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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관계(고전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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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370 2010.01.08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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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관계(고전 1:18-25)

인간의 특별한 재능

3차원의 보이는 물질세계에 머문 인간이 4차원 이상의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를 생각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성서는 이 특권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과 천사들과 같은 영적인 존재들에게만 주어져 있다.

고대 헬라인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의 그림자나 모형으로 생각했다.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가 유한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만물의 법칙은 죽는 것이다. 생명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반드시 죽거나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눈에 보이는 유한한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의 그림자나 모형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사람이 영원한 것, 무한한 것을 찾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요 결과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고통스러움, 무상함, 허무함, 공허함, 고독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생명체는 이 지상에서 인간밖에 없다.

사람은 다른 동식물과 다르고 물질과도 다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사람을 정신적인 혹은 영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사람이 다른 동식물과 다른 것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과학과 문화예술과 종교로 승화시킬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세계 이상의 것들, 즉 영원하고 무한한 세계의 것들까지 생각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아니란 것은 과학이 이미 밝혀놓고 있다. 과학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것들을 밝혀 놓았다. 미생물에서부터 자외선, 적외선, 전파, 뇌파, 심지어 기(氣)의 흐름에 이르기까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란 것을 밝혀놓고 있다.

가장 과학적인 진리는 항존(恒存)법칙이다. ‘과학적’이란 수십, 수백, 수천 번의 반복된 실험에도 동일한 결과가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 일정한 법칙, 예측 가능한 항존법칙이 없다면 과학적 사실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적 사실이란 뭔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항존법칙 즉 불변의 법칙들이 만들어내는 ‘상식’이다. 이 상식에서 과학기계기술문명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다만 발견할 뿐이고 그것을 응용할 뿐이다.

법칙이 항존하지 않고 진화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법칙은 더 이상 법칙이 아니다. 불변의 법칙이 없다면 과학도 상식도 없다. 우주의 법칙, 만물의 물리법칙이 진화를 한다면, 아무 것도 과학적일 수가 없다. 반복된 실험에 동일한 결과가 나오지 않게 될 가능성이 진화로 인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결과는 이제까지 단 한 건도 없었다.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진화’란 형태의 변화, 보이는 것들의 변화일 뿐이지 물리의 법칙은 아니다.

인간의 존재가 특별한 것은 그가 만물의 영장이어서가 아니라, 그를 만드신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심미적 삶, 도덕적으로 바른 윤리적인 삶, 심지어 종교적인 삶조차도 올바른 실존방식으로 보지 않았고, 기독교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 그분의 존재를 체험하는 것,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가장 높은 차원의 실존단계로 보았다.

하나님과 유대인들과의 관계

역사학자 토인비가 지적한 것처럼, 고대사회에서 가장 높은 영적차원에 도달한 민족이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의 하나님 인식은 남다르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을 유일신 창조주로 보았다. 그분은 지극히 선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만든 만물은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보았다. 선하지 못한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의 특별한 재능 때문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해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완전할 수 없고 오류와 실수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문제들의 발생은 하나님 탓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 탓이라고 보았다. 책임적인 존재지만 동시에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들의 손에 하나님이 쥐어준 것은 선한 도구인데, 불완전한 인간들이 그것을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고, 흉기로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물질세계와 인간의 삶에는 분명한 어떤 존재목적과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존재목적을 찾고자하였고, 그것을 천직으로 알고 수행하였다. 또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만든 우주에는 어떤 일정한 법칙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과 노력 때문에 그들은 지난 백년간 전체 노벨상의 30퍼센트를 차지할 수 있었다.

셋째,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누군지, 사명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할지를 아는 정체의식, 소명의식, 윤리의식이 분명하였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정체의식은 우리의 조상들이 떠돌이였다는 것, 노예였다는 것이었다. 이런 자기 조상들에게 유일신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언약선민으로 삼아주셨으며, 안식할 땅을 주셨다고 믿었다. 전체 구약성경이야기의 핵심은 이 떠돌이정체성, 노예정체성, 선민정체성이다. 이 세 가지 정체성에서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매우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였다.

신구약성경 전체이야기는 세 가지 사건으로 압축된다. 구약성경에 두 가지가 있고, 신약성경에 한 가지가 있다. 이 세 가지 사건들은 다섯 개의 단어로 압축된다. ‘떠돌이,’ ‘노예,’ ‘해방,’ ‘언약,’ ‘선민’이 그것들이다. 이것들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매우 특별한 관계라는 점을 설명하는 것들이다.

구약성경의 두 가지 사건들은 출애굽사건과 바벨론 유배사건이고, 신약성경의 한 가지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다. 출애굽사건은 떠돌이와 노예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의 언약선민이 되는 이 땅의 모든 구원사건들의 원초적 사건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의 예표적 사건이다. 유대인들은 출애굽사건을 첫 번째 대구원사건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 사건이 바벨론 유배사건인데, 일부 유대인들의 고토귀환이 70년 만에, 148년 만에, 혹은 173년 만에 세 차례나 이뤄졌지만, 이 두 번째 대구원사건은 아직도 완성되지 못했고, 여전히 희망하고 있는 사건으로 보는 것이 유대인들의 입장이다. 구약성경의 기록이 끝난 지 470여년쯤 지난 주후 70년에 유대인들에게 또 한 번의 비극적인 떠돌이와 노예사건이 일어났고, 이전보다 더 처참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바벨론 유배이후 2,600여년이 지난 이금까지도 이 두 번째 대구원사건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오랜 기다림이 유대인들의 가장 뼈아픈 실패이다. 이 실패는 두 번째 대구원사건의 예언을 잘못 해석한데서 비롯되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영성을 가졌던 민족이지만, 이 두 번째 대 구원사건의 예언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

유대인들의 두 번째 대구원사건을 다르게 해석한 것이 신약성경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유대인들의 제1,제2 대구원사건의 원형이자 실체적 사건이었다는 것이 신약성경의 설명이다. 바벨론 유배이후 예언자들의 이스라엘 회복과 메시아 등장에 관한 ‘희망’(하티크바)의 선포는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본 것이 신약성경 저자들의 입장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희망을 이루기 위한 대구원사건이다. 그러나 그분의 오심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방식과 희망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방식과 내용으로’ 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인간의 세속적인 희망과 기대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방식과 내용으로’라는 전혀 새로운 이해를 선포한 사건이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해 준 것이 고린도전서 1장 18절의,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과 22-25절의,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는 말씀이다.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의 유대인들이 설정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혀 다른 방식과 내용으로 설정하고 있다.

첫째, 구약성경의 유대인들이 설정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한 새로운 관계의 예표요 그림자였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이 율법(토라 혹은 계명)과 짐승의 피로써 ‘구약’(옛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선민이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독생자 하나님 그리스도의 복음과 피로써 ‘신약’(새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선민이란 점이다.

둘째, 구약성경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조상들의 하나님’ 또는 ‘유대민족의 하나님’으로 한정했다면,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모든 민족의 하나님’ 또는 ‘열방의 하나님’으로 또는 ‘온 인류의 하나님’으로 극대화시켰다는 점이다.

셋째, 구약성경의 유대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대민족과 타민족, 남성과 여성, 신분과 계급으로 나눠 차별하였다면,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은 남녀노소빈부귀천민족에 관계없이 인류는 하나님의 한 가족이요, 아들과 딸들이요, 형제와 자매라는 하나님과의 매우 독특한 관계를 설정하였다.

넷째, 구약성경의 유대인들은 토라의 613개의 계명과 수많은 울타리 법들을 지켜야만 또 할례와 침례를 받고 유대교에 개종해야만 아브라함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구원의 축복을 독점하였지만,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또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으면, 은혜로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약속받고, 보증과 인침의 성령님을 선물로 받아 그분이 주시는 은사들을 가지고 천국생활을 맛보고 누리며 주님의 재림의 날까지 천국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지금은 내가 누군지, 소명이 무엇인지, 지금이 어느 때인지, 나와 우리 가족과 교회가 하나님과 어떤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어떤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야할지를 기도하며 하나님과 함께 만들어가는 2010년을 계획하고 실천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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