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경륜(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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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경륜(마 20:1-16)
하나님의 공평성
자연법칙이나 인과법칙에는 몇 가지 교훈이 있다. 자연의 도전을 극복하라는 것과 서로 돕고 사랑하라는 교훈이 있다. 잘 생각해보면 자연법칙이나 인과법칙은 매우 공평한 법칙이다. 문제는 자연환경의 도전인데, 인간은 실제로 자연환경의 도전을 잘 극복해왔다.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 같은 자연의 법칙도 입법 사법 행정을 통해서 조율하고 조종해왔다. 또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란 점도 배워서 알고 있다.
옛날에 짚신장사 아들과 우산장사 아들을 둔 어머니가 있었다. 그런데 이 어머니는 비가 오나 해가 뜨나 근심과 걱정을 안고 살아야 했다. 날씨가 좋으면 우산장사하는 아들걱정 때문이요, 비가 오면 짚신장사 하는 아들 걱정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양봉업자는 비가 올까 걱정이요, 농부는 가뭄이 들까 걱정이다. 목사는 주말에 비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이 되기도 한다. 품을 팔아 입에 풀칠하는 일용직들은 비가 오면 일을 못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힘들고, 집배원 아저씨나 택배 아저씨들은 비를 맞으며 힘든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이 더 고달플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주중에만 비가 오게 하고 주일날에는 맑은 날씨를 주십사하고 드리는 목사의 기도가 과연 좋은 기도일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랑하는 자녀들의 기도를 공평하게 들어줘야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짚신 장사와 우산 장사를 하는 두 아들을 둔 어머니의 걱정처럼 하나님도 사랑하는 자녀들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면 좋을지를 걱정하시지는 않겠는가? 이런 점에서 보면 자연법칙이나 인과법칙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창안하신 적절하고 공평한 대안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같은 맥락에서 인간의 자기중심적 기복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는지도 생각해 본다. 모두에게 주어진 평등한 기회 앞에서 정정당당하게 그 기회를 내 것으로 삼는 노력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광을 돌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심는 대로 거두는 원리보다 더 좋은 복이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심는 대로 거두지 못하는 것만큼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것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인간에게 주어진 의무는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자연법칙 앞에서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발휘하여 환경을 극복하는 것이며,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며 협력하는 것이다.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고, 해볼 수 있는데도 해보지 않고, 주저 않아버리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떠나서 하나님의 공평성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은 기독교의 구원론이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차별이 없다는 점. 남녀빈부귀천의 구별이 없다는 점. 잠시 나그네로 사는 이 땅에서의 삶이 불공평하다고 생각될수록 가까운 미래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질 영원한 세상은 모든 불공평, 모든 불공정, 모든 악, 모든 불의가 사라진 평등한 세상이 될 것이다. 병든 자도 없고, 가난한 자도 없고, 노동도 없고, 슬픔도 없고, 괴로움도 없고, 저주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이다. 이곳에서의 평등이 가장 귀한 공평성이다. 이생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좋은 말로 설명을 한다 해도 불공정하고 불합리함을 다 감출 수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의 공평성
예수님께서 천국비유로 말씀하신 포도원의 일꾼과 품삯에 관한 마태복음 20장 1-16절의 비유는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아들을 둔 아버지의 심정을 가진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날품을 팔아 그날그날 근근이 먹고 사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다. 일거리가 많지 않을 때일수록 아버지는 늘 아들이 걱정이다. 결혼한 아들에게 처자식이 있어서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 아들과 함께 일력시장에 나가면 다행히 아들과 함께 뽑혀 같은 일터에서 일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들이 먼저 뽑혀 일터에 불려나갈 때도 있고, 때로는 아버지가 먼저 뽑혀 일터에 불러나갈 때도 있다. 아들이 먼저 뽑혀서 일터로 향할 때면 아버지는 긴 안도의 숨을 쉰다. 그러나 아버지가 먼저 뽑혀 일터에 나갈 때면 하루 종일 아들 걱정에 마음을 편히 가질 수가 없다. 오늘은 일터에 불려나갔을까, 꼭 불려나가야 할 텐데. 아직도 뽑혀 나기지 못한 것은 아닐까? 만일 일거리를 얻지 못했다면, 오늘의 끼니는 또 어떻게 해결할건가? 이런 아버지의 심정을 가진 인물이 오늘 비유의 품꾼을 찾는 포도원의 주인이고, 그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시다. 이 아버지의 심정이 하나님의 나라의 공평성이다.
3절의 ‘장터’는 일력시장이다. 일거리를 찾거나 구경나온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인력시장은 날품을 사려는 사람과 날품을 팔려는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움직이는 곳이다. 여기에 나오는 삼시는 아침 9시, 육시는 정오, 구시는 오후 3시, 11시는 오후 5시를 말한다. 유대인들은 해가 지는 시간이 하루가 바뀌는 시간이기 때문에 오후 5시라면 하루가 끝나기 대략 한 시간 전이다. 하루가 다 마칠 무렵인데도 일감을 기다리는 품꾼들의 절박한 현실을 읽어낸 포도원의 주인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시다. 또 마지막 남은 한 시간까지도 - 한 시간 일해서 과연 얼마나 받겠는가? - 그러나 그 미미한 것조차도 포기하지 아니한 품꾼의 희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은 놀고먹기를 원하는 한량들이거나 게으른 사람들이 아니라, 기회를 기다리는 희망을 품은 일꾼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해가질 무렵까지도 그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희망을 품고 있는 한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600년 골프역사의 성지(聖地)라 불리는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지난 2010년 7월 18일 개최된 150주년 기념 브리티시오픈에서 때마침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의 생일날이었던 이 날에 남아공 출신의 백인 루이 우스트히즌과 그와 7년간 호흡을 맞춰온 남아공 출신의 흑인 캐디 잭 라세고가 우승컵과 15억8000만원의 상금을 거머쥠으로써 인종차별이 심한 남아공 출신의 두 젊은이가 합작하여 ‘흑백 화합의 힘’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다. 우스트히즌은 농부의 아들로 형편이 어려워 어니 엘스 재단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로부터 레슨비와 대회 출전경비를 지원받았던 28세의 젊은이로써 지금까지 메이저 대회에 8차례 출전했지만 7번이나 컷 탈락을 했고, 큰 대회의 경험이 부족했던 사람이었다. 더욱이 캐디 라세고는 이번의 우승이 없었다면 직업을 잃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우승은 값진 인간승리였다. 희망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실 뿐 아니라, 꿈을 꾸는 자에게 그 꿈을 이루게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하루살이 날품팔이들이 넘쳐나는 불평등한 사회이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날품팔이들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다. 그러나 경기에 따라 일거리가 줄어들면 하루 사분의 일 데나리온까지 품삯이 내려가기도 했다고 한다. 바벨론 탈무드에 의하면, 대학자 힐렐이 랍비수업을 받는 학생 때 하루 절반 데나리온을 받고 일했던 날품팔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영안을 뜨면 하루 가운데 마지막 남은 한 시간만을 일한 품꾼들에게조차도 하루 품삯 전부를 쳐서 주는 한없이 은혜로운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의로우시고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의 품삯은 무한경쟁을 통해서 능력과 공로에 따라 매겨지는 세속적인 인센티브 방식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매겨진다.
둘째, 하나님은 오후 5시까지도 할 일 없이 장터를 서성이는 날품팔이의 절망을 읽어내고 그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므로 그들의 절망을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늦게까지 일감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기술이 없거나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6절에 보면, 주인이 오후 5시에 장터에 나가 서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묻는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여기서 우리는 일거리가 없는 날품팔이들의 비애를 읽고 계신 포도원 주인의 심정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주인의 물음은 게으르고 무능한 부랑아들을 나무라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하루살이 날품팔이와 그의 가족들의 절망을 이해하고 위로함으로써 그들의 삶의 자리에 연대하고 참여하려는 집주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포도는 고대근동사회에서 부활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고 주인은 하나님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시간밖에 일할 수 없는 상황에서조차 하루 품을 사는 나라이다. 또 필요에 넘치도록 날품을 사고 모두에게 절실한 하루품삯을 지불하는 나라이다. 세상적으로 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나 이 어리석음이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이다.
품꾼들이 약속받은 품삯은 한 데나리온이었고, 아무도 약속한 품삯을 더 받거나 덜 받지 않았다. 그들이 받은 품삯은 하루살이에 필요한 만큼의 생활비였다. 포도원의 주인은 그들이 일한 시간에 관계없이 그들과 그들의 가족의 생계에 꼭 필요한 하루살이 품삯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불평이 없어야 할 텐데 그들 가운데 많은 시간을 일한 사람들이 불평을 털어놓았다. 그들이 화를 낸 내용은 “단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이 온전한 하루 품삯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불공평한 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였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이 불공평함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의로운 것이고 가장 공평한 처사였다. 여기서 주인은 노동자와 그에게 딸린 식구들에게 꼭 필요한 생계비를 생각한 것이다. 일의 양으로 평가하지 않고, 필요의 양으로 평가하시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엿볼 수 있는 비유이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믿고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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