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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답답증의 원인(요 7: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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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761 2007.09.2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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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답답증의 원인(요 7:37-39) 예수님 당시 초막절 때 성전에서 있었던 특별한 의식 가운데 한 가지는 제단에 놓인 제물에 물을 붓는 것입니다. 물을 부을 때, “풍성한 비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유대력으로는 금년)에도 풍성한 비를 주셔서 농사가 잘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원했습니다. 특히 초막절의 마지막 날을 ‘호산나 라바’(Hoshanah Rabbah)라 부르는데, ‘호산나’(Hoshanah)는 ‘제발 우리를 구원하소서! 란 뜻이고, ‘라바’(Rabbah)는 ‘큰’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호산나 라바’는 ‘큰 구원’이란 뜻을 갖습니다. 그렇지만 이 날은 ‘심판의 날’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미 그들이 ‘심판의 날들’로 여기는 ‘설날’(Rosh ha-Shanah)부터 ‘대속죄일’(Yom Kippur)까지의 열흘 동안 충분히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또 생명책이 인봉되는 ‘대속죄일’을 심판의 날로 보기 때문에 초막절 제7일째 날을 ‘심판의 날’로 보는 입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초막절 때로부터 시작되어 주로 한 겨울에 비가 내립니다. 이 기간에 강수량이 얼마만큼이 되는가에 따라서 한 해 농사의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티쉬리월 1일부터 21일까지, 즉 설날인 ‘로쉬 하샤나’로부터 대속죄일인 ‘욤 키프르’를 거쳐 초막절 마지막 날인 ‘호산나 라바’에 이르는 21일 동안에 유대인들이 흘리는 회개의 눈물에 따라 한 해 농사에 필요한 강수량이 결정되는 심판의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막절 마지막 날의 심판은 강수량에 관한 심판의 날이 되는 셈입니다. 결국 초막절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풍성한 비를 간구하는 기원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막절 마지막 날에는 실로암 연못에서 떠온 물을 계속해서 제단에 붓고 내년에도 풍성한 비를 주실 것을 기원하였습니다. 이 특별한 날 곧 초막절 마지막 날에, 요한복음 7장 37-3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7-38절)고 외치셨습니다. 성경은 “생수의 강”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39절)고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큰 축제의 날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외치셨을까요? 추수와 관련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물은 정말 황금보다 귀한 것이었습니다. 메마른 대지를 적실 수 있는 것은 물입니다. 타는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는 것도 물입니다. 자라나는 식물들을 키워낼 수 있는 것도 물입니다. 그러나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하셨던 우리 예수님은 인생의 추수를 식물의 추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년(유대력으로는 금년) 추수를 결정 짓을 풍성한 비를 비는 기원제가 진행되는 시점에서 물을 성령 충만의 상징으로 인식하시고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외치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했을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물질의 풍요나 유대교가 채워주지 못한 부족을, 다시 말하면, 아무리 먹고 마시고 즐겨도 해결되지 않는 인간의 갈증을 근원적으로 해결시킬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 예수님은 영적으로 목말라하는 수가성의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7장 39절에서는 속에서 흘러나올 생수의 강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받게 될 성령님을 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뜻밖의 외침은 초막절 명절을 지키던 유대인들이 여전히 목말라했던 것, 여전히 그들의 갈증을 채우지 못했던 것을 예수님이 채워주시겠다는 선포였습니다.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고귀한 자나 천한 자나 다 같이 느끼는 갈증을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주셔서 생수의 강물처럼 시원하게 해갈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전반부를 살펴보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갈증이 해결되고 문제가 해결되는 변화의 사건들이 아홉 번 소개되고 있습니다. 1)포도주가 떨어져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던 혼인잔치의 혼주가 예수님이 물로 만든 새 포도주에 놀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2)참된 진리에 목말라했던 율법학자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삶에 대해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3)참 사랑과 애정에 목말라했던 수가성의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에 대해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4)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고 싶은 목마름에 한순간도 눈을 부칠 수가 없었던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아들을 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5)38년간이나 도움의 손길을 목 타게 기다렸던 베데스다 연못가의 환자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고침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6)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폭풍만난 제자들이 배 안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였을 때 폭풍의 문제가 해결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7)목자 없는 양떼처럼 방황하던 민중이 예수님을 광야에서 만났을 때 배고픔이 해결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8)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눈을 뜨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9)사랑하는 오라버니를 잃고 슬퍼하며 가슴을 치던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었을 때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오라버니가 살아나는 놀라운 기쁨을 체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동일하지는 않을지라도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크고 작은 경험들, 곧 예수님을 만난 후에 겪게 된 변화의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상황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갈증들, 곧 여전히 타는 목마름이 그들의 삶을 답답하게 조이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타는 목마름이 예수님을 만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없을까요? 오스카 와일드라는 문학자는 예수님께서 과거에 은혜를 입혀준 몇 종류의 사람들을 그 후 다시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를 꾸며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만난 사람은 술주정꾼이었습니다. 그는 폐인이 다된 젊은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소?'' 술주정꾼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앉은뱅이였을 때, 당신이 나를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그 동안 직업을 구해 보았지만, 만족할만한 직업 하나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다음에 만난 사람은 창녀였습니다. 그 여자는 남자들 틈에서 희롱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이런 생활로 되돌아갔소?"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창녀에서 건져내어 새 사람이 되게 하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창녀에서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단 말입니까? 고독을 참을 수 없어서 다시 이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불량자였습니다. 그 불량자는 이웃과 정신없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여보게 청년,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소?" 불량자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준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무엇을 보라는 거였습니까? 보이는 것들은 모두 신경을 돋우고 귀찮고 화나게 하는 것들뿐이지 않습니까? 결국 나는 화풀이로 닥치는 대로 치고 받고 하는 생활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이 단편은 채울 수 없는 타는 목마름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많다는 것을 잘 말해줍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활력이 사라지는 것일까요? 요한복음의 주제는 변화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변화, 곧 어둠이 빛이 되고, 혼돈이 질서가 되고, 죽음이 생명이 되고, 답답증이 시원함이 되는 변화가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의 특이한 점은 죽음의 때를 영광의 때로 본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죽음의 때를 가리키는 ‘내 때’(요 2:4; 7:6,8)라는 표현이 여러 번 쓰이고 있고,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요 7:39),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요 12:16), “영광을 얻을 때”(요 12:23) 등의 표현이 쓰이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에서 끝나지 않고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으시고 그분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큰 영광을 받으실 것을 암시한 말씀입니다. 죽음의 때가 영광의 때다는 말은 매우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비단 예수님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후에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그분을 믿고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죽고 반드시 부활하여 영광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반드시 죽음 후에 얻게 될 영광만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죽음에는 영적인 죽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 점을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것이잖습니까? 영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죽고 다시 사는 기독교의식이 침례식이잖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으면 성령님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들을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제자의 삶을 살면서도 삶의 활력을 잃고 타는 목마름을 호소하게 되는 데는 최소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한 후에 세례나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병사의 삶을 시작했지만, 마치 사랑하는 애인을 두고 입대한 군인처럼, 온전하게 주님의 병사로서 헌신하지 못하고,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데 그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바울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우리 믿는 이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군사 된 자”(빌 2:25, 몬 1:2)라고 말했습니다. 디모데에게는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데 철저하게 믿지 못하기 때문에 삶의 활력을 잃게 되고, 삶의 답답증을 호소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 최근에 제가 정리한 저의 입장입니다. 둘째는 우리 안에서 ‘생수의 강’이신 성령님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기서 물은 성령님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을 받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했는데, 왜 우리는 성령님을 받고도 갈증과 답답증을 호소하게 됩니까? 바울 사도는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셨다”(고전 12: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성령님을 마시고도 갈증과 답답증을 호소하게 됩니까?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권면하셨습니다. “성령님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 “성령님을 근심케 하지 말라.”(엡 4:30),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성령님을 좇아 행하라.”(갈 5:16), “성령님으로 봉사하라.”(빌 3: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유다도 “성령님으로 기도하라.”(유 1:20)고 권하셨습니다. 또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성령님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만일 우리가 성령님으로 살면 또한 성령님으로 행할지니”(갈 5:25),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님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님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끝없는 답답증의 원인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생수의 강이신 성령님이 우리 자신의 정욕에 눌리어 근심케 되고, 소멸되어가고, 생수의 근원이 메말라가듯 성령님이 메말라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성령님을 좇아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님으로 기도하지 아니하고, 성령님으로 봉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충만을 받읍시다. 성령님을 좇아 행하십시다. 성령님을 좇아 무시로 기도하고 봉사하면서 성령님의 생수의 강물이 샘솟게 합시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삶에 분명 활력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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