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개념에 대한 성찰(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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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개념에 대한 성찰(마 5:1-12)
번영신학의 복 개념
지난주(2010년 4월 15일)에 출판된 <<바벨론에 갇힌 복음>>에 실린 존 파이퍼 목사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번영신학을 증오한다! 부와 건강의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이라 불리지만 실상은 쓰레기다.”
이 책, <<바벨론에 갇힌 복음>>의 저자 행크 해네그래프는 이단과 사이비 종교에 관해서 연구하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소재한 ‘기독교 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믿는 대로 된다!”는 믿음신학이 부와 건강을 담보로 복음을 파는 사이비 기독교라고 지적하였다. 물질만능주의에 편승한 복음이 한편에서는 교회에 외형적 성공과 번영에 일정부분 기여하였지만, 다른 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 제자의 길을 교회에서 사라지게 하였고, 물신숭배에 빠지도록 하였으며, 성경과 현실을 바르게 분석하고 연결하는 심도 있는 신학을 교회에서 몰아낸 대신에 세속적 성공과 번영에 관한 구호와 선동이 넘쳐나게 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더글라스 무, 휘튼 칼리지 교수는 말하기를 “부와 건강의 복음은 신자들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고, 또 누려야 하는 육체적 축복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순수복음주의 기독교와 다르며, 번영신학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고,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거부하며, 십자가로 나아가지만, 정작 십자가를 짊어지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지난주 중앙일보 기사(2010년 4월 14일자)에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크리스천’(2007년) 설문조사에서 8위에 올랐던 세계적인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 드루대 석좌교수가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을 소개하고 있었다. 레너드 스윗 교수는 “오늘날 교회가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 병을 “예수님 결핍 장애. 예수님의 교회에 예수님이 없는 것”이며, 오늘날 교회들은 예수님 대신 성공 그 자체를 숭배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것’(Believe)은 ‘삶이 되는 것’(Be+live)이라고 말하면서 생명이 없는 기독교인은 마치 립싱크에 의존하는 가수와 같다고 하였다. 또 레너드 스윗 교수는 생명이 없는 기독교, 예수님이 빠진 기독교를 자살과 같다고도 하였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이 빠지면 스스로 죽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런 자살 비즈니스에 참여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스윗 교수는 내가 만든 예수님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예수님을 찾으라고 권하였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살도록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처럼,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이 만들지 아니한 비본래적 나를 비워내고, 하나님이 만든 본래적 나로 채워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비본질적인 나를 비워내고 본질적인 나를 찾아 채우는 것이 ‘믿는 것’(Believe) 곧 ‘삶이 되는 것’(Be+live)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살게 되면, 진선미(眞善美)가 하나로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데, 이때의 아름다움은 화려하고 호사스런 것이 아니라. 비참하고 참혹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아름다움 안에 진리도 있고, 선함도 있기 때문에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되면, 우리는 가장 참담한 풍경에서조차 진선미(眞善美)를 동시에 보게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 안에 예수님의 결핍은 진선미가 없는 큰 장애가 아닐 수 없다.
유대교의 복 개념
기독교는 본래, 현실보다는 이상, 이 땅보다는 저 천국에 목표를 뒀다. 헬레니즘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보이는 세상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상의 그림자요, 모형에 불과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 땅에 삶의 목표를 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목표를 뒀다. 한편 유대인들은 600여 년간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채 강대국들에 차례로 지배를 받아오다가 주후 70년부터 1948년까지 1,878년간 나라 없이 남의 나라에 얹혀 살아야했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는 철저하게 현실 중심, 팔레스타인 중심, 예루살렘과 시온과 지상의 성전 중심이다. 그들의 희망(‘하티크바’) 즉 ‘올람하바’(장차올 세상)로 일컬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하게 이 땅에서 이뤄지는 지상의 나라이다. 이것이 기독교와 유대교가 가장 다른 점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희망인 이 땅에서 이뤄질 ‘올람하바’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고, 여전히 기다려야할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자들은 유대교인이 아니라고까지 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님의 지상재림과 천국왕국이 유대인들의 이 희망을 이루기 위한 것이 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과 이들을 지지하면서 시대구분론을 주장하는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님 재림이후의 천년왕국은 유대인들의 희망이 실천되는 유대인의 ‘올람하바’가 될 것이라고 한다.
유대교인들은 지상의 모든 것을 정한 것(kosher)과 부정한 것(treyf)으로 나눈다. 교제해도 좋은 정한 민족인 유대민족과 교제해서는 안 되는 부정한 이방민족, 먹을 수 있는 정한 동식물과 먹어서는 안 되는 부정한 동식물, 사용해도 좋은 정한 물건과 사용해서는 안 되는 부정한 물건으로 나누고, 선민인 유대인일지라도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천한 사람들을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다. 이들 부정한 것들을 멀리하는 것이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거룩함이었다.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천한 사람들을 부정하게 간주하는 이 이중적인 태도가 성공신학, 번영신학, 물신신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고, 예수 결핍 장애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고, 꺼려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힘차게 주장한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며, 레너드 스윗 교수의 지적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진선미의 결정체이다. 그처럼 아름답고, 그처럼 진실하며, 그처럼 선한 것은 없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것들을 사랑하셨고, 온몸으로 껴안았으며, 친구가 되어주셨고,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질병들을 고쳐주셨으며, 희생당하셨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부정하다 여기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거룩함이라고 생각하셨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은 것은 몸에서 가장 더러운 것을 씻는 행위였다. 이 추악함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이 땅에서 명예와 권세와 재물을 얻는 것이 성공이고 축복이라면, 그렇지 못한 경우를 죄 때문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무교와 유교의 복 개념
기독교에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있다. 보수주의가 신본이라면, 진보주의는 인본이다. 보수주의가 개인구원과 기복에 치중한다면, 진보주의는 인간다움과 인간성회복에 치중한다. 보수주의가 천상의 하나님의 나라에 목표를 둔다면, 진보주의는 지상의 하나님의 나라에 목표를 둔다. 보수주의가 개인행복에 힘을 쏟는다면, 진보주의는 사회정의와 세계평화와 창조질서보존에 힘을 쏟는다. 문제는 어느 한쪽에만 치우는데 있다. 그것이 바로 이단이다.
보수주의는 무교의 기복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무교는 정령숭배에 기반을 두지만, 기복과 혼합주의적 성격을 띤다. 무교의 가장 큰 특징은 교리가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복에 효과가 있는 것이면 내용을 가리지 않고 혼합하려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편승한 것이 기독교의 번영신학이다. 번영신학의 배후에는 공리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공리주의의 특징은 실용주의의 실용성을 원리로 하는 성공주의, 결과주의, 무신론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은 성경의 복 개념을 왜곡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점을 개선하려는 시도가 사회복음과 사회구원을 주장하는 진보신학이다. 사회복음을 주창하는 진보신학은 사회참여 정치참여를 지향하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보면 성리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성리학은 현실세계 중심이다. 200여 년 전 유학자들이 천주교를 배척한 이유들 가운데에는 현세를 포기하는 천주교가 비현실적이라 믿었던 점도 있다.
성리학의 본래 목적은 도덕적 실천을 통해서 성인(聖人)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었는데 조선의 유학자들은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고 그 이치를 사람의 행위에 적용할 뿐 아니라, 국가통치이념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왕에게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명예와 의리와 예의를 지키는 수신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리학은 조선 중기 이후에 지역과 학파의 권력독점을 추구하는 당쟁을 일삼았고, 민중을 길들이기 위한 지배계급의 종교로 타락하였다. 또 유교는 일곱 가지 감정 억제를 미덕이라 하여 ‘~하는 체’하는 형식과 외식에 치우치는 체면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뿐 아니라, 유교는 입신출세하여 가문을 빛내고, 장수, 부귀, 사후명성을 역사에 빛내도록 하기 위해서 돈벌이에 가일층 몰두하게 되었다. 가난은 유교의 도덕적 완성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에,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비리와 매관매직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유교는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약자들을 하층계급으로 묶어두고 부와 명예와 권세를 독점하려한 자들의 종교에 지나지 않았다. 또 유교는 현세에서 물질적인 행복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무교나 기독교의 번영신학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명예와 권세와 재물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을 누린다고 해서 결코 잘못된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 있는 자이고,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말씀하셨다. 일반인이 말하는 행복(happiness)은 ‘우연히 일어나다’(happen)에서 유래된 말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축복(blessing)은 ‘피를 흘리다’(bleed)라는 원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복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지불된 나눔과 희생의 대가로 인해서 오는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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