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임재: 상징들과 확신(마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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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 상징들과 확신(마 1:23)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들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대강절,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 재림, 주의 만찬, 침례, 안수 등 교회에서 행하는 거의 모든 행사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성서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내용이다.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에게 임재 하셨고, 말씀하셨으며, 개입하셨는가를 적고 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임재를 논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성경은 눈에 보이는 것들, 현상적인 것들, 감각적인 것들에 대해서 우상숭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믿기 쉬운 것보다 믿기 어려운 참 것, 옳은 것에 눈을 뜨고 밝히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보이는 것들은 그림자요, 허상일 뿐,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상징은 상징일 뿐이다. 상징이 곧 임재는 아니다.
성막과 그 안에 놓인 모든 기물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다. 성막은 하늘보좌방의 모형으로써 하나님의 임재와 교제와 치유의 상징이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다. 언약궤와 그것의 뚜껑, 빵과 그것을 놓는 상, 분향과 단, 등대와 등불, 안수와 기름부음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다. 성막에서의 제사와 예배행위는 하나님의 임재를 전제로 하나님 앞에서 이뤄졌다. 기독교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전제로 그분의 존전에서 엄숙히 이뤄지는 것이 예배이다. 참여자의 많고 적음이나 예식의 장엄함과 소박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곳에 임하여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가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설명하는 용어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에스겔 48장 35절의 ‘여호와 삼마’이다.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는 뜻이다. 둘째는 마태복음 1장 23절의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셋째는 마태복음 24장 3절,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절의 ‘파루시아’이다. ‘임재’ 또는 ‘도착’이란 뜻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임하신 ‘여호와 삼마,’ ‘임마누엘,’ ‘파루시아’의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과거에 끝나버린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교회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들 가운데서 지속되고 있는 현재적 사건이고, 예수님의 두 번째 임재를 통해서 완성될 미래적 사건이다.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신 빛과 생명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 곧 여호와 삼마는 2천 년 전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과 성령님의 임재로 과거에 이미 교회 안에서 시작되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으며, 미래에 완성될 제2의 파루시아 곧 주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날에 하나님은 성도들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어 주며, 성도들은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여호와 삼마, 곧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탄절은 단지 과거에 오신 예수님을 축하하기 위한 축일이 아니다. 과거의 사람을 기념하는 것은 죽음을 추도하고 기념하는 것이지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탄절에 예수님을 추도하거나 기념하지 않는다. 정반대로 성령님을 통해서 지금도 우리 안에 오시는 예수님을 축하하고 영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의 확신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행하는 거의 모든 행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신앙인의 삶에 활력이 있고 없고는 하나님의 임재체험의 강도에 달렸다.
사람들에는 두 부류가 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논하는 것 자체가 허무맹랑한 짓이고 미신이라고 말하는 부류가 있고, 숱한 역경과 시련 속에서조차, 하나님이 죽고 아니 계신 것 같은 절망적인 현실에서조차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확신하고 체험을 말하는 부류가 있다. 과연 어느 쪽이 옳은가? 아니 옳고 그른 것은 차지하고라도 과연 어느 부류가 더 유리한가? 긍정과 부정의 유익성에서 평가하자면, 긍정이 부정보다는 훨씬 더 유익하다. 하나님의 임재체험을 간증하는 사람은 삶이 훨씬 더 긍정적이고, 믿음에 차있고, 자신에 차 있고, 시련극복의 힘이 크다. 환란과 시련이 닥쳐와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기쁨과 감사를 잃지 않는다. 닥쳐온 환란을 극복한 후에는 삶에 활력이 더욱 넘치게 된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에 과연 임재하고 계신가? 임재하고 있어도 의식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공기나 불가시광선과 같다. 확률로 보면,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가 하나님이 임재가 ‘없다’보다 배나 유리하다. 만일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임재 사실을 믿었던 사람이 믿지 않았던 사람보다 손해를 본 것처럼 느낄지 모르나 실상은 유익이 더 많았다고 느껴야 옳다. 그가 지녔던 긍정의 태도가 그의 삶에 대단한 플러스 요인으로, 삶을 윤택한 방향으로, 행복지수를 높이는 쪽으로 작용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손실을 능가하는 유익을 보게 된다. 하물며 하나님의 임재가 실재하고 그 임재를 깊숙이 체험한다면, 그 축복이 얼마나 크겠는가? 돈으로는 살수 없는 엄청난 기쁨과 행복이 보너스로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재물과 명예와 권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사는 것이다. 특히 이 대강절에 우리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임재체험이다. 일상에서 하던 일들을 조금씩 줄이고, 매일의 기도와 성경읽기와 개인묵상에 좀 더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시도해 보지 않고, 자신의 영성개발에 투자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재를 불평하는 것은 섣부른 행위이다.
진화론자나 무신론자일수록 인간을 동물의 하나로 본다. 인간을 육체만 가지고 말하면 동물이나 다름없다. 인간의 본성은 그것이 이성이든, 영성이든, 만물의 법칙이 그렇듯이 버려두면 망가진다. 그 이유는 육체의 본능이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육체의 본능이란 성욕, 식욕, 물욕, 명예욕, 권세욕 등이다. 이것들은 육체를 지탱하는 힘이기 때문에, 육체를 근본적으로 악하게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지만, 버려두면 정신과 이성과 영혼도 망가진다. 자신을 망가뜨려 동물이 되게 하고 마귀가 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버려두면 된다. 자신의 정신과 이성과 영혼을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고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늘리는 것은 마치 산에서 떠온 돌덩이를 쪼고 다듬어서 아름다운 석상을 조각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 신화에서 믿음이 깊어 신의 사랑을 받은 피그말리온은 그의 석상을 사람이 되게 하지만, 오만방자하여 신의 노여움을 산 니오베는 자신이 석상이 되고 만다.
춘향전과 제2의 파루시아
판소리 춘향전에서 성춘향이 한양으로 떠난 이몽룡이 다시 올 날을 학수고대하던 중에 수청을 요구하는 변 사또의 온갖 회유와 고문에도 불구하고 굳게 정절을 지키다가 칼을 쓰고 감옥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몽룡이 극적으로 나타나 “암행어사 출두요!”를 외치고, 악행을 저지른 변 사또 일행을 처벌한 후에 죽음에 이르기까지 정절을 지킨 성춘향과 백년가약을 맺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에서 보듯이, 요한계시록 19장 7절의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는 말씀은 어린양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끝까지 정절을 지킨 신실한 신자들을 구출하여 백년가약을 맺기 위해서 지상세계로 출두할 그리스도의 두 번째 임재가 멀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8절의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는 말씀은 성도들이 지킨 신앙의 정절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성서는 그리스도께서 지체지 않고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란 점을 강한 어조로 말씀하고 있다. 판소리 춘향전에서 꼭 다시 오겠다고 굳게 약속하고 이몽룡이 떠난 그 긴 세월, 춘향이는 영영 돌아올 것 같지 않았던 이도령과의 약속과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변사도와 그 휘하로부터 온갖 시련과 고난을 겪는다. 감옥에 갇혀 목에 칼을 쓰고 처형될 날만 기다리던 춘향이에게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나타나고, 춘향이를 죽음에서 건져낼 뿐 아니라, 춘향이를 아내로 맞이하는 결혼잔치를 벌리는 장면은 계시록의 내용을 조선시대상황에 맞게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몽룡처럼 우리 주님께서도 반드시 주의 신부들인 우리 신앙인들을 천국에 맞이하기 위해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가슴을 쥐어뜯지 말아야한다. 비록 지금은 지고 있고, 밀리고 있고, 얻어맞고 있고, 발버둥치고 있지만, 마음의 눈을 뜨고 장차 전개될 역전의 상황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만일에 춘향이가, 오늘날 상당수의 사람들이 좇는 방식대로, 돈을 좇고, 권력을 좇고, 명예를 좇고, 일신의 안일을 좇고, 허영을 좇고, 거짓과 술수와 무법이 판치는 진흙탕 속에 제 몸을 던졌다면, 그리고 소식이 끊겠다는 핑계로 이몽룡을 배신했다면, 춘향이가 신부의 화관을 쓸 수 있었겠는가? 퇴기의 딸 춘향이가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어 나타난 이 멋진 청년의 부인이 될 수 있었겠는가?
우리에게도 이몽룡과 같은 신랑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더디 온다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던 처녀들처럼 되지 말고, 더디 올 것을 예측하고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던 지혜로운 처녀들처럼 되자. 이몽룡이 사랑하는 춘향이와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으로 출세하여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에 놓인 춘향이 곁으로 돌아와 그녀를 죽음의 위기에서 살려내는 것처럼, 우리의 사랑하는 신랑 예수님은 영으로서 언제나 우리 곁으로 찾아오시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시기 위해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신실한 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의 임재를 믿고 춘향이 같은 신실한 주의 신부들이 되는 것이다. 2천 년 전 베들레헴 땅에 강림하셨던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에 임재하고 계시고, 최후심판의 날에는 재림주로 강림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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