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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stigmata)(고후 2:12-17, 갈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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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3,731 2010.06.0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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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stigmata)(고후 2:12-17, 갈 6:17)

자랑스러운 흔적

폭우와 폭설이 할퀴고 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 사람과 짐승이 머물다간 자리에도 흔적이 남는다. 특히 사람은 일생을 마친 후에는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긴다. 문제는 그 흔적이 무엇이냐에 있다. 머문 자리를 깨끗이 치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더러운 쓰레기를 남기는 사람이 있듯이, 사람은 살면서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긴다. 과연 우리는 어떤 흔적들을 남겨왔고 또 남기고 떠날지를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12-17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로 그리스도인의 흔적에 대해서 말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우리를 개선행진에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God who always leads us in triumphal procession in Christ)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도처에 풍기게 하신다고 하였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구원받은 사람에게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에게는 우리가 사망의 냄새가 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우리가 생명의 향기가 된다고도 하였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흔적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 주고 있다. 우리가 남기는 흔적이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의 냄새가 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모습과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야할지를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생명을 죽이는 독한 냄새가 될 것인지, 아니면 생명을 살리는 향기가 될 것인지를 진지하게 숙고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아름다운 흔적들이 있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축구선수 박지성의 발, 피겨선수 김연아의 발, 역도선수 장미란의 손, 그레코로만 레슬링선수들의 귀에서 역경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의 몸에 생긴 이들 흔적들은 모두 다 훈련의 분량과 강도와 또 그들이 얼마나 많은 전적을 쌓았는가를 보여주는 영광의 흔적들이다. 그들의 몸에 생긴 흔적들은 그들 각자의 성공 때문에 생긴 흔적들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국민의 위상을 세계에 드높이고, 국민에게 자존감을 심어줬다는 점에서 칭송을 받을만한 하다. 그들의 몸에 새겨진 고난의 흔적들이 자랑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사람의 딸아이가 어릴 때 심장수술을 받았다. 그 딸아이는 가슴에 남은 흉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어느 날 엄마는 우울해하는 아이를 꼭 안아주며 이렇게 달랬다. “그 흉터는 바로 네가 큰 병을 이겨냈다는 징표란다. 어린나이에 그토록 큰 수술을 잘 견디는 것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그래서 난 네 흉터가 오히려 자랑스럽단다.”

자메이카 사람들은 동양 사람을 모두 ‘미스터 친’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주 오래 전 자메이카에 뿌리를 내려 성공한 중국인들 가운데 ‘미스터 친’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는 자메이카에서 얻은 막대한 수입을 학교와 병원, 고아원 등에 기부하였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헌신하였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자메이카 사람들은 아직도 동양인을 볼 때마다 그 옛날 자신들에게 도움을 줬던 ‘미스터 친’의 흔적을 그들의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광스런 흔적, 자랑스러운 흔적, 아름다운 흔적들은 우리가 과연 어떤 흔적들을 남겨놓고 갈지를 묻고 있다.

예수의 흔적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하였다. 그러면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의 흔적은 신약성서 특히 사복음서에 자세하게 남아있다. 예수님은 3년 6개월의 짧은 공생애 기간에 천국 복음에 관한 말씀들을 남기셨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으며,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셨다. 또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쓴 흔적, 양손과 발에 못 박힌 흔적, 옆구리에 창 찔린 흔적, 등에 채찍에 맞은 흔적들을 남기셨다. 이런 흔적들은 모두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사람들을 대신해 얻은 고통의 흔적들이었다. 또 예수님은 누가복음의 설명처럼 성령 충만하시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면서 걸어가신 사명의 길, 곧 고난의 길, 가시밭길, 십자가의 길에 새긴 발자취를 남기셨다. 또 요한복음의 기록처럼 어둠을 빛 되게, 혼돈을 질서 되게, 죽음을 생명 되게 하신 살림의 흔적들을 남기셨다. 또 예수님은, 빌립보서의 말씀처럼,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사람이 되셨다. 이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셀 수 없이 많은 성도들, 이 땅의 살아있는 성도들, 이런 것들이 모두 예수님이 남긴 흔적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예수님의 이런 발자취, 곧 예수님의 삶의 흔적들을 닮고자한 인물이었다고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기존의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기독교라는 새로운 흔적을 역사에 남겨 발전하게 하였다.

주후 30년 베드로가 세운 예루살렘교회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수장으로 한 유대교적 기독교였다. 유대교적 기독교란 유대교의 율법과 전통을 그대로 지키면서 예수님을 오실 자로 예언된 메시아로 믿는 유대주의 기독교를 말한다. 이 기독교는 신약성서의 기독교라고 말하기 어렵고 유대교에 속한 나사렛파 정도였다. 그러나 신약성서 기독교로써는 퍽 다행하게도 이 예루살렘 교회가 40년 만에 문을 닫게 됨으로써 더 이상의 권위를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유대전쟁으로 인해서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당하였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사건이 있고난 다음부터 바나바와 바울이 세웠던 안디옥교회는 물론이고 로마제국 전역에 세워진 수많은 선교교회들이 더 이상 유대교적 율법주의의 간섭을 받지 않고 또 그들의 폐쇄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복음주의 신약성서 기독교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울이 역사에 남긴 흔적들이다.

이방문화가 혼합되고, 신약성서에서 멀어진 가톨릭교회를 바로 잡기 위해서 16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개신교는 5백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수님과 바울이 남긴 흔적들을 온전히 좇지 못하고 유대교적 율법주의자들이 바울과 그의 선교교회들을 괴롭혔던 유대교적 기독교에서 탈피하여 신약성서 기독교에로 온전한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신약성서에 남겨진 예수님과 바울의 흔적들을 오늘의 기독교가 좇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기독교의 문제점이다.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런 사실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신약성서라는 근본(Ad Fontes)에로 돌아가 신약성서 기독교를 회복하자(Restoration to the New Testament Order of Things)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바울의 흔적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하였다. 여기서 “내 몸에 예수의 흔적,” 곧 바울의 흔적은 무엇인가?

갈라디아교회에 침투하여 문제를 일으킨 자들은 유대교의 율법과 전통을 그대로 지키면서 예수님을 오실 자로 예언된 메시아로 믿는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할례의 흔적’을 자랑하는 자들이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할례의 흔적은 유일신 하나님이 그들만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랑의 표였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이 할례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따라서 참 신자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육체에 새긴 ‘할례의 표’가 아니라, ‘심비(心碑)의 표,’ 곧 ‘예수의 흔적’임을 강조하였다.

학자들은 바울이 말한 ‘내 몸의 예수의 흔적’을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첫 번째는 그 흔적이 육적으로 바울의 몸에 새겨진 것이라는 해석이고, 두 번째는 그 흔적이 영적으로 성화의 정도에 따라서 점차 명확해지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말한다는 해석이다.

‘내 몸의 예수의 흔적’이 육적으로 바울의 몸에 새겨진 흔적이라는 해석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빈번한 박해와 고문으로 인해서 몸에 남은 흉터들을 말하고, 둘째는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을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몸에 갖게 되었다는 주장에서처럼 바울의 몸에도 그런 신비한 ‘성흔’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셋째는 이교도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헌신을 맹세할 때 몸에 만드는 흔적들처럼 바울도 그런 제의적인 흔적을 만들었다는 해석이다. 바울은 서신들의 서두에서 항상 ‘그리스도의 노예’란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당시 노예들은 몸에 주인이 새긴 화인(火印)이 있었다.

‘내 몸의 예수의 흔적’이 영적으로 성화의 정도에 따라서 점차 명확해지는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해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바울이 즐겨 쓴 ‘그리스도의 노예’란 표현이 신학자 케제만이 말한 “바울의 운명적 사랑,” 곧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고전 9:16)는 ‘자기인식’ 또는 어떤 경우에도 주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노예처럼 온몸으로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자기 정체성’의 표현이란 해석이다. 둘째는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후 4:16)는 말씀에서처럼 바울의 심비(心碑)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형상’을 말한다는 해석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예수님을 닮은 형상을 말한다.

바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100퍼센트 예수님의 형상 닮기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주님께 100퍼센트 순종한다는 ‘자기인식’과 ‘자기 정체성’에도 있다.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 이런 ‘예수의 흔적’이 있는가에 있다. 바울에게는 심비(心碑)에 새긴 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의 육체에는 그가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살았던 고난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었다. 예수님을 주(主)로 섬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어떤 흔적들이 있기는 한지 자문해 보고, 또 우리 각자는 그런 흔적들을 찾아보고, 또 없으면 만들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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