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인간의 미래(계 2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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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인간의 미래(계 21:9-27)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 만물도 언젠가는 죽는다. 우주도 언젠가는 죽는다. 만들어진 것은 다 죽는다. 시작이 있었던 것은 반드시 끝이 있다. 무한이란 것, 영원이란 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신에게만 있는 것이다. 물질은 무에서 온 것이고, 무에서 물질을 가능케 한 것은 신(神)이다.
죽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그래서 과학자들도 언젠가는 이 우주가 끝장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때의 처참한 상황을 소설가들은 글로 쓰고 제작자들은 영화로 만든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들을 재밌게 읽고 감상하면서 교훈을 얻는다. 이런 점에서 바벨탑 이야기는 교훈적인 사건이다.
바벨탑은 인간의 문명과 과학기술의 상징이다. 그 탑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인간의 문명과 과학기술이 결코 인간을 구원시킬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원래 바벨탑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각 성읍에 세워졌던 지구라트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지구라트란 높은 곳을 뜻한다. 피라미드 형태로써 탑 정상에 제단이 놓여 있었다. 현존하는 지구라트들 가운데서 큰 것은 밑변이 62.5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높이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지만, 원래 높이의 절반 정도가 붕괴됐는데도 남은 부분이 24미터(8층 높이)에 이르는 지구라트가 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이집트 쿠푸왕의 피라미드의 경우, 높이가 무려 146.5 미터(50층 높이), 밑변이 230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여기에 쓰인 돌만 230-250만개이고, 그 돌들의 평균 무게가 2.5톤에 이른다고 한다. 축조에 걸린 시간은 20여년이고, 동원된 인원은 10만여 명이며, 풍상을 견뎌온 세월이 무려 4천5백여 년에 이른다. 이들 거대한 탑들이 주는 교훈은 인간이 아무리 높은 탑을 쌓는다할지라도 그 마지막은 붕괴라는 것이다. 이 땅에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종교는 과학이나 자연법칙 이상의 것을 설명한다. 과학이 눈에 보이는 물질 혹은 현상세계에 대해서 원인과 결과를 따져 묻고 문제해결의 방법을 모색한다면,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 혹은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세계까지를 설명한다. 따라서 인간에게 영원한 미래를 꿈꾸게 하는 것은 종교이다. 종교가 아니고서는 인간이 영원한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 죽음 너머의 세계를 말하고 설명하는 것은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 죽음 너머의 영원한 세계를 이해시키는 도구가 모형론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 혹은 현상세계는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 또는 영적인 세계의 예표요 그림자이며 모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있다는 것은 곧 눈에 보이지 않는 참 세계 혹은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증거란 것이다. 유한한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무한한 우주가 있기 때문이고, 유한한 인간세계가 있는 것은 무한한 인간세계가 있기 때문이며, 제한된 지성과 인격을 갖춘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무한한 지성과 인격을 갖춘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이다. 이 땅의 생로병사는 고통과 슬픔과 괴롬이 없는 영원한 빛과 생명의 나라가 있다는 증거이다. 영원에 대한 인식이 인간의 사고 속에 있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엄동설한에 봄을 기다리는 것은 봄이 있기 때문이고, 사랑을 찾는 것은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행복을 바라는 것은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심성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한국문화를 지배해왔고, 타종교에 영향을 끼친 무교신앙에는 미래가 없다. 무교는 주술과 기복신앙으로써 교리가 없고 윤리가 없다. 무당의 노래가 있지만, 그조차도 타종교와 통속문학에서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에 불변의 무가(巫歌)가 없다.
유교는 유학사상으로써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가 아니다. 인(仁)으로써 모든 도덕을 일관하고,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이룩하려는 윤리적 통치이념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유학에는 종말론과 궁극적인 인간의 미래가 없다.
불교는 열반과 지옥을 가르친다. 열반은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끄고, 생사(生死)의 윤회와 미혹의 세계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를 말한다. 지옥은 크게 팔열지옥과 팔한지옥으로 나뉜다. 팔열지옥은 뜨거운 불길로 형벌을 받는 여덟 곳의 지옥을 말하며, 팔한지옥은 혹독한 추위로 형벌을 받는 여덟 곳의 지옥을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지옥은 영원한 형벌장소가 아니며, 업(業)에 따라 들어갔다가 때가 차면 나와 다시 윤회를 거듭해야하는 임시로 거쳐 가는 형벌의 장소이다.
불교는 수행종교이다. 본래 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었고, 열반과 지옥을 문자적으로 믿는 종교도 아니었다.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 자기 자신을 열반과 지옥으로 만든다는 것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부처가 신처럼, 열반과 지옥이 영원한 복과 저주의 세계처럼 믿어지고 있다.
수행불교가 기독교처럼 바뀐 것이 미륵불교이다. 미륵불교는 기독교처럼 구세주와 낙원과 재림과 천년왕국을 가르친다. 미륵은 기독교의 예수님과 같고, 도솔천은 기독교의 낙원과 같으며, 정토(淨土), 불국(佛國), 용화세계(龍華世界) 등은 기독교의 천국왕국과 같다. 미륵신앙은 기독교의 재림신앙과 동일하다. 따라서 유대교와 기독교에 거짓 메시아가 많았던 것처럼, 미륵불교에도 거짓 미륵이 많았다. 미륵경에서 말하는 용화세계는 천년동안 불법(不法)이 없고, 인생팔고 백팔번뇌의 고통이나 슬픔이 없으며, 부족한 것이나 욕심이 없는 세계를 말한다. 그러나 미륵불교의 이런 가르침은 불교의 열반과 윤회사상에 크게 모순된다.
동학에서는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것(人乃天)과 인간중심의 문화개벽(後天開闢), 사람과 한울이 하나임을 깨닫고 참된 하나의 진리로 돌아가 모든 사람이 하나로 귀일 하자(同歸一體)고 가르친다.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은 이름을 구세주란 뜻의 ‘제우’로 고치고,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체험하셨던 것과 동일한 시험과 신유의 능력들을 발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최제우는 죽은 혼(死魂)을 버리고 살아 있는 혼(生魂)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성령(性靈)과 도덕(道德)을 믿었다. 최제우는 검가(劒歌)를 짓고 검무(劒舞)를 추곤 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체포되어 참형을 받았다. 태평성세에 일개 백성으로서 검가와 검술을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은 도당을 모아 반역을 도모한 죄란 것이었다.
미륵불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에 대한 전기적 설명 또한 기독교를 모방하였다고 보아진다. 이렇듯 무교, 유교, 불교, 천도교 등은 창조주를 신앙하지 아니한 채, 현실세계의 문제들에 해답을 제시하려는 것이며, 창조주 하나님이 설계하고 예비한 궁극적인 인간의 미래를 갖지 않는다.
종교가 아니더라도 인간들은 종종 영원한 세계를 꿈꿨다. 그리스인들은 낙원인 샹젤리제와 무한지옥인 타르타로스가 모두 다 음부인 지하세계에 있다고 믿었다.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서 혼령으로 가야하고, 비통과 시름과 타오르는 불과 망각의 강들을 건너야 한다.
중국 사람들은 복사꽃이 활짝 핀 무릉도원의 봄을 가장 이상적인 유토피아로 보았다. 물과 곡물이 풍부하고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이곳을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차단된 세계이다.
유럽 사람들은 황금시대를 지배한 농경의 신(神)인 사투르누스의 영원한 봄의 정원 아르카디아를 유토피아로 보았다. 아르카디아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이고, 곡괭이질을 하지 않아도 풍부한 과일과 곡물을 선사해주는 곳이다. 우유와 감로주가 강물처럼 흐르고, 녹색 호랑가시나무에서 황금빛 꿀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곳이다. 그러나 샹젤리제에는 부활이 없고, 무릉도원과 아르카디아는 현실세계의 이상촌일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미래를 보다 확실하게 보장하고 제시한다.
첫째, 기독교는 부활을 보장한다. 기독교이외에 그 어떤 종교도 부활과 부활의 축복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샹젤리제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는 곳이고, 무릉도원과 아르카디아는 죽기 이전의 목가적인 삶을 말한다.
둘째, 기독교는 내세를 보장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는 낙원뿐만 아니라, 부활 후에 영화롭게 된 몸을 가지고 영원토록 복락을 누리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장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계 22:1), 생명나무의 열매가 열리는 곳이다(계 22:2). 새 하늘과 새 땅은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으며,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않는 곳이다(계 7:16).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사는 곳이다(계 22:3). 새 하늘과 새 땅은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사 65:18).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는 곳이다(계 21:4).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친히 빛을 비추는 곳이다. 밤이 없고, 해와 전기가 필요 없는 곳이다(계 22:5). 새 하늘과 새 땅은 정의롭고 평화로운 곳이다. 해함이 없고 상함이 없고(계 22:3; 사 65:25), 질병이 없고, 죽음이 없는 곳이다(계 21:4).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놀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는 곳이다(사 65:25).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전의 실수나 잘못이 마음에 생각나지 않는 곳이다(사 65:17; 계 21:4). 새 하늘과 새 땅은 모든 성도들이 세세 무궁토록 왕 노릇 하는 곳이다(계 22:5). 남에게 지배를 받거나 고용 당하지 않는 곳이다. 끝까지 믿음을 지킨 구속받은 성도들은 지극히 아름답고, 튼튼하고,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고, 보석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새 예루살렘성에서 보호받으며 안식하게 된다.
그러나 이곳에 들어갈 특권을 얻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피로 자기 의복을 빨아야 한다(계 21:9-22:15).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시련을 극복해야 한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한 사람들은 모두 다 이 놀라운 축복에 참예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을지라도 성도들에게는 보장된 미래가 있기에 실패자가 아니라, 승리자이다.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미래가 무상으로 주어지고 있다. 이 축복을 마음껏 이 땅에서도 맛보고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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