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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채움’의 하모니(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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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732 2008.12.04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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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채움’의 하모니(빌 2:5-11) 

명암(빛과 어둠)의 조화와 마찬가지로 비움과 채움의 조화는 예술과 같은 창작분야에서 매우 중요하다. 조각, 사진, 회화, 건축 등의 분야에서 비움과 채움의 조화는 절대적이다. 이것이 어디 창작분야에서만 중요하겠는가? 일상의 삶과 신앙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비움과 채움의 조화가 가장 잘 들어난 곳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삶이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은 자신을 비움으로써 주장된 권위가 아닌 인정된 권위로 채움을 입으셨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비움으로써 주장된 권위가 아닌 인정된 권위로 채움을 받을 수 있다.
12월은 대강절이다. 대강절은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이기적인 ‘자기’(ego)를 비우고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는 절기이다. 그래서 오늘은 비움의 미학, 곧 비움과 채움의 하모니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비움’은 버리는 것이다. 한 때 소중했던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부지런히 내다버리지 않으면 쓰레기가 쌓이듯이 비우지 않으면 망가진다. 값진 것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먼저 그릇을 비워야 한다. 시시하고 값싼 것들을 버려야 한다. 두레생명문화연구소 대표인 김재일은 이렇게 말했다. “농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논에 물이 가득 차 있으면 벼가 잘 자라는 줄 안다. 하지만 논에 물이 항상 차 있으면 벼가 부실해서 하찮은 태풍에도 잘 넘어진다. 가끔은 물을 빼고 논을 비워야 벼가 튼튼해진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셨다. 하나님으로서의 신분을 버리셨고, 자율성을 버리셨으며, 특권을 버리셨다. 그 대신 자신이 누렸던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과 특권을 인간들에게 주셨다. 자신의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들과 함께 나누셨다. 그 결과 예수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다. 예수님은 독생자의 신분에서 맏아들의 신분으로 낮추셨고, 인간들의 형님과 오빠가 되셨으며, 그를 믿는 많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맞아주셨다. 예수님의 자기 비움은 수많은 생명을 살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였다. 자신을 비움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였다.
둘째, ‘비움’은 벌거벗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알몸으로 태어나셨다. 이 땅에 벌거벗고 오셨다. 가난한 자로 오셨다. 빈손으로 오셨다. 벌거벗고 오셨지만, 그분이 거둔 수확이 얼마나 풍성한가? 그분처럼 처참하게 삶을 마감한 사람도 없지만, 그분처럼 크게 성공한 사람도 없다.
나무들을 보라. 자연에 순응하여 그 화려했던 치장들을 다 벗어던지지 않는가! 그리고 적나라하게 자신의 알몸을 내보이지 않는가! 알몸이 되는 것은 겨울을 나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 것이고, 새봄에 더 싱싱한 몸, 더 화려한 부활의 몸을 입기 위한 몸부림이다.
미국인들은 매년 평균 9백만 단어를 말한다고 하는데 그 중 5백만 단어는 ‘나’라는 단어라고 한다. 그만큼 사람들은 ‘나’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고, ‘나’로 자신의 그릇을 채워놓고 있다는 뜻이다. 이 ‘나’를 버리는 것이 벌거벗는 것이다. 헌옷을 벗어던지는 것은 새 옷으로 갈아입기 위한 것이다. ‘비움’은 구태를 벗는 것이다. 헌것을 벗는 것이다. 욕심의 옷을 벗는 것이다. 벗지 않고 오래 입고 있으면 더러워져서 꾀죄죄해지고 악취를 풍긴다. 쓸모없는 것들을 버려야한다. 악취 나고 더러운 습관들을 버려야한다. 모든 죄악의 옷을 벗어야 한다. 그 대신 하나님이 주시는 의의 흰옷을 입어야 한다.
셋째, ‘비움’은 움켜쥔 것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비움’은 내가 주인 삼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더 좋은 것으로 채움 받기 위해서 내려놓아야 한다. 움켜쥘수록 소멸되고, 소유할수록 공허해지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잡은 것을 놓아야 한다. 움켜쥔 것을 놓아버린 후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들로 채워야 한다. 성령의 열매들로 채워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한다.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몽골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는 이용규  목사가 쓴 󰡔내려놓음󰡕이란 책에 저자의 아들 동연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아들 동연이가 두 살 때 함께 장난감 가게에 간 일이 있다. 동연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버즈 장난감을 두 팔로 꼭 움켜쥔 채 가게를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장난감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계산대에 올려 점원이 바코드 판독기로 읽게 해야 했다. 그래서 점원이 동연이의 팔에서 장난감을 넘겨받으려고 했을 때, 동연이는 울며 장난감을 꼭 쥔 채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장난감이 진정한 자기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잠시 계산대에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결국 동연이는 장난감을 안은 채로 계산대 위에 올라가야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선물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내려놓기 전에는 진정한 우리 것을 얻을 수 없다. 영적으로 아기인 우리는 내려놓으면 빼앗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움켜쥐려 하고, 결국 그렇게 잡고 있는 한 그것들은 진정한 우리 것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들이 우리를 옥죄게 된다. 우리가 잡고 있는 문제는 우리가 쉽게 해결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나의 문제를 내려놓고 인생의 계획까지 내어드린다면 해결 받을 수 있다. 그러려면 잠시 내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하다.
빈 그릇이 되는 것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 많이 비우면 많이 채울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로 채웠노라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비움은 채움을 위한 것이고, 채움은 비움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비움과 채움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고, 채우지 않으면 비울 수 없다. 그래서 비움과 채움은 역설적이지만 동질성이다. 비움은 채움의 또 다른 모습이다. 비움은 채움을 위한 것이지만, 채움에는 비움의 지혜가 필요하다. 무언가를 채울 때는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을 채울 것인가, 어디에 놓을 것인가, 어떻게 놓을 것인가, 절제와 통제가 필요하다. 이것을 잘 하는 사람이 예술가이다. 동양예술에는 단순함과 품격 있는 절제미가 있다. 이것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예술가이고, 신앙인이고, 성인이다. 소유욕에 사로잡혀서 채우기에 급급하면 추해진다. 조잡한 그림이 되고, 싸구려 조각이 되고, 헐값의 인생이 되고 만다. 그러나 비움과 채움의 적절함이 배어있고, 비움과 채움이 절제된 모습으로 정제된다면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이것을 경북 봉화의 천량사 주지 스님 지현은 ‘여백의 미’라는 글에서 ‘꽉 차지 않고 조금 비어 있는 듯한 아름다움이야말로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동양 고유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라 할 수 있다’고 했다. 또 그는 ‘여백의 미는 산수화나 풍류를 즐기는 삶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 안쪽에 자리 잡은, 서두르지 않고 넘치지 않는 여유로움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지현은 또 사진작가인 서명 스님의 말을 인용하여 사진이 사진답게 나오려면 과감한 ‘트리밍’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트리밍’이란 잘라낸다는 뜻이다. 이발사가 웃자란 머리칼을 잘라내어 깔끔한 모습을 연출해내고, 조경사가 웃자란 나뭇가지들을 잘라내어 조경의 멋을 연출하듯이 사진사가 사진의 아랫부분이나 윗부분의 중요치 않은 부분을 잘라냄으로써 완벽한 미학을 연출할 때 쓰는 말이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트리밍이 필요하다. 채움 속에서 비움의 미학이 들어나는 것이 아름다운 그림이고, 바이올린과 장구의 통이 비워있을 때 내는 소리가 바로 소리의 향기요 맛이다.
강북제일교회 황형택 목사는 「최경주의 비움과 채움」이란 제목의 국민일보 칼럼에서 프로 골퍼인 최경주의 삶의 철학을 이렇게 소개했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다. 잔을 비워야 또 다른 무언가를 채울 수 있다. 버리는 것이 기적을 만들어 낸다.” 늘 자신을 비워놓는 일, 새로운 우승컵을 안을 때마다 승리감에 도취되기보다 오히려 자신을 비우면서 자신을 갈무리한다는 것이다. “명예와 부로 가득 찬 잔을 비워간다”는 삶의 철학이 그의 에너지 근원인 것이다.
황형택 목사는 또 이렇게 말한다.
버림은 손실이 아니다. 버릴수록 채워지는 역설의 진리는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는 풍요의 끈이다. 비움의 끈을 잡으면 채워진다. 자기를 비우는 일은 무력한 자의 어쩔 수 없는 삶의 발자취가 아니다. 능력으로 무장된 자만이 할 수 있는 강력한 하나님의 무기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비움으로 생명을 살리는 기적의 사건이다. 빌립보서의 고백대로 “오히려 자기를 비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시자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신 것이다. 비움은 채움이다. 채움으로 부와 명예가 유지되지 않는다. 비울수록 인생은 수많은 아름다움으로 장식되는 삶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는 잘 그려진 한 폭의 수채화요, 잘 다듬어진 조각 작품이며, 명품이다. 예수님처럼 멋진 명품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비움과 채움의 조화를 부릴 줄 아는 삶의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대강절의 축복이 12월 내내 성도님들과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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