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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과 고뇌의 삶(요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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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873 2009.07.22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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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과 고뇌의 삶(요 14:27)

1992년 6월 박 목사님과 함께 일본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참석했다가 목사님의 안내로 교토시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일본의 국보1호 ‘목조반가사유상’을 만나볼 기회가 있었다. 목조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의 국보38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많이 닮았다. 서기 600년대 초에 백제왕실이나 신라왕실에서 일본왕실에 보낸 미륵보살상이다. 독일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이 불상은 형언키 어려울 만큼 기막힌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모나리자의 미소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0년대 초 일본 교토대 예술학부 학생이 이 불상을 넋을 놓고 보고 있다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대좌(臺座)로 뛰어들어 불상을 끌어안았다가 불상의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소동을 빚기도 하였다. 그 때 부러진 조각을 정밀 조사했더니, 우리나라 봉화 영주에서 자라는 적송(赤松)인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

이 불상에 비교될 수 있는 서양의 작품이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의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작품은 로댕이 죽을 때까지 제작에 매달렸지만 미완성으로 남게 된 「지옥의 문」 상인방과 문틀 사이의 넓은 공간 중앙에 놓였던 조각품이다.

그런데 두 작품이 모두 오른쪽 무릎근처 허벅지에 오른쪽 팔꿈치를 대고 오른쪽 턱의 볼을 괴고 있거나 손가락을 댄 모습이다. 이 모습은 고뇌하는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자연스런 포즈다. 반가사유상은 원래 석가모니가 태자 시절에 인생무상을 느껴 고뇌하는 명상자세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질 인간들의 운명과 타락한 문명을 생각하며 고뇌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그리스도를 표현했다는 설이 있다.

이들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불교와 기독교는 모두 인간의 고뇌에서 출발되었다. 그러나 두 종교가 인간의 고뇌로부터 구원을 표현한 방법은 상반된다. 불교에서는 부처를 묘사할 때,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모습으로 조각한다. 부처가 갖춰야 할 신체상의 특징으로 크게는 32가지, 작게는 80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32길상 80종호(三十二吉相 八十種好)라고 한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 부처가 32길상 같은 특수한 묘상을 갖게 된 것은 5백번의 전생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에 결국 황실의 태자로 태어날 수 있었고, 32길상 80종호의 모습(相)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는 인류의 죗값을 대신 받기 위해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고, 끝내는 극형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가톨릭에서는 가장 고통스런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모습의 구세주 미륵보살과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런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의 형상들, 이것이 불교와 기독교가 구세주를 표현하는 상반된 모습들이다. 불교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평화로운 구세주의 모습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고통스런 구세주의 모습에서 우리는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몇 해 전 소천하신 시인 구상은 ‘나는 왜 크리스천인가?’라는 제목의 신앙고백문을 남겼다. 고백은 이렇게 시작된다. “먼저, 내가 왜 크리스천인가라는 이야기를 소박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의 크리스천이올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각(知覺)이 들기 이전, 크리스마스 밤에 산타클로스가 머리맡에다 선물을 가져온다는 설화를 그대로 믿었을 때 말고는, 철이 나면서부터는 가톨릭신자이기 때문에 평안 속에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정신적인 고뇌 속에 있었다는 것이 정직한 고백입니다. 그래서 저는 동경으로 유학 가서도 종교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불교의 나라이기 때문에 종교학 커리큘럼 중 절반 이상이 불교경전에 대한 주석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고민은 신의 실재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와 아울러 신의 섭리라든가, 교리 자체 등에 대한 많은 회의를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평안보다는 고뇌에 싸여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난 저주받은 영혼이 아닌가하며 극단적인 생각으로까지 치닫곤 했습니다.”

참고로 시인 구상은 열다섯 살에 수도원 부설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3년 만에 환속했고 노동판 인부 등을 전전하다가 일본 도쿄(東京)로 밀항했다. 그곳에서 노동자와 연필공장 직공으로 연명하다가 도쿄 니혼(日本)대학 종교과에 입학하여 불교를 전공하였다.

시인 구상의 ‘정신적인 고뇌’는 신앙과 삶의 괴리 때문에 겪는 갈등이 아니라, 구원의 길에 대한 고민이었다. 한 때 사제가 되려고 신학공부를 했던 그로서 니혼 대학에서의 불교공부는 그를 줄곧 고민에 빠트리게 하였다. 불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시인 구상은 가부좌를 틀고 미소 짓고 있는 부처의 ‘평안’과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스러워하는 예수님의 ‘고뇌’ 사이를 오가며 자신을 “저주받은 영혼”으로 생각할 정도로 치열하게 갈등하였다.

그러던 중에 구상은 시인 폴 클로델을 통해서 기독교의 진수를 맛보기 시작하였다. 로댕의 제자 카미유 클로델의 남동생이었던, 폴 클로델(Paul Claudel, 1868-1955)은 외교관이자 시인이었다. 클로델은 신앙을 잃고 방황하던 젊은 시절에 랭보의 㰡”일뤼미나시옹㰡•과 㰡”지옥의 계절㰡•을 읽고서 신앙을 되찾았다. 특히 그는 노트르담 성당에서 예배 중에 그의 가슴에 무언가가 접촉되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라는 것을 느꼈고, 전신이 공중부양되는 것 같은 체험을 통해서 믿음을 확실히 되찾았다. 이 믿음이 너무 강력해서 일생동안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체험을 바탕으로 클로델은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 어떤 초자연적인 것을 깨닫는데 중점을 두고 살았다. 보이는 세계는 혼돈과 우연의 연속일 뿐이므로, 그것을 보이지 않는 참 세계로 받쳐줄 때 비로소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초자연의 실체는 하나님이시며, 이 하나님이 없는 세계는 불완전하고, 무의미하며, 허무할 뿐이라고 했다. 그런 클로델이 말하기를, “만일 그대들이 신을 참되게 알았을 때, 신은 그대들에게 동요와 불안을 줄 것이다”고 했다. ‘평안’이 아니라 ‘동요’와 ‘불안’을 주는 신(神), 그분이 시인 구상 선생께서 클로델을 통해서 알게 된 기독교의 하나님이었다.

부처의 평안은 모든 집착을 놓아버렸을 때 얻는 평안이고, 그리스도의 고뇌는 고통당하는 세상과 함께 하려는 숭고한 고뇌이다. 폴 클로델과 구상 선생이 만난 하나님이 ‘평안’이 아니라 ‘동요’와 ‘불안’을 주는 신(神)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만 평안을 얻고자 했으면 얼마든지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분이셨다. 그러나 자청하여 세상에 내려오셨고, 죄인과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셨으며, 그들이 겪는 모든 고뇌의 짐을 지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안락한 삶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세상과 함께 고뇌하는 동요와 불안의 삶이다.

부처의 평안은 각자가 자기 힘으로 찾아 누리는 평안이기 때문에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는 영원히 누리지 못할 수가 있다. 실제로 해탈의 길은 멀기만 하다. 오늘날까지 부처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적기 때문이다. 석가여래, 비로자나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 그리고 미륵불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고뇌를 담당하신 후에 주시는 평안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평안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또 16장 33절에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다.

부처의 평안은 인간의 고뇌를 소극적으로 버릴 때 얻어지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평안은 인간의 고뇌를 적극적으로 담당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

부처의 평안은 세상을 등질 때 얻어지는 개인의 평안이고, 그리스도의 평안은 세상과 함께 고뇌에 동참할 때 얻어지는 공동체의 평안이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평안이 아니라, 공동체의 평안이요, 지구촌의 평안이다. 배고파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버려진 고아와 과부들이 있는데, 배우지 못해 글씨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만 가부좌 틀고 앉아서 평안을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그들과 함께 고뇌하고 그들을 도울 방법을 찾고 그들을 도와서 그들과 함께 웃고 평화를 맛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 마음이 동요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마음이 동요하고 불안하다는 것은 그 마음에 구원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통당하는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려는 마음 때문에 갖는 동요와 불안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시인 구상은 문학사상 2001년 10월호에 ‘오늘’이란 제목의 시를 실었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지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지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숭고한 고뇌가 필요한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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