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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춘4-울음이 주는 효과(창 4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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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3,397 2010.03.04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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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춘4-울음이 주는 효과(창 45:1-15)

한국인의 울음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에 “눈물 흘리기”란 글이 있다. 여기에 보면, 유교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조선시대를 살았던 선비들이 감정을 억누르고 살았던 사례를 말해주고 있다. 군자는 어떤 경우에도 일곱 가지 감정을 표출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슬퍼도 울지 못하고, 기뻐도 웃지 못하고, 화가 나도 성을 내지 못하고, 사랑스러워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미워도 밉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감정의 억누름을 군자의 미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인 인도 선교사 클로드샤를 달레(Claude-Charles Dallet, 1829-78년)라는 분이 1874년 조선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의 비망록, 보고서, 편지 등을 근거로 <조선 교회사>(2권)를 출간한 바가 있다. 그의 책 서설(序說)에, 한 선비가 자기 뒷바라지하느라 굶기를 밥 먹듯 하고, 겨울에 여름옷 걸치고 살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앉아 눈물을 조금 흘렸는데, 오로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선비가 벼슬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그렇다고 조선시대의 사람들이 전혀 울지 않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실컷 울 수 있는 공간들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초상을 치르거나 제사를 지낼 때는 크게 우는 것이 오히려 미덕이었다. 초상이 나면 상청(喪廳)을 차리고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아침저녁으로 영좌에 드리는 음식을 올리고 곡을 했다. 그런데 죽은 이의 친척이 아닌 마을의 부인들이 와서 구슬피 울곤 했다고 한다. 죽은 자와의 옛정을 못 잊어 찾아와 우는 것이 아니었다. 울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나 와서 울 수 있었고, 이들의 곡소리가 가족의 울음소리보다 더 구슬프고 길었으며 소리도 컸다는 것이다. 이렇게 초상집은 억눌려온 자기 설움을 울음으로써 마음껏 씻어낼 수 있는 공개적인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평소에는 어떻게 울었는가? 대체로 밭일 하러 간다거나 나물 캐러 간다는 구실로 뒷산 고개 너머 오목한 분지에 가서 억눌러온 울음을 터뜨려 앞치마 하나를 흠뻑 적시도록 실컷 울고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고려 말에 이색(李穡)이 이성계의 쿠데타에 울분을 못 가누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마저 무고로 죽음을 당하자, 서생 한 명을 데리고 울음고개를 넘어가 실컷 땅과 가슴을 번갈아 치고 울더니, “이제야 가슴이 좀 후련해졌다”면서 하산했다고 한다. 조광조가 처형당한 후에 그를 흠모한 신진 선비들도 산 넘어가 실컷 통곡하고 울분을 풀었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대인과의 관계에서는 감정들을 숨겨야 했지만, 공개된 장소에서만큼은 마음껏 울며 감정들을 토해냄으로써 마음의 독을 씻어내곤 하였다.

유교가 지배한 시대에는 그렇게 몰래몰래 울었지만, 이 땅에 개신교가 들어온 이후, 구한말과 일제시대, 6.25동란, 빈곤이 삶을 짓눌렀던 80년대까지 사람들은 교회와 기도원과 산상에서 하나님께 수많은 눈물보따리를 풀어냈다. 대한민국에 오늘이 있는 것은 그 때 쏟아냈던 기도의 눈물이 있어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나무를 붙잡고 힘껏 흔들며, 풀뿌리가 뽑힐 정도로 잡고 흔들며, 혼신의 힘으로 쏟아냈던 통곡과 회개의 눈물과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있었기에 질곡의 고난을 풀어헤칠 수 있었다.

울음의 효과

감정을 숨기기로 유명한 일본 사람들도 울음이 건강이나 정서에 좋다는 사실을 알고는 ‘울자’는 뜻인 ‘Nakoyo’운동을 펼쳤던 것으로 안다. 이 운동을 인터넷상에서 펼치고 있는 가마타 야스시는 연대보증을 섰던 친구가 파산하는 바람에 큰 빚을 떠안고는 분노로 치를 떨면서도 감정을 절제해 왔는데, 2003년 영화를 보다가 암에 걸려 죽어가는 주인공이 비디오에 유언을 녹음하는 장면을 보면서 소리 내어 울었는데, 실컷 울고 났더니, 삶이 달라졌고,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시사주간지 <아에라>(AERA)도 2005년 10월 17일자로 “행복해지려거든 울어라”는 기사를 실었다. <아에라>지(誌)는 30-40대 남녀 400명에게 설문조사를 했더니, 눈물이 직장과 일, 부부관계, 건강에 크게 도움을 준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일본의대의 요시노 신이치 명예교수는 “운다는 것은 웃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분석했다. 중증 류머티즘 환자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 뒤 면역기능의 변화를 관찰해 봤는데,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 수치와 류머티즘을 악화시키는 ‘인타로이킨-6’의 수치가 떨어지고 암을 공격하는 NK(내추럴 키라)세포가 활성화됐다는 것이다. 또 동방(東邦)대학의 아리타 히데오 교수는 “눈물을 참을수록 스트레스가 쌓여간다. 가능한 한 오래 격렬하게 우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울고 싶을 때 맘껏 울면 정서와 건강 모두에 좋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 난징(南京)의 한 호텔에 실컷 울 수 있는 통곡주점이 개업됐는데, 방에 들어서면 “사나이 우는 것은 죄가 아니다.”는 홍콩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잘 울 수 있도록 고추에 짓이긴 마늘 즙도 갖춰져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울다보면 파괴 본능이 작동할 때를 대비해서 집어던져서 깨뜨릴 수 있는 이 빠진 접시를 준비해 두었다고 했다. 한 시간 울고 내는 값이 우리 돈 1-2천원 정도였는데, 고객의 80퍼센트가 배운 여성이었다고 한다.

1997년 8월에 자동차 전복사고로 죽은 영국 왕세자비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영국은 눈물바다를 이뤘다. 이후 한 달 동안은 정신과 의사를 찾는 우울증 환자가 절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이것을 ‘다이애나 효과’라 불렀다.

많은 의학 전문가들은 눈물을 하나님이 주신 치유의 물이라고 말한다. 슬플 때 울지 않으면 우리 몸의 다른 신체가 대신 울게 된다고 한다. 신체에 안 좋은 질환이 생긴다는 뜻이다. 눈물에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카테콜라민이 많이 들어 있는데, 이 호르몬은 혈관을 수축시켜 심혈관에 많은 부담을 주는 물질이다. 카테콜라민이 반복적으로 분비되면 만성위염 등의 소화기 질환은 물론이고,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이고 관상동맥 협착 등을 일으켜 심근경색이나 동맥경화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이 못된 호르몬을 인체 밖으로 흘려보내는 것이 눈물이다. 그러나 매워서 흘리는 눈물에는 없고, 감정이 격해져서 흘리는 눈물에만 이 나쁜 호르몬이 들어있다고 한다.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 있는 램지재단 알츠하이머 치료연구센터 책임자인 빌 프레이 박사는 말하기를, “남자가 여자보다 평균수명이 짧은 이유의 하나는 남자가 덜 울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상의 울음은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치며 통회하거나 애통하는 울음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했기 때문이다.

요셉의 울음

김현승 시인은 “아버지의 마음”(1970)에서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고 썼다. 우리 사회에 울고 싶은 사람이 어디 아버지뿐이겠는가?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감정에 쌓인 앙금들을 씻어내지 못하면, 발산되어야할 독소들이 근육에 남게 되어 몸이 뻣뻣해지고, 목이 막히며, 식은땀이 나고, 호흡곤란이나 화병이 생긴다. 반대로 감정의 앙금들이 깨끗하게 씻겨나가면, 이런 증상과 화병이 사라질 뿐 아니라, 안면근육이 풀리고 체중이 줄면서 더 젊어진다.

우는 방법을 알아봤더니, 50,60,70년대에 발악하면서 울며불며 했던 기도들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물론 조용히 우는 것도 방법일 수는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울고, 무차별적으로 울며, 무시로 울고, 밝은 곳에서 울며, 독방에서 우는 것이 좋다고 한다. 50,60,70년대 때처럼 하나님께 하소연 하면서 울면 최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울고 나면, 마음속, 정확히는 기억에 담긴 응어리와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다. 기도하면서 울면 하나님의 위로와 평화가 뒤따르는 큰 이점이 있다.

요셉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야곱의 11번째 아들로서 배다른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린 사람이다. 인간의 감정으로 말하자면, 어찌 형들에 대한 원망과 미움의 감정이 없었겠는가? 그런데도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고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은 크게 울었기 때문이었다. 목 놓아 울며 통곡하는 사이에 형들에 대한 미운 감정들이 깨끗이 씻겼기 때문이다.

요셉의 경우는 형들로부터 집단 괴롭힘을 당한 사례이다. 이런 경우 엄청난 스트레스와 감정의 손상을 입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심한 상처를 입었다할지라도 감정을 격하게 쏟아 내거나 펑펑 울 수 있는 기회를 갖고 나면 감정의 앙금이 씻기게 되고, 가해자를 용서할 마음이 생기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가해자를 용서한 후에 찾아오는 카타르시스, 즉 감정의 씻김과 해방을 맛본다고 말한다. 용서가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주기 때문이다. 나쁜 기억을 씻음으로써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요셉이 형들과 재회한 것은 20여 년 만이었다. 형들은 요셉을 이집트의 노예로 팔아버린 후 아버지를 속였다. 형들이 양식을 구하려고 요셉에게 왔을 때, 요셉은 그들을 한눈에 알아봤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 요셉은 그들을 문초했다. “너흰 첩자가 아니냐? 그렇지 않다면 집에 있다는 막내 동생을 데려와 입증해 보이라”고 다그쳤다. 친동생인 베냐민이 왔을 때, 요셉은 남몰래 울었다. 요셉은 형들에게 식량을 주면서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슬쩍 넣어두게 함으로써 베냐민을 도둑으로 몰아서 자기 곁에 잡아두려고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요셉은 형들을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그러자 형들이 필사적으로 베냐민을 보호하려고 했다. 자신들이 종이 될 터이니 동생을 풀어 달라 간청하였다. 이때 요셉은 격한 감정에 휩싸이면서 방성대곡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난 요셉은 비로소 자신이 누군가를 밝혔고, 형제들을 끌어안고 울었다. 그렇게 그들은 울음을 통해서 앙금처럼 쌓인 미움을 씻어낼 수 있었고 형제간에 화해를 이룰 수 있었다. 우리들도 이처럼 통회함으로써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가 있고,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이웃 간에도 화목할 수 있다. 그리고 화목해지면 만사형통의 복을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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