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히 4:14-5:14)
본문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히 4:14-5:14)
히브리서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본래의 의미와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꼭 짚고 넘어가야할 점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히브리서가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을 위한 글이었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들은 가족과 친지와 공동체의 구성원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목숨까지 위협을 당했을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마음속에 적잖은 회의와 그들의 개종이 과연 그와 같은 핍박을 감내할 만큼 가치가 있느냐라는 심각한 의문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자”(12:1-2)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택해야할 “새롭고 산길”(10:20)이라고 말합니다.
둘째는 유대인들에게는 다른 민족에게 없는 독특한 약속들이 있었습니다. 성전예배중심의 신정국가회복,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세계통합과 통치와 같은 기대들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유대인들의 이런 기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유한하고 한시적인 광야시대의 아론이나 왕국시대의 사독 계열이 아닌 무한하고 영원한 멜기세덱 계열에서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희망과 참 안식은 성전예배중심의 신정국가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세계통합과 통치에 있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있음을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몇 가지 점을 기준삼아서 히브리서 4장 14절부터 5장 14절까지의 말씀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에서 저자는 예수님을 아론이나 사독 계열과는 차원이 다른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소개하면서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는 분이시고,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를 범하지 않았던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확고히 믿고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자비를 입고, 은혜를 받아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제때에 받을 수 있는 도움’하면 생각나는 것이 119소방대 겸 구조대인데요, 소방차나 앰뷸런스의 출동이 생각보다 더디다는 것을 아시면,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항상 출동준비를 갖추고 있는 119구조대라 할지라도 제때에 필요한 도움을 주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강동성심병원 응급의학과 유지영 교수는 “심장이 멎은 뒤 4-5분이 지나면 뇌손상이 온다.”고 말하면서 “병원으로 급히 옮기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최초 발견자의 응급처치이다.”고 했습니다. 한국응급구조학회에 따르면, 심장이상으로 갑자기 사망하는 사람이 일 년에 3만 명 정도라고 하는데, 생존자는 100명 가운데 고작 2-3명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제때에 도움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시간이 생사를 가른다는 말인데, 구조차량이 제때에 올 수 없는 상황, 그래서 제때에 받아야할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지난주(2008년 1월 7일) 50여명의 사상자를 낸 경기도 이천 냉동 창고 화재사건에서 불 수 있듯이 일단 불이나면 그 피해가 대단합니다. 얼마 전 집근처 밭에서 제법 큰불이 나서 119에 연락을 취했는데, 소방차가 도착해서 진압준비에까지 걸리는 시간을 재보니까, 일단 불이나면, 최초 발견자가 그 불을 꺼야지, 끄지 못하고 번지는 상황이 발생되면, 소방차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당 부분이 타버려서 뼈대와 재만 남게 되고, 소방소의 역할은 2차 화재를 차단하는 정도에서 끝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때에 도움을 받거나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게 한 작은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상의 문제에서 뿐 아니라, 영적인 문제나 정신적인 문제와 같은 궁극적인 문제들에 있어서도 제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4장 14-16절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우리와 같이 고달픈 인생살이를 경험하신 예수님을 확고히 믿고, 그분을 통해서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자비를 입고, 은혜를 받아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는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대제사장은 때로는 일인자, 때로는 이인자로 군림했던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계급입니다. 모세시대에 아론은 이인자의 위치에 있었고, 왕정시대에 대제사장 또한 이인자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이 천 년 전 예수님당시 로마 총독이 유다 도를 통치하던 시대에는 로마총독을 뺀 유대민족 안에서는 일인자였습니다.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최고의 직책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막강한 대제사장, 그것도 평범한 대제사장이 아니라,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모든 면에서 인간이셨지만,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리 죄를 범지 않으셨으며, 인간이 겪는 경험들을 다 겪으셨기 때문에 인간의 형편을 동정할 수 있으시며, 하나님과 인간을 엮는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을 통해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자비를 입고, 은혜를 받아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뒤를 돌아본다는데 있었습니다. 과거 모세시대에 히브리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간을 사막에서 머물렀는데, 그 기간이 그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의 기간이었고, 뜨거운 풀무에 들어간 원석처럼 단련 받는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이 그들에게는 배고프고 목말랐던 기간이었고, 모래바람 맞으며 발 부르트게 걷던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이 그들에게는 집 한 칸 없이 거적 말아 짊어지고 사막을 떠돌던 기간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몹시 힘들고 고달픈 고난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을 그리워하였고, 참혹했던 그 때의 생활을 동경하여 되돌아가려고까지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사막에서 겪었던 생활은 잠시 받는 고난이었지, 수탈과 착취와 탄압을 당하는 생활은 아니었습니다. 현재보다 더 잘살고 현재보다 더 행복한 삶을 위해서 잠시 받는 시련이었지, 그것이 결코 불행이거나 재앙은 아니었는데도, 히브리인들은 당대의 고난이 장차 올 영광에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장차 올 중하고 영원한 영광에 비해서 당대의 고난이 가볍고 짧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 것을 알만한 계시와 지혜의 영이 없었고, 마음의 눈이 열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정탐꾼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뒤를 돌아다보았던 10명의 족장들은 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져 부정과 불가능의 동굴 속 어두운 세계에 갇혔고, 미래지향적이었던 갈렙과 여호수아는 긍정과 가능의 밝고 환한 동굴바깥 세계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을 탈출한 죄수노예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유혹, 곧 도망쳐 나온 동굴 속 광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유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끝내 그 유혹을 이기고 동굴 바깥으로 나왔고, 비로소 그는 넓고 환한 세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정과 불가능의 동굴 속 어두운 세계를 탈출하여 긍정과 가능의 밝고 환한 동굴바깥 세계를 맛보았던 사람들이 동굴 속의 삶을 동경하여 부정과 불가능의 동굴 속 어두운 세계로 다시 되돌아가려고 한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던 유대인들 가운데 이런 어리석은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떠나온 유대교를 못내 잊지 못하고 자꾸만 그곳을 향해서 뒤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큰 불행인가를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불행은 마치 롯의 아내가 떠나온 소돔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뒤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당부를 잊고 뒤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던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전진해야할 성도들에게 신신당부합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마라. 뒤를 돌아보지 마라. 떠나온 세계, 떠나온 놀이와 문화, 떠나온 습관, 떠나온 지식과 종교에 대한 향수를 버려라. 그것들은 멸망으로 이끄는 길이다. 그 길을 돌아보지 마라.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하라. 그는 우리를 영원히 살릴 새롭고 산길이다. 그는 우리를 진정으로 위하실 하늘에 오르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고 소개합니다.
류시화 시에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가 있습니다. 그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과거는 과거일 뿐 과거에 얽매이지 맙시다. 과거의 세계에 얽매이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미래지향적이시고 도전하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힘차게 전진합시다.
5장 11-14절에서 저자는 뒤를 돌아다보는 자들을 일컬어 ‘듣는 것이 둔한 자들’ 곧 ‘더디 배우는 자들’(Those who are slow to learn)이라고 불렀습니다. 배움의 시간으로 봐서는 뒤를 돌아보는 자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쳐야할 자들이,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할 자들이 되었고, 갓난아이처럼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할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일 년에 단 한 차례 대속죄일 때만 입실이 허용되는 지성소에 들어가 자기 자신과 온 백성을 위해서 속죄 제사를 집례 하는 것입니다.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은 어리석은 백성들에 대하여 동정할 줄 알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했지만, 그는 인간의 혈통을 지닌 자였기 때문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 제사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 제사를 드려야 했던 연약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혈통을 지니셨을 뿐이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지닌 영원한 멜기세덱 계통을 따른 제사장이셨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한 속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신성을 지닌 분이셨지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며, 이 땅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올렸고, 또 하나님은 그분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그 기도와 간구들을 다 들어 응답하셨다고 말합니다. 또 그가 비록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지닌 분이셨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고 죽기까지 순종함으로써 영원한 멜기세덱 계통을 따라 온전하고 완벽한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본받아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멜기세덱 계통은 아론 계통과 어떻게 다를까요?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첫째, 멜기세덱은 아론보다 먼저 된 자입니다. 아론은 모세 때의 인물이지만, 멜기세덱은 이미 아브라함 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둘째, 멜기세덱은 아론보다 높습니다. 아론은 인성뿐이지만, 멜기세덱은 인성과 신성을 함께 지녔기 때문입니다.
셋째, 멜기세덱은 레위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습니다.
넷째, 멜기세덱은 족보나 출생과 사망 년 월일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항상’(히 7:3) 그 직무를 수행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음을 맛보아야할 유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후손이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5장이 우리에게 소개한 예수님은 아론도 멜기세덱도 아닌, 그 모두의 특성을 지닌, 그 모두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아들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말은 멜기세덱과 같은 유형의 대제사장이란 뜻이지, 멜기세덱의 후손이란 뜻이 아닙니다. 멜기세덱에게는 그의 대를 이를 후손이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예수님과 비슷한 점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존재의 시작과 끝이 없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자였다(히 7:3)고 했습니다.
둘째, 제사장이자 왕이었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자 살렘 왕이었다(히 7:1; 창 14:18)고 했습니다.
셋째, 레위인 출신의 제사장이 아니라(히 7:14)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된 대제사장이란 점에서 같습니다. 멜기세덱은 레위 족속 이전의 인물로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된 자입니다(히 7:1).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제때에 필요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예수님께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둘째, ‘뒤를 돌아다보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부정과 불가능의 동굴 속 어두운 세계를 탈출한 빛의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다 긍정과 가능의 밝고 환한 동굴바깥 세계를 맛보았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2008년 한 해는 더 이상 부정과 불가능의 동굴 속 어두운 세계로 되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2008년은 예수님께 집중해서 그분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복된 해로 만듭시다.
히브리서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본래의 의미와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꼭 짚고 넘어가야할 점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히브리서가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을 위한 글이었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들은 가족과 친지와 공동체의 구성원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목숨까지 위협을 당했을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마음속에 적잖은 회의와 그들의 개종이 과연 그와 같은 핍박을 감내할 만큼 가치가 있느냐라는 심각한 의문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자”(12:1-2)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택해야할 “새롭고 산길”(10:20)이라고 말합니다.
둘째는 유대인들에게는 다른 민족에게 없는 독특한 약속들이 있었습니다. 성전예배중심의 신정국가회복,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세계통합과 통치와 같은 기대들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유대인들의 이런 기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유한하고 한시적인 광야시대의 아론이나 왕국시대의 사독 계열이 아닌 무한하고 영원한 멜기세덱 계열에서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희망과 참 안식은 성전예배중심의 신정국가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세계통합과 통치에 있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있음을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몇 가지 점을 기준삼아서 히브리서 4장 14절부터 5장 14절까지의 말씀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에서 저자는 예수님을 아론이나 사독 계열과는 차원이 다른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소개하면서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는 분이시고,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를 범하지 않았던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확고히 믿고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자비를 입고, 은혜를 받아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제때에 받을 수 있는 도움’하면 생각나는 것이 119소방대 겸 구조대인데요, 소방차나 앰뷸런스의 출동이 생각보다 더디다는 것을 아시면,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항상 출동준비를 갖추고 있는 119구조대라 할지라도 제때에 필요한 도움을 주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강동성심병원 응급의학과 유지영 교수는 “심장이 멎은 뒤 4-5분이 지나면 뇌손상이 온다.”고 말하면서 “병원으로 급히 옮기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최초 발견자의 응급처치이다.”고 했습니다. 한국응급구조학회에 따르면, 심장이상으로 갑자기 사망하는 사람이 일 년에 3만 명 정도라고 하는데, 생존자는 100명 가운데 고작 2-3명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제때에 도움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시간이 생사를 가른다는 말인데, 구조차량이 제때에 올 수 없는 상황, 그래서 제때에 받아야할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지난주(2008년 1월 7일) 50여명의 사상자를 낸 경기도 이천 냉동 창고 화재사건에서 불 수 있듯이 일단 불이나면 그 피해가 대단합니다. 얼마 전 집근처 밭에서 제법 큰불이 나서 119에 연락을 취했는데, 소방차가 도착해서 진압준비에까지 걸리는 시간을 재보니까, 일단 불이나면, 최초 발견자가 그 불을 꺼야지, 끄지 못하고 번지는 상황이 발생되면, 소방차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당 부분이 타버려서 뼈대와 재만 남게 되고, 소방소의 역할은 2차 화재를 차단하는 정도에서 끝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때에 도움을 받거나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게 한 작은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상의 문제에서 뿐 아니라, 영적인 문제나 정신적인 문제와 같은 궁극적인 문제들에 있어서도 제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4장 14-16절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우리와 같이 고달픈 인생살이를 경험하신 예수님을 확고히 믿고, 그분을 통해서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자비를 입고, 은혜를 받아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는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대제사장은 때로는 일인자, 때로는 이인자로 군림했던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계급입니다. 모세시대에 아론은 이인자의 위치에 있었고, 왕정시대에 대제사장 또한 이인자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이 천 년 전 예수님당시 로마 총독이 유다 도를 통치하던 시대에는 로마총독을 뺀 유대민족 안에서는 일인자였습니다.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최고의 직책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막강한 대제사장, 그것도 평범한 대제사장이 아니라,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모든 면에서 인간이셨지만,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리 죄를 범지 않으셨으며, 인간이 겪는 경험들을 다 겪으셨기 때문에 인간의 형편을 동정할 수 있으시며, 하나님과 인간을 엮는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을 통해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자비를 입고, 은혜를 받아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뒤를 돌아본다는데 있었습니다. 과거 모세시대에 히브리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간을 사막에서 머물렀는데, 그 기간이 그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의 기간이었고, 뜨거운 풀무에 들어간 원석처럼 단련 받는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이 그들에게는 배고프고 목말랐던 기간이었고, 모래바람 맞으며 발 부르트게 걷던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이 그들에게는 집 한 칸 없이 거적 말아 짊어지고 사막을 떠돌던 기간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몹시 힘들고 고달픈 고난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을 그리워하였고, 참혹했던 그 때의 생활을 동경하여 되돌아가려고까지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사막에서 겪었던 생활은 잠시 받는 고난이었지, 수탈과 착취와 탄압을 당하는 생활은 아니었습니다. 현재보다 더 잘살고 현재보다 더 행복한 삶을 위해서 잠시 받는 시련이었지, 그것이 결코 불행이거나 재앙은 아니었는데도, 히브리인들은 당대의 고난이 장차 올 영광에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장차 올 중하고 영원한 영광에 비해서 당대의 고난이 가볍고 짧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 것을 알만한 계시와 지혜의 영이 없었고, 마음의 눈이 열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정탐꾼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뒤를 돌아다보았던 10명의 족장들은 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져 부정과 불가능의 동굴 속 어두운 세계에 갇혔고, 미래지향적이었던 갈렙과 여호수아는 긍정과 가능의 밝고 환한 동굴바깥 세계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을 탈출한 죄수노예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유혹, 곧 도망쳐 나온 동굴 속 광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유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끝내 그 유혹을 이기고 동굴 바깥으로 나왔고, 비로소 그는 넓고 환한 세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정과 불가능의 동굴 속 어두운 세계를 탈출하여 긍정과 가능의 밝고 환한 동굴바깥 세계를 맛보았던 사람들이 동굴 속의 삶을 동경하여 부정과 불가능의 동굴 속 어두운 세계로 다시 되돌아가려고 한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던 유대인들 가운데 이런 어리석은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떠나온 유대교를 못내 잊지 못하고 자꾸만 그곳을 향해서 뒤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큰 불행인가를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불행은 마치 롯의 아내가 떠나온 소돔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뒤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당부를 잊고 뒤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던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전진해야할 성도들에게 신신당부합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마라. 뒤를 돌아보지 마라. 떠나온 세계, 떠나온 놀이와 문화, 떠나온 습관, 떠나온 지식과 종교에 대한 향수를 버려라. 그것들은 멸망으로 이끄는 길이다. 그 길을 돌아보지 마라.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하라. 그는 우리를 영원히 살릴 새롭고 산길이다. 그는 우리를 진정으로 위하실 하늘에 오르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고 소개합니다.
류시화 시에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가 있습니다. 그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과거는 과거일 뿐 과거에 얽매이지 맙시다. 과거의 세계에 얽매이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미래지향적이시고 도전하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힘차게 전진합시다.
5장 11-14절에서 저자는 뒤를 돌아다보는 자들을 일컬어 ‘듣는 것이 둔한 자들’ 곧 ‘더디 배우는 자들’(Those who are slow to learn)이라고 불렀습니다. 배움의 시간으로 봐서는 뒤를 돌아보는 자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쳐야할 자들이,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할 자들이 되었고, 갓난아이처럼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할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일 년에 단 한 차례 대속죄일 때만 입실이 허용되는 지성소에 들어가 자기 자신과 온 백성을 위해서 속죄 제사를 집례 하는 것입니다.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은 어리석은 백성들에 대하여 동정할 줄 알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했지만, 그는 인간의 혈통을 지닌 자였기 때문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 제사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 제사를 드려야 했던 연약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혈통을 지니셨을 뿐이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지닌 영원한 멜기세덱 계통을 따른 제사장이셨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한 속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신성을 지닌 분이셨지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며, 이 땅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올렸고, 또 하나님은 그분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그 기도와 간구들을 다 들어 응답하셨다고 말합니다. 또 그가 비록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지닌 분이셨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고 죽기까지 순종함으로써 영원한 멜기세덱 계통을 따라 온전하고 완벽한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본받아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멜기세덱 계통은 아론 계통과 어떻게 다를까요?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첫째, 멜기세덱은 아론보다 먼저 된 자입니다. 아론은 모세 때의 인물이지만, 멜기세덱은 이미 아브라함 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둘째, 멜기세덱은 아론보다 높습니다. 아론은 인성뿐이지만, 멜기세덱은 인성과 신성을 함께 지녔기 때문입니다.
셋째, 멜기세덱은 레위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습니다.
넷째, 멜기세덱은 족보나 출생과 사망 년 월일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항상’(히 7:3) 그 직무를 수행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음을 맛보아야할 유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후손이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5장이 우리에게 소개한 예수님은 아론도 멜기세덱도 아닌, 그 모두의 특성을 지닌, 그 모두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아들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말은 멜기세덱과 같은 유형의 대제사장이란 뜻이지, 멜기세덱의 후손이란 뜻이 아닙니다. 멜기세덱에게는 그의 대를 이를 후손이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예수님과 비슷한 점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존재의 시작과 끝이 없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자였다(히 7:3)고 했습니다.
둘째, 제사장이자 왕이었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자 살렘 왕이었다(히 7:1; 창 14:18)고 했습니다.
셋째, 레위인 출신의 제사장이 아니라(히 7:14)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된 대제사장이란 점에서 같습니다. 멜기세덱은 레위 족속 이전의 인물로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된 자입니다(히 7:1).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제때에 필요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예수님께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둘째, ‘뒤를 돌아다보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부정과 불가능의 동굴 속 어두운 세계를 탈출한 빛의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다 긍정과 가능의 밝고 환한 동굴바깥 세계를 맛보았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2008년 한 해는 더 이상 부정과 불가능의 동굴 속 어두운 세계로 되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2008년은 예수님께 집중해서 그분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복된 해로 만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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