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네 단계(막 8: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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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네 단계(막 8:27-38)
빛의 세계에 오르는 네 단계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가 있다는 점을 일깨워 주고 있고, 신약성서는 감춰져 있던 빛의 세계가 예수님의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큰 빛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밝히 드러났다는 점을 밝혀 주고 있다. 우리는 모두 한 때 죄와 무지의 족쇄에 묶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었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었다(마 4:16). 그러나 지금은 무지의 족쇄를 풀어버리고 빛과 진리와 생명의 세계에 오른 성도들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빛을 주시는 하나님의 큰 빛 아래 살고 있다(계 22:5). 빛의 세계는 창세전부터 감춰졌던 비밀의 세계였다(골 1:26, 엡 3:5-6). 그러나 주후 30년 오순절이후 성령님을 통해서(고전 2:10)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믿음에 이르는 순종을 위해서(롬 16:25-26) 밝히 드러났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무지와 우상숭배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는 진리이다(요 8:32). 예수님은 큰 빛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생명이다(요 3:16,14:6; 히 10:20). 그리고 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주 안에서 빛이” 되고, “빛의 자녀들”(엡 5:8)이 된다. 또 우리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과) 진주를” 산 사람들이다(마 13:35,44-46). 마태복음 13장의 이들 천국비유들은 우리에게 극히 값진 천국을 듣고 보고 깨닫고 아는 단계보다 더 높은 단계, 곧 천국을 소유삼고 또 그 천국을 위해서 자기를 부정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청지기가 되는 단계가 있다는 점을 밝혀준다(고전 4:1, 막 10:17-23). 아는 단계와 행하는 단계, 발견하는 단계와 소유하는 단계, 믿는 단계와 누리는 단계가 다 다르다는 점을 밝혀준다.
마가복음 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약 사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고 남은 조각 일곱 바구니를 거둔 직후에 배를 타시고 달마누다 지방으로 옮겨 가셨다. 이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구한다.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은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게 한 앞서 빵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먹게 한 능력과 동일한 표적을 말한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탄식하시면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아니하시고,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여기서 배는 교회를, 호수는 어둠과 무지와 죽음의 세계와 빛과 진리와 생명의 세계를 잇는 오름길을 상징한다. 인생살이에서 가장 큰 걱정거리는 역시 먹고 사는 문제이다. 마가복음 8장은 먹고 사는 빵문제와 신앙인이 걸어야할 가시밭길의 문제를 제기한다. 예수님과 함께 배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다. 마찬가지로 배라는 교회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빛과 진리와 생명의 세계를 발견하고, 그 진가를 아는 믿음의 소유자들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보면, 어둠의 세계와 빛의 세계, 두 세계가 있다.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오르는 과정에 네 개의 단계가 있다. 첫째는 족쇄에 묶여서 어둠에 갇혀 있는 단계, 둘째는 족쇄를 풀고 어둠을 탈출하여 빛에 오르는 단계, 셋째는 빛의 세계에 도달한 단계, 넷째는 빛의 세계의 축복들을 소유삼고 맛보고 즐기는 단계이다. 우리는 모두 이들 네 단계 어딘가를 걷고 있다. 당신은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는가?
인간의 실존에 이르는 네 단계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는 부단히 자신의 삶을 새롭게 결단하는 실존적 존재라고 말하면서 인간실존의 네 단계를 언급한 바 있다.
첫째는 심미적 실존단계이다. 족쇄에 묶여 지하 동굴에 갇힌 삶을 즐기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자기’나 ‘자아’가 없다. 삶에 대한 진지함이 없고, 굳어진 습성과 우유부단함 속에서 살아간다. 멋지고 화려한 환상과 꿈속에서 인생의 맛을 음미하지만, 그것이 불빛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형극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른다. 결국 권태와 허무, 불안과 절망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둠 속 그늘에서 그림자를 쫓는 단계이다. 이 단계를 벗어나려면 윤리적 단계로 한 계단 올라서야 한다.
둘째는 윤리적 실존단계이다. 족쇄를 풀고 어둠을 탈출하여 빛에로 오르는 단계이다. 족쇄에서 풀린 죄수가 빛을 향해서 오름의 길을 걷듯이, 진지한 삶, 이상적인 삶, 올바른 삶을 위해서 노력한다. 불굴의 투지로 어둠과 사망의 땅에서 벗어나 빛의 세계로 오르지만, 빛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절망의 늪 속에 빠지게 된다.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단계로 한 계단 더 올라서야 한다.
셋째는 종교적 실존단계이다. 족쇄에서 풀린 죄수가 동굴 입구 빛의 세계에 도달한 것과 같다. 여기서 큰 빛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강한 빛에 적나라하게 들어난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희미한 동굴에서 그림자만 좇았던 무지에 놀라며 회한의 눈물을 보인다. 또 오랜 기간 어둠 속에 매어있었기 때문에 강하게 비취는 빛 앞에서 두려움에 떨게 된다. 이 두려움을 벗기 위해서 기독교적 실존단계에로 한 계단 더 올라서야 한다.
넷째는 기독교적 실존단계이다. 빛의 세계의 축복들을 자기 것으로 삼아 즐기는 단계이다. 큰 빛을 바로 보지 않고, 예수님을 빛과 자신 사이에 두고, 예수님을 통과한 빛들, 곧 일곱 색의 아름다운 무지갯빛을 보기도 하고, 봄여름가을겨울의 각기 다른 일광을 즐기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 도달한 자는 비로소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가슴에 받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기댄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모든 절망을 극복한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있다. 이것이 발견한 것과 소유한 것의 차이요, 믿는 것과 누리는 것의 차이다.
빛을 소유하고 누리는 자들의 특징은 삶을 군중과 구경꾼으로 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군중도 있었고, 구경꾼도 있었으며, 예수님을 만나 문제해결을 받고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도 있었다. 군중과 구경꾼들은 예수님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했지만,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단지 군중과 구경꾼들에 불과했기 때문에 삶에 있어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였다. 예수님과 일대일의 대면을 갖지 못했다. 근본적인 치유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참된 실존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한다고 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믿는 것을 자기 삶에 적용시키는 자라고 하였다. 또 절망적인 노력으로 매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자라고 하였다. 이것이 인간실존의 마지막 단계이다.
참 제자가 되는 네 단계
빛과 생명에 도달한 자라하더라도, 구경꾼에 그치고 말면 그의 인생은 겉껍데기만 맛본 것이 되고, 근본에 이르지 못한 것이 된다. 진리를 깨달았다하더라도, 군중에 그치고 말면, 자기 인생에 ‘자기’가 없는 것이 된다.
철학자 베이컨은 편견에 대한 네 가지 우상숭배를 말하였다. 첫째는 동굴우상이다. 족쇄에 묶인 채 지하 동굴에 갇혀 빛의 세계를 보지 못한데서 생긴 편견을 절대시한다는 뜻이다. 둘째는 무대우상이다. 동굴 벽면에 펼쳐진 그림자들의 허구에 미혹되듯이 잘못된 논증과 학설에 미혹된 편견을 절대시한다는 뜻이다. 셋째는 종족우상이다. 자신과 코드가 맞는 편견을 절대시한다는 뜻이다. 족쇄에서 풀린 죄수가 빛을 향해서 걷다가 의심과 두려움에 빠진 것은 선입견 때문이었다. 넷째는 시장우상이다. 빛의 세계를 눈으로 보았지만 동굴 속 죄수들의 다수여론과 편견에 끌려가는 것을 말한다. 이런 편견과 오해들은 사람을 빛과 진리와 생명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우상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실존의 문제이다. 내 실존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모든 가식과 허울을 벗고 냉정하게 하나님 앞에 홀로 설수 있어야 한다.
마가복음 8장에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그들이 꿈꾸는 세계를 얻고자 하지만,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 첫째는 예수님의 무리에 끼지 아니한 채 비판하는 구경꾼들이다. 희대의 구경꾼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다. 그러나 그들이 구한 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이 말한 표적은 민중이 원하는 빵인데, 그들은 이미 권세와 명예와 부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로마당국을 자극할만한 행위들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서 파송된 기관원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악하고 음란하다고 하셨다.
둘째는 목자 잃은 양들처럼 갈 길을 잃은 군중이다. 그들은 목을 빼고 예수님만을 바라봤고,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을 본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주저하고 유보했던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불리한 입장에 놓였을 때 예수님 편에 서지 않았던 자들이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으라고 외쳤다.
셋째는 제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한 배를 탔고,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좇아 교회라는 배에 올랐지만, 아직 자신을 헌신하지 못한 자들이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고백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이 당하실 수난을 예고하셨을 때 강력하게 말렸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권세와 명예와 부를 얻고자 했는지 모른다. 그들은 길가에서 서열을 놓고 다퉜고, 요한과 야고보는 직접 예수님께 고위직을 부탁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이 걷고 계신 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빵문제와 사람의 일만을 걱정하였다.
넷째는 참 제자의 길을 걷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자들이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자들이다. 이것이 빛과 진리와 생명의 세계에 이르는 참 제자의 길이다. 우리가 서있는 단계는 어딘지, 우리가 머뭇거리고 있는 위치가 어딘지 살펴보고 가야할 방향을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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