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일(요 11:17-53)
본문
생명의 일(요 11:17-53)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이란 표현을 유서에 남겼듯이, 생로병사, 곧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현상은 자연에 속한 것이고, 자연스런 현상이다. 불교에서는 이 현상을 ‘4고’(四苦)라고 말한다. 생로병사를 ‘고통’으로 이해하는 입장에는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고통’의 원인을 찾고 해결하는 패러다임, 곧 진단과 처방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유교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7정’(七情)에서 찾고 감정표현의 억제를 처방하고 있다. 불교는 고통의 원인을 ‘욕심’과 ‘집착’에서 찾고, ‘무욕’과 ‘공’(空)을 처방한다. 기독교의 ‘내려놓음’(포기)과 ‘낮아짐’(동일시)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기독교는 고통의 원인을 ‘죄’에서 찾고 있다. ‘죄’는 ‘관계단절’에서 빚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따라서 처방은 ‘관계회복’이다. 처방약은 ‘믿음’과 ‘신뢰’이다. 믿음과 신뢰의 바탕은 ‘신실’이다. 신실은 ‘믿을만하다,’ ‘미쁘다,’ ‘약속한 것을 지킨다.’는 뜻이다. 약속을 지키면 신뢰와 믿음이 쌓이고, 믿음이 쌓이면 깨진 관계가 회복된다.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가 다 마찬가지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현상은 자연에 속한 것이고,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고통스런 일이다. 따라서 괴롬과 한숨과 눈물의 강을 비껴갈 수 없다.
생로병사 그 자체가 자연의 법칙이다. 자연법칙이 아담타락이후에 생겼는지, 아담타락이전부터 이미 있었는지는 답이 쉽지 않다. 창세기는 아담타락이후에 자연법칙이 생겼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지만, 핵심은 이렇다. ‘피조물’은 그 속성상 영원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시작된 때가 있었던 만큼 반드시 끝날 때가 있다. 피조물의 운명은 언젠가는 죽는 것이다. 생로병사를 피할 수 있는 피조물은 우주상에 아무 것도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타락과 관계없이 피조물은 유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초에는 지금보다 자연환경이 훨씬 깨끗했고, 병원균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동식물의 생존기간이 지금보다는 몇 배나 더 길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에 주어진 엄연한 법칙은 생로병사를 피해갈 수 없다는 점이다.
자연의 법칙은 죽음의 법칙이다. 피조물세계의 존재법칙은 빛이 흑암이 되고, 질서가 혼돈해지고, 생명이 죽음이 되는 것이다. 이 자연법칙을 엔트로피 혹은 제2열역학법칙이라고 말한다. 살아있던 것이 죽어가고, 서 있던 것이 넘어지고, 싱싱하던 것이 썩어지고, 새것이 헌 것이 되고, 정돈되어 있던 것이 흐트러지고, 깨끗하던 것이 더러워지는 현상을 말한다. 그래서 버려두면 망가진다. 버려둬서 더 좋아지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연탄이 타고나면 재가 되듯이, 태양도 언젠가는 잿더미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구도 달도 수많은 별도 다 얼어 죽게 된다고 한다. 또 다른 이론에 의하면, 태양에너지가 고갈되고 별들이 얼어 죽기 이전에 우주가 팽창을 멈추고 수축되는 과정에서 엄청난 질량의 블랙홀이 생기고, 그 블랙홀에 지구도 달도 별도 삼키게 되고, 혹은 뜨거운 열에 타죽게 된다고 한다. 어떤 이론이 옳든 간에 언젠가는 이 우주가 종국에는 다 죽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창세기 1장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피조물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피조물세계의 법칙은 만들어졌다는 점 때문에 숙명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자연의 법칙은 죽음의 법칙이다. 피조물세계의 법칙은 빛이 흑암이 되고, 질서가 혼돈해지고, 생명이 죽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천지창조에서 보여주셨듯이, 하나님은 끊임없이 흑암을 빛으로, 혼돈을 질서로, 죽음을 생명에로 바꿔가는 생명의 일, 살림의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법칙은 죽음의 법칙이고, 창조주의 법칙은 생명의 법칙이다.
피조물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죽음이지만, 하나님을 지배하는 것은 생명이다. 하나님의 영역은 생명이지만, 피조물세계의 영역은 죽음이다. 피조물세계의 숙명은 죽음이지만, 하나님의 숙명은 영생이다. 하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롬 5:17절)하며, 종국에는 “영생에 이르게”(롬 5:21절) 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문제해결방식을 보면, 바람직한 삶이 무엇인지, 생명의 일, 살림의 일이 무엇인지, 관계회복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일성을 발하시기 전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하나님의 존전에 펼쳐진 현실이었다. 하나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현실에 직면하신다는 증거이다. 문제는 당면한 문제를 어떤 눈으로 보고, 무엇을 인식하며,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있다. 이 문제해결방식을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문제해결방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째, 긍정의 언어가 있다. 하나님은 직면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현실 앞에서 당황하시거나 좌절하시지 않고, 당당하게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빛이 생겼고, 결과도 보시기에 좋았다. 그 이유는 흑암이 변하여 빛이 되었고, 혼돈이 변하여 질서가 되었으며,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생명체에게 절대필수인 ‘빛’의 창조는 살림의 언어, 생명의 언어, 긍정의 언어에서 비롯되었다. 살림의 언어, 생명의 언어, 긍정의 언어에 문제해결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적은 긍정의 언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런 언어습관을 본받아야 한다. 현실에 주눅 들고, 현실에 좌절하며, 현실에 무너져서는 안 된다. 당당하게 현실을 극복해나가는 언어의 힘이 우리 성도들에게 있기를 바란다.
둘째, 아가페 사랑이 있다.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에 살림의 능력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힌 십자가가 문제투성이인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한 말씀처럼(고전 1:18,24), 하나님은 문제투성이인 우리가 서야 할 저주와 죽음의 십자가에 대신 못 박히셨고, 그 대신 우리에게 영생의 복을 주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몫을 받는 대신에 하나님의 몫인 구원의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문제해결방식이다. 긍정의 언어와 희생적인 사랑이 흑암을 빛으로, 혼돈을 질서로, 죽음을 생명에로 바꿔놓는다. 이 살림의 일이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법칙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따라 진노의 자식에서 명품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이 권면은 창조주 하나님의 법칙과 구세주 예수님의 법칙으로 문제해결방식(패러다임)을 바꾸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의 일을 본받아 살림의 일을 하셨다. 요한복음 11장에 소개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 예수님의 대표적인 생명의 일, 살림의 일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자리매김하셨다.
예수님 당시 민중의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크게 대립각을 세운 이유는 문제해결방식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병든 자, 가난한 자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된 데는 그들이 지은 죄가 아니면, 그들 조상들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병든 자,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고 부축해 주려하기보다는 오히려 지키기 힘든 법들을 만들어 그들을 더욱 옥죄였다. 대표적인 것이 수많은 종류의 안식일 법이었다. 결국 안식일 법은 무지하고 병들고 가난한 백성들의 올무가 되었고, 억압수단이 되고 말았다.
안식일의 본래목적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쉼에 있다. 쉼의 참된 의미는 매인 것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업무의 과중, 시간의 매임, 육체의 고달픔, 정신의 매임, 영혼의 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안식일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데 있다.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살림의 일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부 유대인들의 험악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날 용감하게 살림의 일들을 하셨다. 손 마른 병이 고쳐지고 꼬부라진 것이 펴지게 하셨으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 38년 동안 누워 있던 자를 일으켜 세우셨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고, 살림의 일을 하는 자가 안식일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판단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안식일 날 병 고치는 일, 살림의 일, 생명의 일, 창조의 일을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 12절에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고, 마가복음 3장 4절에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묻고서 병든 자를 고치셨다.
예수님의 문제해결방식은 ‘살림’과 ‘빛’과 ‘생명’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창조의 일, 살림의 일, 생명의 일을 본받고 계셨고, 하나님의 살림의 언어, 생명의 언어, 긍정의 언어를 본받으셨으며, 흑암을 빛으로, 혼돈을 질서로, 죽음을 생명에로 바꿔나가는 일을 몸소 실천하셨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21절에 의하면,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시는 것”이다. 이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아들도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배웠다고 하셨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태도가 있다. 우리가 어떤 패러다임, 어떤 문제해결방식을 갖고 살아야할지를 이미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다 보여주셨다. 남은 것은 이제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을 본받아 사신 것처럼, 바울이 하나님을 본받아 산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본받아 사는 것뿐이다.
- 이전글 절대 신(神)의 기구한 운명(출 20:1-6) 09.07.03
- 다음글 생명의 빛(요 9:1-12) 09.06.1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