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마음에(창 2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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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마음에(창 28:10-22)
행복에 대한 견해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행복은 이생뿐이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인생의 가치를 장수, 건강, 재물, 자손에 두게 만든다. 죽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사는 동안 잘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사람을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행복을 쫓아내고 불행을 불러들인다. 그 이유는 더 나은 세상,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기대가 없고,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삶을 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세상은 생지옥이 될 수도 있다.
둘째, 행복은 내생뿐이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인생의 가치를 내세에 두게 만든다. 이 견해는 현세에 좌절했거나 희망을 잃은 사람들, 혹은 이생에서 궁극적인 가치를 찾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많다. 이런 사람들은 이생에서 행복하기를 포기하였기 때문에 원하는 행복을 내세에서 보상받기를 원한다. 말세론에 빠진 사람들 대부분이 이 범주에 속한다.
셋째, 행복은 이생과 내생모두에 있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인생의 가치를 현세와 내세 모두에 두게 한다. 내세를 지복의 장소로 보게 하면서도 현세의 복을 포기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추구하게 만든다.
기독교인들은 ‘이미’와 ‘아직’이란 두 종말의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현세를 포기하고 내세를 기대하는 말세를 살지 않고, 바라는 내세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미’ 나의 삶 속에 앞당겨지고, 맛보아지며, 체험되어지고 있고, 성령님의 인도로 ‘아직’ 이뤄지지 아니한 내세를 향해서 힘차게 달려간다. 이것을 일컬어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한다. 내세의 행복을 현세에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맛보고 누리면서 종말에 주어질 지복들을 경험한다. 또 내생이 있기 때문에 이생에 집착하지 않고, 내생이 있기 때문에 이생을 훨씬 소박하고 건강하게 이웃과 더불어 살아간다.
행복은 마음에 있다는 말이 있다. 행복을 멀리서 찾으면 어리석은 것이다. 행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들 중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불교에서도 부처님은 마음에 있다고 말한다. 부처님이 열반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항상 인간 곁에 계시다고 말한다. 또 이런 말도 한다. “석공이 돌부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돌 속에 계신 부처님을 모셔오는 것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아름다운 불상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어느 기특한 돌쪼시가 돌 속의 부처님을 참 곱게도 모셔내었구나.” 석공이 돌 속의 부처님을 곱게 모셔냈다는 뜻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형상을 곱게 모셔낼 수도 있고, 반대로 우리 안에 있는 사단의 형상을 무섭게 드러낼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 인간의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마음속에 있다. 어떤 사람은 권세와 명예와 재물로 이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행복은 그 어떤 것으로도 살 수가 없다. 비매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은 원하면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무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극은, 그것이 공짜인데도, 대다수의 사람이 갖고 있지 못하다는데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행복이 마음에 있다는 말은 행복이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란 뜻이다. 행복에 무슨 공식이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기준이 있는 게 아니다. 행복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동일한 조건하에서 어떤 사람은 행복감을, 다른 사람은 불행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욕구차이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나물먹고 물마시고 들판에 누워도 행복한가하면, 다른 사람은 고기 먹고 와인마시고 침대에 누워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노숙자 신세일지라도 '누우면 침대요 하늘이 이불이란' 식으로 받아들이면 누운 그곳이 바로 스위트홈이 되는 법이다.
이삭의 아들 야곱이 에서를 피하여 하란으로 도망갈 때에 밤이 되어 돌을 베개 삼아 땅바닥에 누워 잤다. 그때 야곱이 꿈을 꿨는데, 사닥다리가 땅에서부터 하늘에까지 닿아 있고, 천사들이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다. 또 하나님께서 사닥다리 꼭대기에 서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야훼다.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 후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지고, 너와 너의 후손으로 인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인도하여 다시 이 땅에로 돌아오게 하겠다. 내가 네게 한 약속을 다 이룰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겠다.”고 하셨다. 야곱이 잠에서 깬 후에, 자신이 하룻밤을 지낸 허허벌판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요, 하나님의 집인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야곱은 베개로 삼았던 돌을 기둥삼아 제단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감사를 드린 후에 그 곳 이름을 벧엘(Bethel)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서원하였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 28:12-22).
노숙자 야곱은 자기가 누운 곳을 천국이라 생각하였다. 에서를 피하여 터키 남중부에 위치한 조부 아브라함의 고향인 하란으로 도망치는 신세였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 곳이면, 그곳이 슬픔 많은 세상이든, 높은 산이든, 거친 들이든, 초막이든, 궁궐이든, 천국이란 확신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을 모신 곳이 천국이요, 하나님이 동행하신 곳이 천국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야곱처럼 행복하려면, 우리도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마음속에 행복을 심어놓으셨다. 물론 사단도 우리 마음속에 좌절과 절망을 심어놓았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 행복의 몫이 커질 것이고, 사단의 유혹을 따르면 절망의 몫이 커질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일, 살림의 일을 하시는 성령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 실망스런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귀를 기울여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시라. 성령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부정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신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충만케 하시고 안도감과 행복감을 갖도록 도우신다. 그래서 기도생활이 중요하다. 기도는 채워지지 아니한 욕구를 채워달라고 조르는 것이기 보다 이미 주신 것들을 기억해내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이다. 기도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고, 용기를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행복(幸福)은 욕구가 채워져 부족감이나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안심해 하는 심리상태를 말한다. 또 행복은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만족감이 성취된 심리상태를 말한다. 만족, 기쁨, 즐거움, 보람, 가치, 평온, 이런 것들은 다 행복한 상태지만, 또한 다 주관적이다. 이런 행불행의 감정은 조정이 가능하다. 생각을 조금만 바꿔도 불행이 행복으로, 행복이 불행으로 조정될 수 있다. 따라서 기대치를 한 계단만 낮추면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감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작은 믿음만 가져도 지금보다 훨씬 더 강렬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음의 몇 가지 조건들은 행복을 되찾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
첫째,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 기대치를 낮추는 행위는 심령을 가난하게 하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주어진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팔복 가운데 첫 번째 복이다. 기대치를 낮추는 태도는 받을 것, 채울 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이미 받은 것, 이미 채워져 있는 것을 감사하는 태도이다. 채워진 부분을 보는 습관은 만족감을 느껴 감사하게 만들고, 비워있는 부분을 보는 습관은 불안감을 느껴 불평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기대치를 낮춰야 행복할 수 있다.
둘째, 자족할 줄 알아야 한다. 불행하다는 것은 욕구가 차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사람의 욕구는,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더 높은 단계를 목표로 삼기 때문에, '절대행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은 상대적이다. 전에 채우지 못했던 것을 지금 채웠을 때, 이전 것에 비해서 지금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것도 한 순간이다. 일단 욕구가 채워지면, 더 높은 단계의 욕구를 갖기 때문에 이미 충족된 것에 대한 행복감이 오래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족할 줄 알아야 행복할 수 있다.
셋째,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비교는 정치마당이자, 죄악이다. 비교는 비존재요, 자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교를 멈추면 자기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되고,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남과 자기를 비교하지 말아야 행복할 수 있다.
넷째,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성령님은 우리를 변호하시는 변호사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답을 아시는 카운슬러이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메신저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의 지복에로 인도하시는 가이드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잘못을 고치시는 의사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에로 인도하시는 교사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행복할 수 있다.
행복감은 일정 부분 조절이 필요하다. 행복해야할 때 행복해 하지 못하고, 분발해야할 때 분발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이다. 기대치를 낮춘다든지, 자족할 줄 안다든지, 남과 자기를 비교하지 않는 가난한 심령이 행복의 조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절대 선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만은 확실하다. 반대로 인간의 욕구라고해서 절대 악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만은 확실하다. 결국 행불행을 조절하는 능력, 이것이 필요한데,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그 일을 하신다. 따라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정한 행복의 장소에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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