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증인(계 11:1-19)
본문
계시록은 회복(回復)과 반전(反轉)에 관한 말씀이다. 따라서 11장 1-2절은 바벨론 군사들에 의해서 짓밟힌 예루살렘과 성전회복에 연관된 말씀으로 시작된다. 1절,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는 에스겔 40-43장과 연결해서 볼 필요가 있다. 그곳에는 바벨론 군대가 파괴한 예루살렘 성전회복에 관한 환상이 나온다. 이 환상은 제2차 유배(597 B.C.)후 25년, 제3차 유배(586 B.C.) 후 14년이 된 주전 572년에 에스겔에게 나타난 것으로써 재건될 성전의 뜰들과 부속 건물들과 각 방들의 길이와 폭을 ‘측량’하는 장면이다. 성전은 이 환상이 있고난 후 56년이 지난 주전 516년에 스룹바벨에 의해서 재건되었다.
2절,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에서 “성전 바깥마당”은 성전의 여러 뜰들 가운데 이방인들의 출입이 허용된 광장을 말한다. 주전 605년, 597년, 586년에
각각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능욕을 당했던 곳이다. 로마제국시대에는 이방인들이 허용된 뜰을 넘어 성전영내, 곧 ‘여성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들 뜰을 침범하는 이방인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성전영내의 하나님의 백성과 성전 바깥뜰의 이방인들로
구별한데서 계시록의 천상과 지상백성의 분리의 모형을 찾을 수 있다.
1절에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말씀과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다.”는 말씀은 구원 받은 백성과 심판받을 백성의 구별과 분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성전영내에 속한 자들이고,
심판받을 사람들은 성전 바깥마당에 속한 자들이다. 어린양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고, 성전영내에 들어갈 자격, 곧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을 갖지
아니한 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다. 계시록 5장과 7장은 이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성전과 예배하는 자들을 보여줬고, 그들의 수가
‘144,000’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한바가 있다. 따라서 11장에서의 ‘측량’은 7장에서의 ‘이마에 인치기까지’란
말씀과 동일개념의 반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2절에서 ‘이방인의 뜰과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게 두라’는 말씀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거룩한 성전에 들지
못한 자들로써 닥쳐올 세 번째 화인 일곱 대접재앙을 받아야할 자들이다. 이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성도들을 핍박하는 기간을 42개월 곧
3년 6개월로 설정해 놓은 것이다. 이들 하나님의 적대세력에 의해서 3년 6개월 동안 핍박받게 될 자들은 11장에서 ‘두 증인,’ 12장에서
‘해를 입은 여인’과 ‘사내아이,’ 13장에서는 ‘성도’들이다. 여기서 3년 6개월은 성도들이 겪는 환란 혹은 시련이 길지 않다는 것을 교훈하는
역사성을 가진 기간이다. 이 기간에 일어나는 영적 싸움은 ‘그리스도’와 ‘미가엘’과 ‘증인(목회자)’과 ‘성도’로 구성되는 하나님의 팀과
‘용(사단)’과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와 ‘악한 자들’로 구성되는 사단의 팀 사이에서 이뤄진다. 여기에 나타난 한 가지 특징은 사단의
팀이 짧은 3년 6개월간 승세를 잡는다는 점이다. 두 번째 특징은 ‘사단’과 ‘적그리스도’가 피조물에 불과하고, 그들의 권세도 일시적으로 허용된
것에 불과하여, 때가 되면 머리 깎인 삼손처럼 무력해지기 때문에 싸움은 반전(反轉)되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는
점이다.
계시록
11장 3-13절은 두 증인에 관한 환상이다. 이들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이다. 각각 율법과 예언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종들이다. 이 땅의 모든
하나님의 종들을 대표한다. 이들의 예언활동 기간도 1260일 곧 3년 6개월이다. 1-2절에서 이방군대의 약탈기간이 월단위로 표시된 반면,
3-13절에서는 두 증인의 예언활동 기간이 날짜단위로 표시되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특별한 영웅들이며, 두 분 다 장차 오실 메시아의 표상들이었다. 그렇지만, 복음서에서는 엘리야를 침례 요한의 모형으로 장차 오실 메시아를 예고할 자로 본 경향이 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렵던 시기에 등장한 인물들이다. 그런 만큼 이 분들은 하나님께 강력하고 특별한 권능을 받아 활동했다. 이 분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한다는 표현은 그때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사망선고를 받은 때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목숨을 내놓고 각각 바로와 아합을 대항해서싸웠다. 그들은 각각 자기 시대에 나타난 적그리스도를 대항해서 싸우는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을 대표한다.
4절에서 이분들이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 묘사된 것은 이분들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를 밝힌 등불이었기 때문이다. 감람나무는 등대의 등잔에 넣을 기름을 짜는 올리브가 열리는 나무이고, 등대의 등잔은 어둠을 밝히는 불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고 말씀하신 것처럼 땅의 모든 성도, 특히 주의 종들은 어둔 세상을 밝히는 세상의 빛이다. 성도는 성령님을 기름으로 채워 세상을 밝히는 등잔이다. 그러므로 모세와 엘리야는 성령님을 기름으로 채워 세상을 밝히는 모든 성도들을 대표한다.
5절,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는 말씀은 열왕기하 1장 10-12절의 말씀에서 평행구를 찾을 수 있고, 6절 상반절,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는 열왕기상 17-18장의 상황에서 평행구를 찾을 수 있다. 또 6절 하반절,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는 출애굽기 7-12장의 열 가지 재앙들에서 그 평행구를 찾을 수 있다. 이들 구약성서의 평행구들은 두 증인이 모세와 엘리야란 점을 분명하게 밝힌다.
모세와 엘리야는 승천한 하나님의 종들로서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의 부활승천을 대표한다. 계시록 11장에서 두 증인은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 곧 사단에게 죽임을 당한다. 사단은 음부의 사자이다. 8절에서 증인들이 죽어 시체로 있던 곳을 영적으로 ‘소돔’ 혹은
‘애급’이라 부른 예루살렘,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했다. 이 두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기 때문에 땅에 속한
자들이 싫어했다. 그래서 10절에서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고 하였다. 주의 종들과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배척당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시는 3년 6개월 동안 배척당하시고 기어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러나
무덤은 주님을 가둬 두지 못했고, 물고기가 요나를 해변에 토해낸 것처럼, 무덤은 삼일 만에 주님을 토해냈고, 주님은 부활하여 승천하셨다. 비슷한
맥락에서 모세와 엘리야도 승천하였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불 수레와 불 말들 사이에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했고(왕하 2:11), 모세는 죽어서
시체로 승천했다는 설이 있다. 신약성서 유다서 9절에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했다”는 기록이 있듯이, 고대의
유대인들은 모세의 시체가 땅에 묻혀 썩지 않고 승천했다는 ‘몽소승천’을 믿었다. 11-12절의 말씀이 이들의 승천을 반영한 글이다.
14절
이하는 일곱 번째 나팔에 관한 내용이다. 계시록 8장 13절에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 소리를 인함이다.”는 말씀이 있다. 9장에 이들 세 번의 ‘화’들 가운데 두 개가 나온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나팔재앙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리고 11장 14절에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는 선포가
있고, 15-19절에 세 번째 ‘화’인 일곱 번째 나팔이 나온다. 그러나 일곱 번째 나팔은 재앙이라기보다는 더 무서운 재앙, 나팔재앙보다 강도가
3.3배나 되는 일곱 대접재앙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마치 일곱 번째 인의 침묵이 일곱 나팔재앙을 끌어드리기 위한 고요였던 것과
같다.
15절을 보면,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하늘에서 큰 음성들이 나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실 것이다”라고 외친다. 일곱 번째 인을 떼었을 때 침묵이 흘렀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어서 16-17절에서는 24장로들이 하나님께서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하실 것을 노래하고 있고, 지금이 심판과 보상의 때임을 선포하고 있다. 심판은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 받을 몫이고, 보상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이 받을 몫이다. 그리고 19절 마지막 절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소리, 곧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말씀을 했고,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서는,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한다.”고 하였다. 바울의 이 고백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고백이요, 핵심 메시지이다. 하나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의 시련기간을 짧게
정하시고, 그 기간을 사랑의 수고와 믿음의 역사와 소망의 인내로 잘 참고 끝까지 이긴 믿음의 사람들에게 영원한 영광을 약속하셨다. 그래서 시련은
짧고 영광은 영원한 것이다. 짧게 표현된 시련의 상황이 영원한 영광의 상황으로 반전(反轉)되고, 회복(回復)되며, 기도와 소망이 이뤄지고,
구원이 이뤄진다.
계시록
11-13장은 박해자와 박해를 당하는 자들에 관한 계시로써 그 기간을 삼년 반으로 묘사하였다. 11장에서는 이방인 군대의 압제기간과 두 증인이
박해를 당하며 활동하는 기간을 각각 삼년 반으로 묘사하였다. 삼년 반에 관한 언급은 12-13장에서도 나온다. 삼년 반은 ‘마흔 두 달,’
‘일천 이백 육십일,’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란 단어로 각각 다르게 표기하였다. 그러나 문자적인 삼년 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상징적으로 ‘시련의 기간이 짧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년
반은 엘리야 시대에 아합(874-853 B.C.)과 이세벨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알숭배를 강요하던 기간에서 유래된 것이다(왕상 18:1). 삼년
반은 다니엘서에도 언급되었는데, 이는 마카비 독립전쟁 시대에 헬라제국의 안티옥커스 4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야훼신앙을 말살하려 했던 삼년 반에서
나온 것이다. 이들 두 가지 사건들은 역사적 사건들로써 모두가 심각한 배교의 위협을 받았던 때였다. 예수님도 공생애 삼년 반 동안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네로 때에도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대략 삼년 반 동안 몹쓸 박해를 받았다.
계시록의 삼년 반은 성도들이 악의 세력에게 당하는 시련의 기간이지, 재앙의 기간은 아니다. 성경에는 재앙의 기간을 삼년 반으로 언급한 곳이 없다. 성경에 나오는 재앙은 악의 세력을 응징하기 위한 것이다. 재앙과 환난을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계시록에서 말한 ‘큰 환난’(7:14)은 성도들이 신앙 때문에 당한 시련을 말한 것이고, 나팔재앙이니, 대접재앙이니 하는 것들은 박해세력인 악의 무리를 멸하시고, 그들로부터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구출하여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군사작전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내어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신 것과 같다.
군사전술에 ‘공격개시 전 사격’이란 것이 있다. 이 사격은 보병의 진격명령이 있기 전에 소나기처럼 퍼붓는 포사격을 말한다. 보병의 공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보병의 진격 전에 적의 진지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계시록에 나오는 나팔재앙과 대접재앙은 다름 아닌 악의 무리들에 포로로 잡힌 성도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소나기처럼 퍼붓는 공격개시 전 사격과 같다. 성도들에게 전혀 피해가 없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열 가지나 되는 재앙들을 이집트에 퍼부으신 것과 같다. 그러나 고센 땅에 거주하던 히브리 민족에게는 전혀 피해가 없었다. 따라서 삼년 반은 성도들이 당하는 시련의 기간으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그 기간이 결코 길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 성도들이 겪는 모든 시련들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복을 받기 위한 아주 짧은 연단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점을 잊지 말고 끝까지 믿음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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