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누카와 크리스마스(요 10:22-30)
본문
하누카와 크리스마스(요 10:22-30)
하누카(Chanukkah)는 신약성서에 수전절(rededication: 성전 재봉헌절)로 소개된 유대인의 축일이다. 하누카는 유대인의 음력 키슬레브(Kislev)월 25일에 시작되어 8일간 지켜지는 빛의 축제이다. 키슬레브월은 양력으로 12월에 해당된다. 그래서 유대인의 하누카 축일은 기독교의 크리스마스와 비슷한 때에 지켜진다. 이때는 연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때이다. 2008년의 경우 12월 22일부터 29일까지가 하누카이다.
하누카는 잘 알려진 유대교 축제이다. 종교적으로 큰 의미가 있어서이기보다는 크리스마스 축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누카에 선물교환과 추리와 같은 크리스마스 관습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비유대인들은, 심지어 이방문화에 동화된 유대인들조차도, 이 축제를 유대교 크리스마스로 생각한다.
하누카의 기원은 헬라제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전 323년 알렉산더대왕(356-323 BC)이 죽은 후에 제국이 네 개의 왕조로 쪼개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시리아 지역을 통치한 설류키드 왕조였다. 이 왕조에 안디옥쿠스 4세(Antiochus Epiphanes, B.C. 175-164)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에게 일정 부분 자치와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었다. 그리고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오늘날의 미국거주 유대인들이 미국의 세속문화에 동화되었듯이, 언어, 관습, 의상 등에서 헬라문화에 동화되었다. 하누카 축일은 바로 이 헬라문화에의 동화를 막고, 안디옥쿠스 4세가 자행한 유대교 탄압에 대항해서 일으킨 혁명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하누카가 이방문화, 곧 기독교 문화에 가장 심하게 물든 세속적인 축일이 되었다는 점이 엄청난 모순이 아닐 수 없다고 뜻있는 유대인들이 한탄한다.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크리스마스가 심하게 세속문화화 되고 상업화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하누카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오히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으로 되돌려 드려야 한다. 유대인들의 하누카 축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크리스마스의 세속문화화를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크리스마스의 주인공 자리에로 되돌려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신의 계시’라 주장하여 ‘에피파네스’라고 불렀던 안디옥쿠스 4세는 유대교의 대제사장직에 헬라문화에 동화된 제사장을 세우거나 돈을 받고 대제사장직을 팔아먹었고, 나중에는 유대교를 폐지시켰으며, 성전을 약탈하는 등 유대지역을 헬라화 시켰다. 예루살렘 성전을 제우스에게 봉헌하였고, 유대인들이 부정한(treyf) 동물로 생각하는 돼지를 제단에 바치게 함으로써 성전을 더럽혔다. 이 뿐 아니라, 안디옥쿠스는 모든 유대교의식들과 율법서의 소유를 사형으로 금지시켰다. 그 대신 안디옥쿠스는 유대인들에게 연극, 스포츠, 대중탕사용, 나체운동, 테두리 넓은 모자 착용과 같은 헬라문화와 관습을 강요하였고, 이에 젊은 사제들 가운데는 제단을 버리고, 원반던지기를 연습하며, 할례의 흔적을 지우는 수술까지 받았다.
영적으로 죄의 노예로 살던 세상을 탈출하여 광야교회로 나와 하나님과 동행해야할 성도가 세속문화에 물들어가는 것은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에 무릎을 꿇었던 배교나 다름없는 행위다.
황제 안디옥쿠스에 대항한 유대인들에 두 개의 단체가 있었다. 하스모니안 가문의 제사장 마티타후(Matityahu/Mattathias)와 그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Judah Maccabee)가 주도한 민족주의 열심당원들과 바리새파의 전신인 ‘하시딤’(Chasidim), 곧 유대교의 전통주의자들이 있었다. 이 두 단체가 힘을 합쳐 유대인들이 헬라문화에 물들어가는 것과 설류키드 왕조의 종교탄압에 대항하였다. 주전 167년에 시작된 혁명은 만 3년만인 주전 164년에 성공리에 끝났고, 유대교 금지령을 해제하는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하나님께 봉헌되었다. 이로써 유대인의 주권이 회복되었고, 주전 64년에 로마제국에 다시 망할 때까지 약 100여 년 동안 하스모니안 왕조가 국민을 통치하였다.
하누카는 잃어버렸던 주권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되돌린 축일이다. 이뿐 아니라, 하누카는 성전이 찬탈되고, 예배가 무너진 자리, 곧 하나님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이 세워지고 정결한 코숴(kosher) 제물이 아닌 부정한 트레이프(treyf) 제물이 드려지던 자리를 회복시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한 축일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도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의 주권, 곧 사단에게 농락당한 하나님 나라를 되찾고, 하나님께 드리는 참 예배를 회복시킨 사건이다. 신약성서 저자들은 구약성서를 전통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함으로써 주의 만찬이 시행되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로(요 4:23-24) 밝혀 놓았다.
탈무드 기록에 따르면, 성전 재 봉헌 때 성소를 밝힐 정한(코숴) 기름이 단 하루 분량뿐이었다. 밤마다 성소의 등대를 밝힐 기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름은 기적적으로 소진되지 않았고, 정한 코숴 기름을 만드는데 필요한 8일 동안 지속되었다. 하누카를 8일 동안 지키는 것은 바로 이 기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누카는 전쟁의 승리를 기리는 축일이 아니라, 성소의 등대를 밝힌 기름의 기적을 기리는 축일이다. 이 점을 미국 대법원 판사이자 시온주의자였던 브랜디스(L. D. Brandis)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하누카(수전절)는 승리를 축하하는 마카베오 축제이다. 그러나 단지 군사적인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에 대한 영적인 것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며 외부의 적인 헬라인들에 대한 승리만이 아니라 오히려 더 위험한 우리 내부의 적을 이겼음을 축하하는 것이다. 하누카는 또한 민중의 이익을 슬그머니 배신해온 무사 안일한 소수의 특권 권력계층에 대한 민중의 승리, 곧 귀족정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기도 하다(월간 성서와 함께 1986.1. 제118호).
이처럼 하누카는 영적인 것의 승리, 마음속 적에 대한 승리, 민중의 승리, 민주주의의 승리를 기념하는 축일이다.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이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하신 모든 영적인 것의 승리, 곧 죄악으로 인한 심판에 대한 승리, 모든 질병과 죽음의 저주에 대한 승리, 모든 불행과 좌절과 절망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축일이다. 어둠을 빛에로, 혼돈을 질서에로, 죽음을 생명에로 바꿔놓은 것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는 모든 어둠의 권세를 물리친 빛의 축제이다. 크리스마스는 암울한 흑암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희망의 빛, 생명의 빛, 구원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빛이 아니라, 영원하고 밝은 빛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 탄생의 기적을 기리기 위한 축일인 것이다.
20세기 들어서 유대인들은 하누카의 의미를 다민족 속에서 한 소수민족이 그들의 문화적 주체성과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왔는가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카베오 전쟁을 유대인이 타민족과 다를 수 있다는 권리를 찾기 위해 벌린 성전(聖戰)으로 생각한다. 또 압제에 대항하는 길은 그 압제자들이 없애고자 한 가치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지켜내는 것이라고 본다. 마카베오와 그의 동료 하시딤(구별된 자들)은 안티옥쿠스 4세에 대항해서 싸우며 그가 없애고자 한 유대교 가치와 예루살렘 성전과 제단을 지켜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이다.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여러 종교들 속에서 기독교의 주체성과 종교적 신념을 지켜 나가야한다는 점을 교훈한다. 기독교가 타종교와 다를 수 있다는 권리를 찾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란 점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얕보고 어리석게 보는 성서적인 진리를 위해서 싸워야 한다. 비록 빛과 생명 그리스도의 교회가 수 만 개의 교회들 가운데서 가장 작고 힘없는 교회일지라도 그것을 없애고 무시하려는 사람들 가운데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 가치를 지켜내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하누카에 쓰이는 등대는 성전에 쓰인 등대보다 등잔을 올리는 가지가 두 개가 더 많은 ‘하누키야’(chanukkiah)라 불리는 등대를 사용한다. 이 등대의 정 중앙에 위치한 다른 등잔들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있는 등대 가지를 ‘샤무스’(shammus)라고 부르는데, 다른 등잔에 불을 점화할 때 쓰는 ‘봉사의 등잔’인 셈이다. 하누카 첫날에는 이 ‘봉사의 등잔’에 먼저 불을 켠 후에 세 개의 베라코트 기도문을 외운다. 오늘날에는 등잔을 놓는 등대 대신에 양초를 꽂는 촛대를 쓰기 때문에 양초에 대한 보통의 기도와 이 시기에 선조들에게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기도와 연중 이 시기에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보통의 감사기도를 드린다. 그러고 나서 오른쪽 첫 번째부터 차례로 매일 하나씩 등잔에 불을 밝혀 나간다. 바빌론 탈무드(Shabbat 21b)에 의하면, 등불을 점진적으로 밝히는 이유를 점진적 성화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밝혀 놓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사역에 의해서 초기성화와 중생이라는 거듭남을 시작하게 되고, 지속적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점진적으로 성화되어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성화는 커져가는 것이지 작아져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기도하고 성경 읽고 묵상하는 삶을 통해서 마음에 등불을 밝히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한다.
하누카가 갖는 중요한 예표는 숫자 8과 등불에 있다. 8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헬라어 ‘예수’를 숫자로 바꾸면 ‘888’이 되기 때문에 기독교 초기부터 예수님은 숫자 8로 표기되었고, 주일 또한 숫자 8로써 상징되었다. 또한 이 8은 복음을 상징하는 숫자로써 ‘넘친다,’ ‘넉넉하다,’ ‘충분하다’는 뜻을 갖는다. 우리를 능히 구원하고 남을 만큼의 넉넉함을 말하는 것이다. 빛으로써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을 만큼 넉넉하고 넘치는 분이시다.
하누카 등대 가운데 ‘봉사의 빛, 샤무스’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등잔의 기름은 성령님을 상징한다. 생명의 빛을 주시는 예수님은 그것을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봉사의 빛을 받아서 주시는 것이고, 성령님을 통해서 그 빛을 지속시켜 가신다.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의 작은 빛이 되어 세상을 밝히는 일도 기름으로 상징되는 성령님이 충만할 때 지속될 수 있다.
하누카 축일 때에 유대인들은 기름의 중요성을 기리기 위해서 튀긴 음식을 먹고 팽이놀이를 한다. 사각으로 다듬어진 팽이 사면에는 “위대한 기적이 그곳에서 일어났다”를 의미하는 첫 글자 네 개의 히브리어 문자가 각각 새겨져 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하누카 축일에 기름과 빛을 축하하며 자기 민족에게 구원의 빛이 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의 삶에 구원의 기적을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아들 예수님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축하하며 영광을 돌린다. 본문 말씀 요한복음 10장 28절은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고, 29-30절은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을 주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그 누구에게도 결코 빼앗기지 않으신다. 그분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가 만물보다 크시기 때문이며, 예수님과 하나님이 결국 한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성탄의 진정한 의미이다.
하누카(Chanukkah)는 신약성서에 수전절(rededication: 성전 재봉헌절)로 소개된 유대인의 축일이다. 하누카는 유대인의 음력 키슬레브(Kislev)월 25일에 시작되어 8일간 지켜지는 빛의 축제이다. 키슬레브월은 양력으로 12월에 해당된다. 그래서 유대인의 하누카 축일은 기독교의 크리스마스와 비슷한 때에 지켜진다. 이때는 연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때이다. 2008년의 경우 12월 22일부터 29일까지가 하누카이다.
하누카는 잘 알려진 유대교 축제이다. 종교적으로 큰 의미가 있어서이기보다는 크리스마스 축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누카에 선물교환과 추리와 같은 크리스마스 관습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비유대인들은, 심지어 이방문화에 동화된 유대인들조차도, 이 축제를 유대교 크리스마스로 생각한다.
하누카의 기원은 헬라제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전 323년 알렉산더대왕(356-323 BC)이 죽은 후에 제국이 네 개의 왕조로 쪼개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시리아 지역을 통치한 설류키드 왕조였다. 이 왕조에 안디옥쿠스 4세(Antiochus Epiphanes, B.C. 175-164)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에게 일정 부분 자치와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었다. 그리고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오늘날의 미국거주 유대인들이 미국의 세속문화에 동화되었듯이, 언어, 관습, 의상 등에서 헬라문화에 동화되었다. 하누카 축일은 바로 이 헬라문화에의 동화를 막고, 안디옥쿠스 4세가 자행한 유대교 탄압에 대항해서 일으킨 혁명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하누카가 이방문화, 곧 기독교 문화에 가장 심하게 물든 세속적인 축일이 되었다는 점이 엄청난 모순이 아닐 수 없다고 뜻있는 유대인들이 한탄한다.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크리스마스가 심하게 세속문화화 되고 상업화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하누카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오히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으로 되돌려 드려야 한다. 유대인들의 하누카 축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크리스마스의 세속문화화를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크리스마스의 주인공 자리에로 되돌려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신의 계시’라 주장하여 ‘에피파네스’라고 불렀던 안디옥쿠스 4세는 유대교의 대제사장직에 헬라문화에 동화된 제사장을 세우거나 돈을 받고 대제사장직을 팔아먹었고, 나중에는 유대교를 폐지시켰으며, 성전을 약탈하는 등 유대지역을 헬라화 시켰다. 예루살렘 성전을 제우스에게 봉헌하였고, 유대인들이 부정한(treyf) 동물로 생각하는 돼지를 제단에 바치게 함으로써 성전을 더럽혔다. 이 뿐 아니라, 안디옥쿠스는 모든 유대교의식들과 율법서의 소유를 사형으로 금지시켰다. 그 대신 안디옥쿠스는 유대인들에게 연극, 스포츠, 대중탕사용, 나체운동, 테두리 넓은 모자 착용과 같은 헬라문화와 관습을 강요하였고, 이에 젊은 사제들 가운데는 제단을 버리고, 원반던지기를 연습하며, 할례의 흔적을 지우는 수술까지 받았다.
영적으로 죄의 노예로 살던 세상을 탈출하여 광야교회로 나와 하나님과 동행해야할 성도가 세속문화에 물들어가는 것은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에 무릎을 꿇었던 배교나 다름없는 행위다.
황제 안디옥쿠스에 대항한 유대인들에 두 개의 단체가 있었다. 하스모니안 가문의 제사장 마티타후(Matityahu/Mattathias)와 그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Judah Maccabee)가 주도한 민족주의 열심당원들과 바리새파의 전신인 ‘하시딤’(Chasidim), 곧 유대교의 전통주의자들이 있었다. 이 두 단체가 힘을 합쳐 유대인들이 헬라문화에 물들어가는 것과 설류키드 왕조의 종교탄압에 대항하였다. 주전 167년에 시작된 혁명은 만 3년만인 주전 164년에 성공리에 끝났고, 유대교 금지령을 해제하는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하나님께 봉헌되었다. 이로써 유대인의 주권이 회복되었고, 주전 64년에 로마제국에 다시 망할 때까지 약 100여 년 동안 하스모니안 왕조가 국민을 통치하였다.
하누카는 잃어버렸던 주권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되돌린 축일이다. 이뿐 아니라, 하누카는 성전이 찬탈되고, 예배가 무너진 자리, 곧 하나님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이 세워지고 정결한 코숴(kosher) 제물이 아닌 부정한 트레이프(treyf) 제물이 드려지던 자리를 회복시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한 축일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도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의 주권, 곧 사단에게 농락당한 하나님 나라를 되찾고, 하나님께 드리는 참 예배를 회복시킨 사건이다. 신약성서 저자들은 구약성서를 전통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함으로써 주의 만찬이 시행되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로(요 4:23-24) 밝혀 놓았다.
탈무드 기록에 따르면, 성전 재 봉헌 때 성소를 밝힐 정한(코숴) 기름이 단 하루 분량뿐이었다. 밤마다 성소의 등대를 밝힐 기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름은 기적적으로 소진되지 않았고, 정한 코숴 기름을 만드는데 필요한 8일 동안 지속되었다. 하누카를 8일 동안 지키는 것은 바로 이 기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누카는 전쟁의 승리를 기리는 축일이 아니라, 성소의 등대를 밝힌 기름의 기적을 기리는 축일이다. 이 점을 미국 대법원 판사이자 시온주의자였던 브랜디스(L. D. Brandis)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하누카(수전절)는 승리를 축하하는 마카베오 축제이다. 그러나 단지 군사적인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에 대한 영적인 것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며 외부의 적인 헬라인들에 대한 승리만이 아니라 오히려 더 위험한 우리 내부의 적을 이겼음을 축하하는 것이다. 하누카는 또한 민중의 이익을 슬그머니 배신해온 무사 안일한 소수의 특권 권력계층에 대한 민중의 승리, 곧 귀족정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기도 하다(월간 성서와 함께 1986.1. 제118호).
이처럼 하누카는 영적인 것의 승리, 마음속 적에 대한 승리, 민중의 승리, 민주주의의 승리를 기념하는 축일이다.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이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하신 모든 영적인 것의 승리, 곧 죄악으로 인한 심판에 대한 승리, 모든 질병과 죽음의 저주에 대한 승리, 모든 불행과 좌절과 절망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축일이다. 어둠을 빛에로, 혼돈을 질서에로, 죽음을 생명에로 바꿔놓은 것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는 모든 어둠의 권세를 물리친 빛의 축제이다. 크리스마스는 암울한 흑암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희망의 빛, 생명의 빛, 구원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빛이 아니라, 영원하고 밝은 빛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 탄생의 기적을 기리기 위한 축일인 것이다.
20세기 들어서 유대인들은 하누카의 의미를 다민족 속에서 한 소수민족이 그들의 문화적 주체성과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왔는가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카베오 전쟁을 유대인이 타민족과 다를 수 있다는 권리를 찾기 위해 벌린 성전(聖戰)으로 생각한다. 또 압제에 대항하는 길은 그 압제자들이 없애고자 한 가치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지켜내는 것이라고 본다. 마카베오와 그의 동료 하시딤(구별된 자들)은 안티옥쿠스 4세에 대항해서 싸우며 그가 없애고자 한 유대교 가치와 예루살렘 성전과 제단을 지켜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이다.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여러 종교들 속에서 기독교의 주체성과 종교적 신념을 지켜 나가야한다는 점을 교훈한다. 기독교가 타종교와 다를 수 있다는 권리를 찾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란 점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얕보고 어리석게 보는 성서적인 진리를 위해서 싸워야 한다. 비록 빛과 생명 그리스도의 교회가 수 만 개의 교회들 가운데서 가장 작고 힘없는 교회일지라도 그것을 없애고 무시하려는 사람들 가운데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 가치를 지켜내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하누카에 쓰이는 등대는 성전에 쓰인 등대보다 등잔을 올리는 가지가 두 개가 더 많은 ‘하누키야’(chanukkiah)라 불리는 등대를 사용한다. 이 등대의 정 중앙에 위치한 다른 등잔들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있는 등대 가지를 ‘샤무스’(shammus)라고 부르는데, 다른 등잔에 불을 점화할 때 쓰는 ‘봉사의 등잔’인 셈이다. 하누카 첫날에는 이 ‘봉사의 등잔’에 먼저 불을 켠 후에 세 개의 베라코트 기도문을 외운다. 오늘날에는 등잔을 놓는 등대 대신에 양초를 꽂는 촛대를 쓰기 때문에 양초에 대한 보통의 기도와 이 시기에 선조들에게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기도와 연중 이 시기에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보통의 감사기도를 드린다. 그러고 나서 오른쪽 첫 번째부터 차례로 매일 하나씩 등잔에 불을 밝혀 나간다. 바빌론 탈무드(Shabbat 21b)에 의하면, 등불을 점진적으로 밝히는 이유를 점진적 성화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밝혀 놓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사역에 의해서 초기성화와 중생이라는 거듭남을 시작하게 되고, 지속적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점진적으로 성화되어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성화는 커져가는 것이지 작아져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기도하고 성경 읽고 묵상하는 삶을 통해서 마음에 등불을 밝히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한다.
하누카가 갖는 중요한 예표는 숫자 8과 등불에 있다. 8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헬라어 ‘예수’를 숫자로 바꾸면 ‘888’이 되기 때문에 기독교 초기부터 예수님은 숫자 8로 표기되었고, 주일 또한 숫자 8로써 상징되었다. 또한 이 8은 복음을 상징하는 숫자로써 ‘넘친다,’ ‘넉넉하다,’ ‘충분하다’는 뜻을 갖는다. 우리를 능히 구원하고 남을 만큼의 넉넉함을 말하는 것이다. 빛으로써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을 만큼 넉넉하고 넘치는 분이시다.
하누카 등대 가운데 ‘봉사의 빛, 샤무스’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등잔의 기름은 성령님을 상징한다. 생명의 빛을 주시는 예수님은 그것을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봉사의 빛을 받아서 주시는 것이고, 성령님을 통해서 그 빛을 지속시켜 가신다.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의 작은 빛이 되어 세상을 밝히는 일도 기름으로 상징되는 성령님이 충만할 때 지속될 수 있다.
하누카 축일 때에 유대인들은 기름의 중요성을 기리기 위해서 튀긴 음식을 먹고 팽이놀이를 한다. 사각으로 다듬어진 팽이 사면에는 “위대한 기적이 그곳에서 일어났다”를 의미하는 첫 글자 네 개의 히브리어 문자가 각각 새겨져 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하누카 축일에 기름과 빛을 축하하며 자기 민족에게 구원의 빛이 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의 삶에 구원의 기적을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아들 예수님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축하하며 영광을 돌린다. 본문 말씀 요한복음 10장 28절은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고, 29-30절은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을 주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그 누구에게도 결코 빼앗기지 않으신다. 그분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가 만물보다 크시기 때문이며, 예수님과 하나님이 결국 한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성탄의 진정한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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