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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자의 마음(전 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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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359 2010.01.28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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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자의 마음(전 7:1-4)

병 속의 벌레

2008년 10월 1일 서울 프라자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주최된 국제환경포럼에서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다음과 같은 영문으로 된 에피소드를 소개한바가 있다. 퀴즈문제라 생각하고 아래의 물음에 정답을 맞춰보기를 바란다.

문제: 저녁 8시인데, 병 속에 한 마리의 벌레가 있다. 그 벌레는 일분마다 배로 증가한다. 그래서 저녁 8시 1분에 2마리가 되고, 2분에 4마리가 되며, 3분에 8마리가 된다. 그런 식으로 4시간 후인 밤 12시가 되면 병은 벌레로 가득 차게 된다. 병이 절반까지 찬 것은 몇 시 몇 분이었을까?

정답: 밤 11시 59분.

병의 나머지 절반이 차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레들은 병의 절반이 차는데 걸린 시간이 3시간 59분이었다는 것 때문에 병의 절반이 아직 빈 공간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서 한껏 여유를 부린다. 병속에서는 벌레들의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 “보세요, 우리의 과학기술은 급속히 발전하고 있어요. 기술은 결국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다 해결해주고 말 것입니다....” “잠깐만요. 우리의 공간이 곧 차버리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만한 충분한 자료가 없어요....” “미래를 예측하는 게 너무 불확실합니다....” “행동을 취하기에는 너무 빠릅니다.” 그러나 몇몇 똑똑한 벌레들은 그들의 생존시간이 불과 2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결국 알아낸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가용 가능한 에너지와 자원들을 동원하여 전혀 새로운 병을 찾는데 투입하게 되고.... 드디어 밤 11시 59분, 그들이 전멸하기 1분전에 기적적으로 하나도 아닌 세 개나 더 새로운 병들을 찾는데 성공한다. 그래서 벌레들은 이전보다 세 배나 되는 더 넓은 공간을 확보하게 된 엄청난 이 업적을 축하하려고 축배를 높이 든다.

질문: 그러면 그들이 확보한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공간은 세 배나 더 넓게 확보됐는데, 확보된 공간에서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정답: 2분.

이 에피소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 인간이 직면한 긴박성과 심각성 그리고 위기의식의 부족이다. 우리 모두는 직면한 위험수위를 모른 채 현대과학이 이룬 업적에 취해서 축배를 들고 있다. 과연 우리는 안전한가? 미래가 그렇게 낙관적인가? 미래를 보장받고 있는가? 미래를 보장할만한 확실한 보험이 있긴 있는 것인가?

지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심각하고 강도 높고 잦은 천재지변으로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전쟁과 지진, 기후변화로 인한 태풍, 홍수, 폭설, 기근, 사막화, 해수면 상승, 기온상승 등으로 인한 재해가 언제 어느 때 우리에게 덮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각종 질병과 상해와 화마가 언제 어느 때 우리에게 덮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어느 곳에 있는가? 혼인집에 있는가, 초상집에 있는가?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다”는 전도서 7장 4절의 말씀이 생각난다. 지금은 우리의 마음이 초상집에 있어야 할 때이다. 위기의식 속에서 다가올 미래를 대비할 때이다.

천재지변

지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도 높고 잦은 천재지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전쟁과 지진, 기후변화로 인한 태풍, 홍수, 폭설, 기근, 사막화, 해수면 상승, 기온상승 등으로 인한 재해가 언제 어느 때 우리에게 덮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아이티 정부는 2010년 1월 12일에 발생한 진도 7.0 규모의 지진으로 사망자가 무려 35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였다. 이를 계기로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2010년 1월 15일자 인터넷 판에서 미 지질조사국(USGS) 통계분석 결과를 근거로 과거 100년간 발생한 최악의 지진들을 공개하였다.

역대 최악의 지진은 1556년 중국 명나라 때 산시(陝西)에서 발생한 것으로써 83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이티 지진 이전까지 지난 100년간 있었던 10대 지진들 가운데 최악은 25만5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중국 탕산 지진으로써 1976년 7월에 발생하였다. 우리에게 쓰나미로 잘 알려진 2004년 12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지진은 22만7천898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20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지진이 중국 하이위안에서 1920년 12월에 있었고, 3년 후인 1923년 9월에는 일본 관동지방에서 14만2천800여명이 죽는 지진이 있었다. 이 지진의 분풀이로 제일조선인 6600여명이 학살당하였다. 이밖에도 1948년 10월 투르크메니스탄에서11만여 명, 2008년 5월 중국 쓰촨성에서 8만7천587명, 2005년 10월 북부 파키스탄에서 8만6천명, 1908년 12월 이탈리아 메시나에서 7만2천명, 1970년 5월 페루 침보테 에서 7만여 명, 1990년 6월 서부 이란에서 4-5만 명이 지진으로 각각 목숨을 잃었다.

지진은 100킬로미터 정도 두께의 암석층이 움직이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지구 속은 양파처럼 여러 겹의 지층들로 이뤄져 있다. 이 지층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게 되면, 표면의 지각, 중간의 맨틀, 중심의 핵으로 되어 있다. 맨틀은 지각과 핵 사이에 존재하며 깊이가 30-2900킬로미터에 이른다. 지각층은 100km 두께의 암석층으로써 10여개의 판으로 나눠져 있고, 맨틀 위에 떠 있으면서 매년 수 센티미터씩 이동한다. 이 때문에 판끼리 부딪치게 되고 밀어내거나 포개지게 되는데, 이로 인한 충격이 지진이다. 거대한 공처럼 뱅글뱅글 돌면서 태양을 중심에 두고 도는 지구, 그 속 맨틀 위를 떠다니는 엄청난 두께의 암석층들이 뱀처럼 꿈틀대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수수께끼요 신비이다.

지진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엄청난 흔들림에도 끄떡없는 집을 지어야 한다. 아이티 참사를 계기로 우리나라는 앞으로 짓는 모든 집에 내진(耐震)설계를 의무화시킨다고 한다. 1995년 일본 고베 지진 때 붕괴된 건물이 4만9천여 동인데, 그 가운데 94퍼센트인 4만6천여 동이 3층 이하의 건물이었다고 한다. 저층 건물이 지진에 더 약하다는 결론이다.

우리나라도 지진의 횟수가 점차 늘어있어서 1996년까지 연평균 18회였던 것이 1997년부터 2008년까지 연평균 42회, 2009년에는 역대 최대인 총 60회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지진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우리가 대비해야할 것이 지진뿐일까요? 우리의 삶에 커다란 충격을 주는 인생지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이런 것들은 계시록의 경고처럼 진짜 죽음에 대한 예표와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충고처럼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준비해야 한다.

고통의 의미

천재지변의 가장 큰 특징은 무차별적이란 점이다. 선악을 구분하지도,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을 구분하지도 않는다. 이런 점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나 개입여부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천재지변을 통해서 그들의 신념을 더욱 확고히 한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도 “천재지변은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세상이 결코 권선징악의 법칙에 의해 다스려지는 게 아님을 가르쳐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무차별적인 것이 어디 천재지변뿐이겠는가? 하나님의 사랑도 무차별적이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조차도 끝까지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십자가사랑과 구원의 은총이 특별히 선택된 자에게만 제한된다는 칼뱅설도 있지만, 그조차도 무차별적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무차별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선택된 자들도 타고난 악인이라고 보는 것이 칼뱅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악인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빛과 공기, 눈과 비, 계절변화, 심지어는 생로병사까지도 무차별적이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자연법칙 혹은 인과법칙이라고 부른다. 자연법칙과 인과법칙만 인정하는 사람들은 신의 존재나 초자연적인 기적을 부정하려든다.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무차별적 자연법칙과 인과법칙을 일컬어 자연계시 혹은 일반계시라고 부른다. 자연법칙 속에서도 얼마든지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역설이지만, 천재지변 속에서조차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무슨 궤변이냐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원치 않았거나 예기치 못한 불행에서조차 하나님의 사랑을 강하게 느껴왔다. 톨스토이 같은 사람들은 불행과 고통의 존재는 이웃사랑의 실천을 강하게 요청하는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믿었고, 테레사와 같은 사람들은 불행을 겪는 사람들 속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하곤 하였다. 지금도 수많은 제2, 제3의 톨스토이와 테레사 같은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존재하며, 사람들은 그들의 선행에 박수갈채를 보내거나 감동의 눈시울을 적신다. 이런 현상을 일컬어서 동물행동학자인 최재천 교수는 숫한 불행과 죽음에서조차 “끝내 의미를 찾으며 서로 부둥켜 일어서는 우리 인간은 참으로 긍정적인 동물이다.”고 평가하였다. 이렇게 고통은 이웃사랑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보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요나처럼 혹은 바울처럼 듣게 하신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느낌은 하나님이 그 일에 쓰시려고 부르시는 음성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인간의 욕심과 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고통은 인간으로 하여금 잘못을 돌아보게 하고, 회개할 기회를 준다. 이것에 가장 민감했던 것이 유대민족이었다. 고통은 인간의 기술문명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환경파괴, 도시빈민, 기후변화, 심지어 지진, 폭발, 화재까지도 여기에 속한다. 특히 자연재해는 문명피해와 환경파괴 등의 문제점들을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고통은 인간문명에 대한 반성만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높은 수준의 기술과학발전에 도전하게도 만든다. 고통은 인간을 겸허하게 만든다. 실존과 죽음과 종말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을 갖게 한다. 또 고통은 하나님의 존재와 불멸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하고 불러야 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보다 복 받은 사람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결코 복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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