불만으로 나를 원망한다 하며 또 김은성이는 활교회(교회활동)를 못가겠다는 뜻을 말함. 그 안해(아내)가 불만 언(言).

이 기록은 출가(出家)를 선언한 김은석 목사와 그의 동료들이 그들의 가족에게 끼친 충격이 얼마나 컸는가를 가늠케 한다. 자녀들은 물론이고 사모들의 원망과 원성이 적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김은석 목사의 양자인 김성철 목사도 그의 자서전에서 비슷한 감정을 토로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1954년 4월 김은석 목사의 폭탄선언이 김완례 사모를 충격에 앓아눕게 만든 점 등은 당시의 정황을 충분히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김은석 목사의 몸을 아끼지 아니한 헌신과 희생으로 얻은 대가는 값으로 매길 수 없으며, 헤라클레스만큼 무거운 운명의 짐을 짊어지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성실하게 수행해냈다. 과연 김은석 목사는 자신과 세상과 끝없이 싸우며 괴로운 가시밭길을 걸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지상의 모든 고뇌를, 지상의 모든 수고를 그에게 짐 지웠으나, 저 장렬한 최후의 날까지 그는 이 수고를 훌륭하게 참아내었다. 비록 그는 한 알의 밀알로써 썩어졌지만, 그로 인해서 많은 생명의 열매들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지속적으로 맺히고 있다. 이런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