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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신 3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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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129 2009.08.21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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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신 33:29)

행복의 파랑새는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불러들이는 것이다. 만물의 분명한 법칙은 버려두면 망가지는 것이다. 하물며 행복의 파랑새를 쫓아내는 행위는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행복과 관련해서 세 종류의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행복의 파랑새가 찾아와주기를 마냥 기다리는 사람, 둘째는 행복의 파랑새를 불러들이는 사람, 셋째는 찾아온 행복의 파랑새마저 쫓아내는 사람이 있다. 여기서 행복의 파랑새를 적극적으로 불러들이는 사람의 특징은 불만족스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남의 탓을 하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수동적이고 역행적인 사람의 특징은 불만족스런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림동화책 [둥지상자]를 펴낸 김황이란 작가가 있다. 그는 재일조선인 3세로써 본명이 심강만이다.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심한 '왕따'를 당했는데, 소학교 5학년 때 특별활동부서를 정하는 날 감기로 결석을 하는 바람에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육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집오리, 메추라기, 잉꼬들에게 먹이를 주고 사육장을 청소하는 일을 하는 동안 어린 심강만은 사육사가 되고 싶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서 전학 온 김황이란 친구와 사귄 뒤부터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심강만이 재일조선인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대한민국 국적의 김황과 헤어졌다. 이 친구와의 행복했던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 김황이란 필명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일본 조선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했지만, 일본 국적이 없었기 때문에 공무원인 동물사육사가 될 수 없었다. 사육사가 되기 위해서 국적을 바꿀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대신에 꿈을 접었다. 그 뒤 한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심강만은 김황이란 필명으로 생명들의 공생에 대해서 글을 쓰는 작가가 되어 국적과 나이와 종을 불문하고 모든 생명들이 함께 행복해지는 세상을 그려내고 있다.

동화작가 김황은 이토록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던 불행까지도 행복으로 바꾼 훌륭한 재일조선인이다. 그가 [둥지상자]에서 이런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독일 중부 튜링겐 주에 베를레프슈(1857-1933)란 이름의 남작이 살고 있었다. 남작은 잠실야구장 62개가 들어설 정도의 커다란 숲을 갖고 있었다. 그는 새들을 좋아해서 고양이나 뱀을 쫓아내고, 물 마실 곳과 먹을거리까지 마련해 줬지만 숲을 찾아오는 새들이 좀처럼 늘지 않았다. 더 많은 새들이 찾아올 방법을 궁리하던 남작은 새들이 편하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을 만들어 주기로 결정했다. 무려 이천 개가 넘는 둥지상자를 만들어 나무에 걸어줬더니 새들이 꼬리를 물고 찾아와 새끼를 낳았고, 숲은 이내 새들의 천국이 됐다. 남작은 1899년에 둥지상자에 대한 연구서를 출판하여 세상에 알렸지만 아무도 그를 따라 배우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1905년 나뭇잎을 갉아먹는 목화명나방 애벌레가 크게 번식하여 튜링겐주에 있는 숲의 나무들이 거의 죽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남작의 숲은 끄떡없었다. 둥지상자에 사는 그 많은 새들이 목화명나방 애벌레를 먹어 치우는 바람에 숲은 피해를 입지 않은 채 그대로 보존이 되었다. 남작의 행운은 저절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여 불러들인 것이다. 남작의 이야기는 행복의 파랑새는 스스로 돕는 자에게 찾아온다는 교훈을 준다.

톨스토이의 민화 가운데 [두 노인]이란 것이 있다. 두 노인이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한 노인은 ‘에핌’이라 불리는 부자 농부였고, 다른 노인은 넉넉지 않은 살림을 꾸리는 ‘예리세이’(엘리야)였다.

부자 예핌은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고, 욕도 하지 않았으며, 정직하고 깨끗한 성품의 사람이었고, 엄격하고 야무진 성격의 사람이었다. 건강했을 뿐 아니라, 자녀손도 많았지만, 그의 가정에 참 행복은 없었다. 예리세이는 비록 살림이 넉넉지는 않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성품이 착하고 명랑하였으며, 술과 담배도 하고, 노래도 즐겼다.

여행 중에 예핌은 집안의 일들을 부인과 자녀들이 잘 처리하고 있는지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예리세이는 길을 떠나는 순간 집안의 일을 깡그리 잊었다. 다만 여행 중에 친구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며,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안전하게 집에 돌아갈 것만을 생각하였다.

두 노인이 한 달을 넘게 걸어서 도착한 곳은 터키의 소아시아였다. 그곳을 지나 이스탄불로 향하던 길에 심한 흉년으로 고통을 겪는 고장을 지나게 되었다. 목이 탔던 예리세이는 물을 마시려고 농가를 찾아 나섰고, 예핌은 동행을 하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예리세이가 한 농가에 들어섰을 때, 집안에서 악취가 진동하였고, 식구들이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흉년에 전염병까지 돌았던 것이다. 예리세이는 그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즉시로 마른 빵을 꺼내서 그들에게 나눠줬고, 물을 길어다가 그들의 목을 축었다. 상황이 워낙 나빴기 때문에 예리세이는 예핌을 뒤좇아가야한다는 생각도 잊은 채, 그들에게 급한 도움을 주기 위해서 상점에 가서 먹을 것을 사오고 장작을 쪼개서 불을 지핀 후에 수프와 보리죽을 끊여 먹었다. 그들에게 닥친 불행을 알게 된 예리세이는 그들을 죽게 버려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흘간을 그들과 함께 보냈고, 다섯째 날에 고민 끝에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쌈짓돈을 털어 저당 잡힌 밭을 되찾고, 말과 수레와 밀가루 포대를 사서 그들에게 준 후에 모두가 잠든 밤에 몰래 집을 빠져나와 길을 재촉하였다. 먼 길을 가지 않아서 예리세이는 돈이 바닥난 것을 알았고, 발걸음을 집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는지, 발걸음이 가볍고 훨훨 날듯하였다.

한편 예핌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그토록 원했던 성지 곳곳을 순례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늘 불안하였다. 그런데 예핌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주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거나 혹은 주님 곁에서 함빡 빛을 받으며 서 있는 예리세이였다. 그 때마다 자기 눈을 의심하면서 그를 만나려고 했지만, 예핌은 예리세이를 만날 수가 없었다.

예핌은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예리세이와 헤어졌던 마을에 당도하였고, 그곳에서 천사의 일을 행한 어떤 순례자의 도움을 받아 목숨과 신앙을 되찾고, 순례자들을 후히 대접하고 있는 가족을 만났다. 그로써 예핌은 예리세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몸으로는 자신이 성지에 다녀왔지만, 영혼으로는 예리세이가 성지에 있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았다. 그가 성지에서 수차례 본 예리세이는 그의 몸이 아니라 영혼이었던 것이다.

행복은 불러들이는 것이고, 베푸는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삶은 겉으로는 행복해 보여도 그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물음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제 너무 바빠서 그분께 감사할 시간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릴 시간을 내실 수가 없다면, 어떻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오늘 그분을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내일 우리를 이끄시는 것을 중단하기로 작정하신다면, 어떻겠는가?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셨을 때 우리가 불평을 했기 때문에, 한 해 더 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없다면, 어떻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의 날인 주일을 성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우리와 함께 걷지를 않으신다면, 어떻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오늘 성서를 읽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내일 그것을 거둬 가버리신다면, 어떻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이 보내신 자의 말에 귀를 기우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메시지를 거둬 가버리신다면, 어떻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스스로 죗값을 받도록 준비하길 원하셨기 때문에, 독생자를 보내지 않으셨다면, 어떻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의 문을 닫아버리신다면, 어떻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을 멈춰버리신다면, 어떻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제 그분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면, 어떻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들을 응답하신다면, 어떻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께 우리의 삶을 드리는 방식으로 우리의 필요들을 채우신다면, 어떻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하는 일의 결과를 가지고 평가를 하신다면,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행위와 실천에 따라서 판단하시고, 결정하시고, 상벌을 주신다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감히 행복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천벌을 면키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고, 결단코 그런 기준으로 상벌 하시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다행히도 성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신실하시며, 길이 참으시고, 한번 사랑한 것을 번복하시거나 변하지 않는 분이심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께서”란 이 열두 가지 가정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고 깊은가를 우회적으로 교훈해 줄 뿐이다. 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만이 참 행복이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고귀한 행복인 것이다. 신명기 33장 2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불러들이는 행복, 베푸는 행복,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복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삶과 직장과 사업에 넘치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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