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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인식(렘 2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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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269 2009.08.12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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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인식(렘 29:10-14)

어제가 광복 64주년, 건국 6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들 역사적 사건들이 같은 날짜에 있었지만, 왜 그랬는지 우리는 8.15하면 광복만 생각했지, 건국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요즘은 광복보다는 건국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과거지향에서 미래지향으로 바뀌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이집트 대탈출을 앞둔 3월말 4월초 보름달이 뜬 밤에 먹었던 유월절 식사를 해마다 해방절로 지킨다. 온 민족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이삿짐을 꾸려서,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떠날 채비를 갖춰놓고, 이집트에서의 마지막 날 밤, 달빛이 있어서 어둡지 않았던 그 비밀스런 밤에 양을 잡아 굽고, 화덕에 빵을 구어 쓴 나물과 함께 먹고 수십만 혹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삿짐을 챙겨들고 일제히 길을 떠나는 웅장하고 스펙터클한 모습이나 지축을 흔들며 추격하는 마병대를 뒤에 두고 갈라진 홍해를 숨 막히는 흥분과 긴박감 속에서 건넌 후에 홍해 해변에서 절정의 감격을 맛보았던 그 함성과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늘을 찌르는 노래가 애석하게도 대한민국의 광복절인 1945년 8월 15일에는 없었다. 능동적이었던 히브리인들의 영광의 탈출과는 달리 조선의 광복이 강대국들에 의해서 주어진 수동적인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광복에 비하면, 건국은, 비록 그것이 반쪽 나라의 행사였지만, 오히려 능동적인 사건이었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가능케 한 사건이었다.

작가 강준식에 의하면, 조선총독부의 통치는 8월15일 이후에도 엄연히 지속되었다. 참고로 대만은 10월 25일을 광복절로 지키고 있고, 미국은 9월 2일, 구소련과 중국은 9월 3일에 대일전승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이 수락된 것은 8월 14일이었고, 일본군에 정전명령이 하달된 것은 8월 16일이었으며, 일본이 포츠담선언에 조인한 것은 9월 2일이었다. 그리고 일제가 조선총독부청사에서 항복조인식을 거행한 것은 9월 9일이었다. 8월 15일에는 전쟁을 끝낸다는 일왕의 발표가 두 차례에 걸쳐서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8월 15일은 일본의 종전기념일이다. 이날 일왕이 발표한 종전(終戰) 소식은 잡음이 심하였고, 내용파악이 어려운 문어체였으며, 발표내용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깨닫는 조선인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8월 15일 조선 땅은 일상처럼 조용한 하루였을 뿐, 거리에 만세소리가 울려 퍼지고 태극기가 물결치지 못했다.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것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탄의 위력 때문이었다. 해방직후 대한민국은 38선을 경계로 국토와 민족과 사상이 둘로 갈라져 대립하였다.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정복이후 500여년 만에 맛보았던 남북분열의 아픔을 우리나라는 해방직후 곧바로 맛보았다. 해방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분열의 아픔부터 겪었다. 그리고 3년 후에 있었던 건국은 그나마 일제의 억압에 시달려온 민족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선물하였고, 공산독재로부터 백성을 보호한 사건이었다. 여기에 진정한 해방의 기쁨이 있고, 우리 민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경륜이 있다.

광복(光復)이란 말은 '빛이 되돌아 왔다.'는 뜻이다. 우리 민족이 36년간 절망의 어둠 속에 살다가 비로소 희망의 빛을 되찾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민족에게 희망의 빛이 있었는가라는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있었다면, 그것을 해방에서보다는 건국에서 찾아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성서를 보면, 유대인들은 해방이라는 과거에 의미를 두지 않고, 건국이라는 미래에 두고 살아온 것을 볼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 해방과 건국의 의미는 역사적으로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첫 번째 해방은 모세시대의 이집트 대탈출을 말하고, 두 번째 해방은 페르시아제국 때 모국 땅에 돌아온 사건을 말한다. 세 번째 해방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함에 따라서 1878년간 (영토뿐 아니라, 주권회복까지를 포함하면 2534년이 걸렸다.)  전 세계에 흩어져 고통 속에 살았던 유대인들이 모국으로 돌아온 오름(알리야)을 말한다. 그들이 과거를 털어버리고 미래를 향해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의식 속에 뿌리내린 미래 인식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 사건이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이라는 미래 인식을 갖고 있었고, 바빌로니아 유배 때 예언자들의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을 통해서 다가올 세상(올람 하바)에 대한 미래를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다가올 세상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보다는 훨씬 더 이상적이고 영구적인 신정국가이면서 아직 한 번도 이 땅에서 이뤄진 적이 없는 미래의 나라이다. 그러나 이 미래가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의 삶의 동력이 되고 있다. 한편 기독교인들은 이천년 전에 이미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다가올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인 교회를 통해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경험하기 시작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로 인식하였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미래 인식에서 오는 힘보다 더 운동력이 컸던 기독교인들의 동력이다. 이 같은 미래 인식이 광복절이후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었는가라는 물음을 묻게 된다.

이 물음에는 긍정의 답과 부정의 답이 다 가능하다. 긍정적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과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을 들 수 있다. 비록 그들이 장기집권과 독재로 오점을 남기긴 했지만,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데에는 이들 대통령의 미래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한편 우리나라는 인구 당 핸드폰 보유량 세계 1위, 초고속 인터넷 가입률 세계 1위, 컴퓨터 보급률 세계 1위, 반도체 생산량 세계 1위, 선박 건조율 세계 1위, 제철 조강 생산량 세계 1위, 전 세계 13위를 달리는 경제대국이지만, 행복지수는 세계 178개국 중 102위에 머물고 있다. 이처럼 행복지수가 낮은 것은 미래 인식이 부족하고 물질의 풍요를 최고의 가치로 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국민의 20퍼센트 가깝게 차지하고 있지만, 생활에 감사가 없고, 변화가 없는 것은 가치를 미래에 두지 않고, 현실문제와 물질의 풍요에 두기 때문이고, 그것이 채워졌을 때를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방직후 6.25사변을 거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을 포함해서 우리 국민들은 미래를 품고 살아왔지만, 오늘날에는 기독교인들조차 미래보다는 현실의 문제와 물질 풍요에 묻혀 살고 있다. 우리 국민의 행복지수가 낮고 사회가 긍정적으로 변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란 과거만 있고, ‘아직’이란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를 시점으로 산업혁명과 근대과학기술문명을 겪으면서 인간의 삶의 질은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지만, 행복지수는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지수는 재는 척도에 따라서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행복지수를 경제력, 생활환경, 교육수준과 같은 물량적 측면에서 잰다면, 덴마크, 핀란드, 네덜란드와 같은 북유럽 국가들이 대부분 순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가족, 친구, 이웃과 같은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정신적 측면에서 잰다면, 방글라데시, 네팔, 남태평양의 바누아투와 같이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의 사람들이 대부분 순위를 차지한다. 그 이유는 행복이란 것이 기대치에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큰 것을 기대할수록 불행지수가 높아지고, 작은 것을 기대할수록 행복지수가 높아진다. C. S. 루이스(Lewis)는 인생의 행불행은 인생을 호텔로 보느냐, 포로수용소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인생을 호텔로 생각하면 너무 불편한 곳이 될 테고, 포로수용소로 생각하면 너무 편한 곳이 될 것이다.

㰡”지나간 미래㰡•(Vergangene Zukunft)의 저자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한철 옮김, 문학동네)은 역사해석의 도구로 ‘지나간 미래’란 개념을 차용했다. 코젤렉에 의하면, ‘내일은 좋아질 거야’라는 미래 인식이 일반 대중 속으로까지 확대된 것은 근대문명이 시작된 18세기부터라고 한다. 코젤렉은 경험과 기대치 사이에서 경험이 줄어들고 기대치가 높아질수록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대, 즉 미래로 파악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평생을 시골마을에서 산 사람에게 내일은 어제의 경험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근현대로 오면서 어제까지의 경험으로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일에는 또 어떤 일이 생길지, 어떤 신기술이 발표될지, 또 어떤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이전시대의 미래란 과거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지만, 근현대이후에는 미래가 과거와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제 현대인들에게 미래란 점차 알 수 없는 어떤 괴물이 되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 미래의 불확실성이 현대인들에게 돈에 의지하게 만드는 한 가지 요인이 되고 있다. 삶을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돈’이기 때문이다. 근대문명은 미래 인식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 미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한 혹은 불행한 요소로 자리를 잡고 있다. (쌍용차 사태와 용산 철거민 사태에서 보듯이, 미래가 사람들에게 불안과 불행의 요소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이미' 잡고 있는 것을 놓아버리기가 그토록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문제는 기독교인들조차 미래가 불안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나간 미래는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하는 척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대민족의 역사 속에서 미래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흑암과 절망 속에서 노예와 떠돌이로 살던 히브리인들에게 광복(光復)이라는 빛을 비치고, 사막에서조차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바라보게 했던 모세와 바빌로니아제국에 망하여 유배로 끌려간 처참한 현실에서조차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을 펼치며, 다가올 세계를 선포했던 예언자들의 미래 인식과 다가올 세계를 미래로만 인식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 속에서 삶 속에로 끌어들여 변화를 경험하게 할뿐 아니라, 그 힘으로 미래를 향해서 힘차게 전진하게 만든 바울의 미래 인식이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이다.

성서 66권은 흑암과 혼돈과 죽음의 현실 속에서 빛과 질서와 생명의 미래를 향해서 힘차게 전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행군에 관한 글이다. 문서로써의 성서는 66권의 책으로 끝났지만, 삶으로 쓰는 성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세상에 기록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확고한 약속 때문에 ‘이미’ 속에서 살지만, 그것을 손에 넣기까지 여전히 ‘아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한 사건이 이천년 전에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사건이며, 아직 오시지 아니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사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성취한 것에 감사하면서 아직 이뤄야할 것을 향해서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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