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빛이신 예수(마 4:16)
본문
큰 빛이신 예수(마 4:16)
메리 크리스마스! 어떤 사람이 이런 지적을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메리’ 곧 즐거움에 초점을 맞춰서 성탄절을 지켜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크리스마스’ 곧 주님의 탄생예배에 초점을 맞추자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상업주의에 매몰되어 너나없이 즐거움을 추구하다보니까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가 퇴색되어간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 탄생이 주는 의미는 매우 다양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서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와 안식, 흑암과 혼돈과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구원과 부활, 빛과 질서와 생명과 해방과 자유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한꺼번에 다 설명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이 실제로 탄생했던 유월절 시기와 주후 4세기 말부터 잘못 지켜온 전통적인 크리스마스시기에 얽힌 의미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큰 축일은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입니다.
부활절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3월 20일 춘분이 지난 다음, 보름달이 뜬 다음 주일에 지킵니다. 이때부터는 낮이 밤보다 길어집니다. 빛이 비치는 낮 시간이 밤보다 점차 길어집니다. 빛이 어둠을 정복하는 시기입니다. 생명이 죽음을 정복하는 시기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께서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큰 빛을 보이시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비추신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부활은 무덤이라는 흑암과 혼돈과 죽음의 세계를 이기고 빛과 질서와 생명의 세계로 옮겨진 것을 말합니다. 부활은 어둠을 이긴 것이고, 혼돈을 이긴 것이고, 죽음을 이긴 것입니다. 우리가 노동으로부터 쉼을 강조하는 ‘제칠 안식일’ 즉 토요일을 지키지 않고, 예수님께서 무덤을 박차고 나오신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을 지키는 이유는 육체노동을 마치고 잠시 쉬는 일시적이고 육체적인 안식개념을 버리고, 무덤의 상황, 즉 흑암과 혼돈과 죽음의 상황을 박차고 일어선 부활을 통해 얻어지는 궁극적이고 영원한 안식을 기리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시기가 유대인들에게는 노예상태를 벗고 이집트를 탈출한 대 구원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 시기입니다. 이 유월절 시기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성서가 예수님을 유월절 때 희생되는 어린양 또는 희생염소로 본다는 점입니다. 이집트에서 있었던 첫 번째 유월절 때 히브리인들이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 죽음을 면했던 역사적 사건에 기초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피 흘림을 인류를 궁극적인 죽음, 영원한 죽음, 지옥의 형벌에서 건지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양을 잡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거나 혹은 그 다음 날 곧 무교절 첫날 오후 희생제사 드리는 시간에 운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의 목적과 사명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웅변해 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첫 번째 유월절 사건이 히브리민족의 대 구원사건이었다면, 예수님의 유월절 십자가사건은 히브리민족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대대적인 구원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유월절 제3일째 날이란 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 탈출직후에 이뤄진 바로의 추격을 뿌리치고 죽음의 바다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넌 사건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가진 사단의 추격을 뿌리치고 죽음직후에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목적과 사명이 인류에게 죽음이란 흑암의 터널을 지나게 한 후에는 빛과 생명의 세계인 구원의 해변에 도달하게 한다는 점을 웅변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는 천문학자들이 예수님이 실제로 탄생하신 때를 유월절 시기로 본다는 점입니다. 미국 인디애나주 소재 노트르담대학교 그랜트 매튜스(Grant Matthews) 천체물리학 교수는 지난 (2007년 12월) 21일 신약성서 마태복음에 언급된 동방의 별빛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재현시키며 기원전 6년 4월 17일 태양, 목성, 달, 토성이 양의 별자리(Aries)에서 정렬하면서 빚어진 현상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때 금성과 화성이 이웃 별자리에 위치하였었고, 두 달 앞선 동년 2월 20일에는 화성, 목성, 토성이 물고기 별자리에서 정렬하였습니다. 베들레헴의 별이 신성이나 혹은 항성진화 마지막 단계에 이른 별에서 뿜어져 나오는 방출 에너지인 초신성이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고, 실제로 가능성이 높은 신성이 ‘Nova Aquilae V603’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신성과 초신성이 재앙의 상징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에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다른 한편, 베들레헴의 별을 저술한 영국의 천문학자 마크 키저는 삼국사기와 중국 전한서의 기록에 무게를 두고 이 별빛을 기원전 5년 초에 독수리 별자리에서 폭발하여 70일 동안 밝은 빛을 낸 신성으로 보았으며, 예수님은 기원전 5년 3-4월경에 태어나셨고, 동방의 박사들은 바빌론이나 더 멀리 떨어진 페르시아 지방의 점성가들이었으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마크 키저는 기원전 6년 4월 17일 양의 별자리에서 펼쳐진 천체정렬현상을 간과하였으나, 기원전 7년과 6년에 물고기 별자리에서 있었던 천체정렬현상들에 대해서는, 동방박사들이 기원전 5년 초에 독수리 별자리에서 폭발한 신성(D0)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유대 땅에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 일련의 현상들로 해석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학자들이 예수님이 기원전 5년 또는 6년 4월경 유월절시기에 태어나셨다는 점에서만큼은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이것 또한 예수님의 탄생목적과 사명이 인류에게 구원을 주기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웅변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밤이 가장 긴 12월 21일 동지가 지난 12월 25일에 지킵니다. 처음 12월 25일자에 크리스마스를 지킨 것은 주후 360년 리베리우스(Liberius/352-366) 감독 때 로마에서였습니다. 이 축제와 날짜가 안디옥 교회에 소개된 것은 380년이었고, 크리소스톰(Chrysostom)이 크리스마스 설교를 행한 것은 386년 12월 25일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자유와 평등의 황금시대를 기념하고, 노예와 어린이들에게 가장 즐거운 휴일이었던 ‘정복되지 않은 태양’을 기념하기 위해서 12월17일에 지켰던 ‘농신제’(農神祭, Saturnalia), 12월 21-22일에 지켰던 ‘인형극제’(Sigillaria), 그밖에 ‘유벤날리아’(Juvenalia)와 ‘동지제’(冬至祭, Brumalia)와 같은 일련의 유사한 이교의 축제들을 기독교적으로 변형시켰거나 재생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이교적인 축제가 기독교에서 가장 큰 축제가 된 것은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인정한 이후 수많은 이교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주후 380년경 기독교가 전 로마제국의 명실상부한 최후의 승자가 되면서부터 이방인들이 즐겨 지키던 축제일이 자연스럽게 기독교적으로 지켜지게 된 것입니다. 이 후에 교부들은 아예 동짓날이 막 지난 12월 25일에, 점차 커지던 어둠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웅적인 일을 새롭게 시작한 정복되지 않은 태양의 탄생일을 의의 태양이시요, 세계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제일로 확정지어 버렸습니다. 4-5세기경부터는 크리소스톰을 위시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실제로 12월 25일에 탄생한 것으로 믿어버렸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역사성이 있든 없든 간에 그 의미에 있어서만큼은 동지 때까지 어둠에 밀리던 태양이 동지이후에는 찬란한 빛으로 어둠의 세력을 정복해 나간다는 뜻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태양은 결코 어둠에 정복당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의의 태양이시요, 인류의 빛이신 예수님의 탄생은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정복당하지 않을 권세를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탄생은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큰 빛을 보이시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비추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는 몇 가지 점에서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두 가지 축일이 모두 탄생일이란 점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께서 갓난아이로 이 땅에 태어나신 날이요, 부활절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날입니다.
둘째는 두 가지 축일이 모두 어둠의 권세를 이긴 날이란 점입니다. 부활절은 사망과 흑암의 권세를 이긴 날이요, 크리스마스는 어둠의 세력에 영원히 정복당하지 않는 의의 태양이시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셋째는 부활절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 미래에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희망의 축제요, 크리스마스는 이미 과거에 우리에게 오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축제라는 점입니다. 이 성스런 날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어둠의 권세를 물리칠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구원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희망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부활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죽고 없는 것 같은 암담한 세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복음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세계에 하나님을 보게 해주는 계시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 능력의 빛이 일평생 여러분의 삶에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구약학의 대가인 미국 트리니티 웨스턴 대학교(Trinity Western University))의 피터 프린트 박사(Peter Flint, Ph.D.)는 “종교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도올 김용옥의 물음에 “땅과 하늘의 공백을 메우려는 노력”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홍구(鴻溝, 거대한 구덩이)가 있는데, 그 도랑을 불교인들은 큰 깨달음(大覺)을 통해서 넘고, 유교를 믿는 이들은 사랑과 의(仁義)를 통해서 넘지만, 기독교인들은 오직 예수만을 통해서 넘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무엇을 통해서 이 거대한 구덩이를 뛰어 넘어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계시의 빛, 진리의 빛, 생명의 빛으로 설명되는 ‘큰 빛’입니다. 이 빛이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췄다는 것이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한 가지 의미입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보면, 어느 날 용감한 노예 한명이 쇠고랑을 풀고, 길고 어두운 동굴을 벗어나서 빛과 소리가 들리는 입구 쪽을 향해서 힘차게 돌진해갑니다. 그러나 엄습해오는 두려움과 입구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강한 빛 때문에 그는 눈을 뜰 수가 없었고, 떠나온 동굴 속 깊은 옛 광장에로 되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서 용감한 노예는 끝내 동굴의 입구에 도달하여 찬란한 태양과 바깥 세계의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게 됩니다. 물론 처음엔 유쾌하거나 황홀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의 오관의 감각과 정신적 혼란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예는 평생 알지 못했던 밝은 광명의 세계를 발견한 후에는 동료들에게 돌아가 자신이 본 세상을 말해주면서 함께 탈출할 것을 권하지만, 동료 노예들로부터 비웃음만 받고 질서를 어지럽히고 기만한다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됩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단 한 사람도 이 ‘큰 빛’에 관한 복음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동굴에 갇힌 노예, 어둠의 노예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단 한 사람도 우리가 전하는 이 ‘큰 빛’에 관한 복음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동굴에 갇힌 노예, 어둠의 노예들에 실족하여 넘어지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용감한 노예처럼 ‘큰 빛이신 예수님’을 향해서 어떤 난관과 어려움이 앞을 막더라도 이를 뛰어넘어 달려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끝내는 찬란한 태양이 광활한 대지를 내리쬐는 미지의 세계를 가슴에 품기를 축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어떤 사람이 이런 지적을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메리’ 곧 즐거움에 초점을 맞춰서 성탄절을 지켜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크리스마스’ 곧 주님의 탄생예배에 초점을 맞추자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상업주의에 매몰되어 너나없이 즐거움을 추구하다보니까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가 퇴색되어간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 탄생이 주는 의미는 매우 다양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서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와 안식, 흑암과 혼돈과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구원과 부활, 빛과 질서와 생명과 해방과 자유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한꺼번에 다 설명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이 실제로 탄생했던 유월절 시기와 주후 4세기 말부터 잘못 지켜온 전통적인 크리스마스시기에 얽힌 의미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큰 축일은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입니다.
부활절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3월 20일 춘분이 지난 다음, 보름달이 뜬 다음 주일에 지킵니다. 이때부터는 낮이 밤보다 길어집니다. 빛이 비치는 낮 시간이 밤보다 점차 길어집니다. 빛이 어둠을 정복하는 시기입니다. 생명이 죽음을 정복하는 시기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께서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큰 빛을 보이시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비추신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부활은 무덤이라는 흑암과 혼돈과 죽음의 세계를 이기고 빛과 질서와 생명의 세계로 옮겨진 것을 말합니다. 부활은 어둠을 이긴 것이고, 혼돈을 이긴 것이고, 죽음을 이긴 것입니다. 우리가 노동으로부터 쉼을 강조하는 ‘제칠 안식일’ 즉 토요일을 지키지 않고, 예수님께서 무덤을 박차고 나오신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을 지키는 이유는 육체노동을 마치고 잠시 쉬는 일시적이고 육체적인 안식개념을 버리고, 무덤의 상황, 즉 흑암과 혼돈과 죽음의 상황을 박차고 일어선 부활을 통해 얻어지는 궁극적이고 영원한 안식을 기리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시기가 유대인들에게는 노예상태를 벗고 이집트를 탈출한 대 구원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 시기입니다. 이 유월절 시기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성서가 예수님을 유월절 때 희생되는 어린양 또는 희생염소로 본다는 점입니다. 이집트에서 있었던 첫 번째 유월절 때 히브리인들이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 죽음을 면했던 역사적 사건에 기초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피 흘림을 인류를 궁극적인 죽음, 영원한 죽음, 지옥의 형벌에서 건지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양을 잡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거나 혹은 그 다음 날 곧 무교절 첫날 오후 희생제사 드리는 시간에 운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의 목적과 사명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웅변해 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첫 번째 유월절 사건이 히브리민족의 대 구원사건이었다면, 예수님의 유월절 십자가사건은 히브리민족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대대적인 구원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유월절 제3일째 날이란 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 탈출직후에 이뤄진 바로의 추격을 뿌리치고 죽음의 바다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넌 사건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가진 사단의 추격을 뿌리치고 죽음직후에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목적과 사명이 인류에게 죽음이란 흑암의 터널을 지나게 한 후에는 빛과 생명의 세계인 구원의 해변에 도달하게 한다는 점을 웅변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는 천문학자들이 예수님이 실제로 탄생하신 때를 유월절 시기로 본다는 점입니다. 미국 인디애나주 소재 노트르담대학교 그랜트 매튜스(Grant Matthews) 천체물리학 교수는 지난 (2007년 12월) 21일 신약성서 마태복음에 언급된 동방의 별빛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재현시키며 기원전 6년 4월 17일 태양, 목성, 달, 토성이 양의 별자리(Aries)에서 정렬하면서 빚어진 현상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때 금성과 화성이 이웃 별자리에 위치하였었고, 두 달 앞선 동년 2월 20일에는 화성, 목성, 토성이 물고기 별자리에서 정렬하였습니다. 베들레헴의 별이 신성이나 혹은 항성진화 마지막 단계에 이른 별에서 뿜어져 나오는 방출 에너지인 초신성이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고, 실제로 가능성이 높은 신성이 ‘Nova Aquilae V603’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신성과 초신성이 재앙의 상징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에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다른 한편, 베들레헴의 별을 저술한 영국의 천문학자 마크 키저는 삼국사기와 중국 전한서의 기록에 무게를 두고 이 별빛을 기원전 5년 초에 독수리 별자리에서 폭발하여 70일 동안 밝은 빛을 낸 신성으로 보았으며, 예수님은 기원전 5년 3-4월경에 태어나셨고, 동방의 박사들은 바빌론이나 더 멀리 떨어진 페르시아 지방의 점성가들이었으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마크 키저는 기원전 6년 4월 17일 양의 별자리에서 펼쳐진 천체정렬현상을 간과하였으나, 기원전 7년과 6년에 물고기 별자리에서 있었던 천체정렬현상들에 대해서는, 동방박사들이 기원전 5년 초에 독수리 별자리에서 폭발한 신성(D0)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유대 땅에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 일련의 현상들로 해석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학자들이 예수님이 기원전 5년 또는 6년 4월경 유월절시기에 태어나셨다는 점에서만큼은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이것 또한 예수님의 탄생목적과 사명이 인류에게 구원을 주기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웅변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밤이 가장 긴 12월 21일 동지가 지난 12월 25일에 지킵니다. 처음 12월 25일자에 크리스마스를 지킨 것은 주후 360년 리베리우스(Liberius/352-366) 감독 때 로마에서였습니다. 이 축제와 날짜가 안디옥 교회에 소개된 것은 380년이었고, 크리소스톰(Chrysostom)이 크리스마스 설교를 행한 것은 386년 12월 25일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자유와 평등의 황금시대를 기념하고, 노예와 어린이들에게 가장 즐거운 휴일이었던 ‘정복되지 않은 태양’을 기념하기 위해서 12월17일에 지켰던 ‘농신제’(農神祭, Saturnalia), 12월 21-22일에 지켰던 ‘인형극제’(Sigillaria), 그밖에 ‘유벤날리아’(Juvenalia)와 ‘동지제’(冬至祭, Brumalia)와 같은 일련의 유사한 이교의 축제들을 기독교적으로 변형시켰거나 재생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이교적인 축제가 기독교에서 가장 큰 축제가 된 것은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인정한 이후 수많은 이교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주후 380년경 기독교가 전 로마제국의 명실상부한 최후의 승자가 되면서부터 이방인들이 즐겨 지키던 축제일이 자연스럽게 기독교적으로 지켜지게 된 것입니다. 이 후에 교부들은 아예 동짓날이 막 지난 12월 25일에, 점차 커지던 어둠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웅적인 일을 새롭게 시작한 정복되지 않은 태양의 탄생일을 의의 태양이시요, 세계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제일로 확정지어 버렸습니다. 4-5세기경부터는 크리소스톰을 위시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실제로 12월 25일에 탄생한 것으로 믿어버렸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역사성이 있든 없든 간에 그 의미에 있어서만큼은 동지 때까지 어둠에 밀리던 태양이 동지이후에는 찬란한 빛으로 어둠의 세력을 정복해 나간다는 뜻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태양은 결코 어둠에 정복당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의의 태양이시요, 인류의 빛이신 예수님의 탄생은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정복당하지 않을 권세를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탄생은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큰 빛을 보이시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비추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는 몇 가지 점에서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두 가지 축일이 모두 탄생일이란 점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께서 갓난아이로 이 땅에 태어나신 날이요, 부활절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날입니다.
둘째는 두 가지 축일이 모두 어둠의 권세를 이긴 날이란 점입니다. 부활절은 사망과 흑암의 권세를 이긴 날이요, 크리스마스는 어둠의 세력에 영원히 정복당하지 않는 의의 태양이시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셋째는 부활절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 미래에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희망의 축제요, 크리스마스는 이미 과거에 우리에게 오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축제라는 점입니다. 이 성스런 날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어둠의 권세를 물리칠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구원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희망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부활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죽고 없는 것 같은 암담한 세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복음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세계에 하나님을 보게 해주는 계시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 능력의 빛이 일평생 여러분의 삶에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구약학의 대가인 미국 트리니티 웨스턴 대학교(Trinity Western University))의 피터 프린트 박사(Peter Flint, Ph.D.)는 “종교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도올 김용옥의 물음에 “땅과 하늘의 공백을 메우려는 노력”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홍구(鴻溝, 거대한 구덩이)가 있는데, 그 도랑을 불교인들은 큰 깨달음(大覺)을 통해서 넘고, 유교를 믿는 이들은 사랑과 의(仁義)를 통해서 넘지만, 기독교인들은 오직 예수만을 통해서 넘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무엇을 통해서 이 거대한 구덩이를 뛰어 넘어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계시의 빛, 진리의 빛, 생명의 빛으로 설명되는 ‘큰 빛’입니다. 이 빛이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췄다는 것이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한 가지 의미입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보면, 어느 날 용감한 노예 한명이 쇠고랑을 풀고, 길고 어두운 동굴을 벗어나서 빛과 소리가 들리는 입구 쪽을 향해서 힘차게 돌진해갑니다. 그러나 엄습해오는 두려움과 입구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강한 빛 때문에 그는 눈을 뜰 수가 없었고, 떠나온 동굴 속 깊은 옛 광장에로 되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서 용감한 노예는 끝내 동굴의 입구에 도달하여 찬란한 태양과 바깥 세계의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게 됩니다. 물론 처음엔 유쾌하거나 황홀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의 오관의 감각과 정신적 혼란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예는 평생 알지 못했던 밝은 광명의 세계를 발견한 후에는 동료들에게 돌아가 자신이 본 세상을 말해주면서 함께 탈출할 것을 권하지만, 동료 노예들로부터 비웃음만 받고 질서를 어지럽히고 기만한다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됩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단 한 사람도 이 ‘큰 빛’에 관한 복음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동굴에 갇힌 노예, 어둠의 노예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단 한 사람도 우리가 전하는 이 ‘큰 빛’에 관한 복음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동굴에 갇힌 노예, 어둠의 노예들에 실족하여 넘어지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용감한 노예처럼 ‘큰 빛이신 예수님’을 향해서 어떤 난관과 어려움이 앞을 막더라도 이를 뛰어넘어 달려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끝내는 찬란한 태양이 광활한 대지를 내리쬐는 미지의 세계를 가슴에 품기를 축원합니다.
- 이전글 앞문을 닫고 뒷문을 여시는 하나님(고전 10:13) 07.12.26
- 다음글 참 안식을 주시는 예수(히 4:1-16) 07.12.1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