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보다 높이 되신 예수(히 7:1-28, 창 14:18-20)
본문
하늘보다 높이 되신 예수(히 7:1-28, 창 14:18-20) 히브리서 7장은 창세기 14장에 소개된 ‘멜기세덱’을 예수님과 관련된 인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을 예수님의 모형으로, 예수님을 멜기세덱의 실체로 본 것입니다. 창세기 14장 18-20절에 적힌 멜기세덱을 보면, 첫째로 그는 아브라함의 일행을 맞이해서 그들을 위한 감사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떡과 포도주로 상징되는 주의 만찬이 있었고, 설교와 축복기도가 있었으며, 예배 자들이 드리는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둘째로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말 번역의 ‘멜기세덱’(Melchizedek)에서 ‘멜기’는 ‘왕’을 뜻하는 ‘말키’(Melchi)이고, ‘세덱’은 ‘의’를 뜻하는 ‘체데크’(zedek)입니다. 따라서 이 이름의 뜻은 ‘의의 왕’ 또는 ‘나의 왕은 의롭다’가 됩니다. 또 ‘살렘’(Salem)은 문자적으로 ‘평강’을 뜻하고, ‘평강의 도시’ 예루살렘(Yerushalayim)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평강의 왕’ 혹은 ‘예루살렘의 왕’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제정일치시대였던 고대사회에서는 왕이 곧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살렘의 왕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과 같은 하나님, 곧 지극히 높으신 야훼를 섬긴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은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이삭을 바치기 위해서 찾아간 산이 모리아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리아 산(Mt. Moriah)이 다름 아닌 ‘살렘의 도시,’ 곧 예루살렘에서 가장 신성하고 거룩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그곳 살렘의 왕이자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을 찾은 것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이 모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야훼를 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멜기세덱의 어떤 점들이 히브리인들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한 것인지를 몇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멜기세덱은 히브리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 때부터 이미 ‘의와 평강의 왕’이신 메시아의 모형입니다. 둘째,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와 방불한 자였습니다. 여기서 ‘방불하다’는 뜻은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방불하다’는 것은 멜기세덱의 신분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직책, 곧 ‘의와 평강의 왕’이란 점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셋째, 멜기세덱은 무시간적이며,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모형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족보를 중시했습니다. 따라서 구약성서에는 족보가 많습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족보는 일체 언급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3절처럼,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었던” 자였습니다. 넷째, 멜기세덱은 히브리인의 시조인 아브라함한테서 십일조를 받았고, 그를 위해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그를 위해 복을 빌었다는 점에서 아브라함보다 우월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백성들한테서 십일조를 받았던 레위인 출신의 제사장들보다도 우월하였습니다. 다섯째, 멜기세덱은, 8절처럼, 십일조를 받았으나 죽을 운명을 타고난 레위인과 달리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레위인 제사장들보다 우월하였습니다. 이런 점들을 근거로 히브리서 저자는 4절에서 멜기세덱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런 멜기세덱조차도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형에 불과했다는 것이 히브리서 7장의 설명입니다. 저자가 멜기세덱을 언급하여 예수님을 연결시킨 이유는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규정된 레위 제사장직만을 유일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위인 제사장 직책만이 유일하고 적법하다는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은 레위인과 전혀 무관한 멜기세덱이 히브리 민족의 출생이전에 이미 적법하고 영원하고 온전한 제사장으로 세움을 입었고, 그 계통을 따라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을 하나님께서 세우셨는데, 그분이 바로 하늘보다 높이 되신 예수님이시란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대로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맡아한다고 생각되었던 성막시절의 대제사장은 흠이 많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먼저 자기 자신의 회개와 정결을 위해서 제물을 바쳐야 했던 불완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레위 제사장들보다 뛰어난 멜기세덱의 실체로서, 19절에서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말씀처럼,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확실하게 열어주신 영원하고 온전한 큰 대제사장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개를 근거로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높은 대제사장이신가를 정리를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15절, 예수님은 레위 제사장들보다 훨씬 우월한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제사장이십니다. 둘째, 16절과 18절, 예수님은 육신에 속한 법, 곧 연약하고 무익하고 폐지된 율법을 따르지 않고,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된 대제사장이십니다. 셋째, 17절, 예수님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십니다. 넷째, 20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맹세로 된 제사장이십니다. 다섯째, 21절과 23-24절, 예수님은 영원히 그 직분이 보장된 제사장이십니다. 여섯째, 22절,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시는 제사장이십니다. 일곱째, 25절,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제사장이십니다. 여덟째, 25절, 예수님은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제사장이십니다. 아홉째, 26절, 예수님은 우리에게 합당하신, 곧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제사장이십니다. 열째, 26절, 예수님은 하늘보다 높이 되신 제사장이십니다. 열한 번째, 27절, 예수님은 레위 대제사장들처럼 자기 죄를 위해서 제사를 바쳐야할 필요가 없는 제사장, 곧 백성의 죄만을 위해서 단번에 자기 몸을 드려 제사를 바친 유일무이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열두 번째, 28절, 약점을 가진 율법으로 세워진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의 말씀으로 된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하나님의 아들 제사장이십니다. 우리가 이런 뛰어나신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점이 좋을까요? 첫째, 히브리서 4장 16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긍휼하심과 은혜를 입고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새롭고 산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두려움과 무서움 때문에 한시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을 만큼 답답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점 티끌도 남김없이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빛을 보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서 활짝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길인 은혜와 자비의 길을 그가 기도하고 연구하던 탑방에서 깨닫게 때였습니다. 그때이후로 그는 더 이상 주저하고 두려워하거나 하는 마음 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얻어진 놀라운 힘으로 그는 공룡 같은 가톨릭과 싸워 개혁을 일궈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큰 대제사장이실 뿐 아니라,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대제사장이시며, 우리 죄와 허물을 위해서 단번에 자기 몸을 드려 속죄 제사를 바친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평강을 누리며 사는 것은 물론이고, 더 좋은 언약, 곧 영생의 보증이 되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을 믿으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며 겸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반대로 신을 부정하며 살거나 신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깨지지 못한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잘난 척하고 남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만한 사람이거나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유일신 사상에 도달한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천부적 재능으로 얻은 것보다 한층 더 큰 보물인 기독교 복음을 수용하지 못한 경우를 역사가 토인비는 그들의 업보(네메시스)라고 하였고, 그 업보가 1,878년간이란 세월을 남의 나라에서 집시처럼 떠돌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테바이의 왕비 니오베는 신들에 대한 오만 때문에 돌이 되고 말았고, 천마 페가소스를 붙잡아 타고 괴물 ‘키마이라’를 물리친 벨레로폰은 오만 때문에 ‘방황의 들’에 추락해서 절름발이에 장님까지 되어 세상을 ‘방황‘하다가 쓸쓸하게 죽습니다. 사람에게 ‘재능’이란 날개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고 축복이지만, 경건성을 잃고 자만하면 추락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믿으면, 기도할 때마다 죄와 허물이 큰 나 같은 사람을 용납하시고, 끊임없이 사랑으로 감싸주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은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 만족을 결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은 그 사랑을 결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배신합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배신하고 업신여기고 모함하고 험담합니다. 그래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투쟁적인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사는 신앙인들은 남의 죄와 허물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쉽게 분을 품지 않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성령님께서 자기 자신의 죄와 허물을 먼저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감싸 안으시며 언제나 용납하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품게 되면, 남을 쉽게 정죄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혹은 그 반대로 죄와 허물이 큰 사람을 보게 되면, 먼저 나의 죄와 허물의 크기를 생각하게 되어 오히려 그 사람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게 됩니다. 넷째, 예수님을 믿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들, 사랑하는 가족과 배우자에게조차 숨기고 싶은 비밀들도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제 몸에 흉한 상처가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벌거벗을 수가 있습니다. 그분에게 보인 내 비밀을 그분은 절대로 누설치 않으십니다. 그분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침묵’입니다. 그분은 입이 무겁지만, 마음만은 한없이 넓습니다. 문제가 아무리 태산같이 크더라도 그분은 끌어안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 놓고 그분 앞에서만큼은 벌거벗을 수가 있습니다. 그분 앞에서 자기 자신을 숨기고 가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어차피 그분은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고, 가린다고 가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숨길 수 있고, 가릴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드러내놓고 하소연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거절하지 않고 다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말이 없으시지만, 지긋이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시며, 다 들어주십니다. 다섯째,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나약하고 절망적인 생각은 물론이고, 교만하고 오만한 생각들까지도 떨쳐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엎드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부정적이고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긍정적이고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바꿔 주시고,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히 12:12) 세워주십니다. 눈을 감고 기도에 집중하는 순간 긍정의 말들이 마음속에 단비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눈을 감고 기도에 집중하는 순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할 수 있다는 용기,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단비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몸을 바쳐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25-26절의 말씀처럼,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의 말씀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2008년 한 해 동안 이 예수님에 집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여러분에게 마땅한 대접이 있을 것입니다.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이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면, 그는 결코 돈을 만져볼 수 없습니다. 복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아무런 투자도 없이 복덩이가 굴러들어오기를 기다린다면, 복이 들어오기는커녕 오히려 있던 복도 달아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합당한 노력 없이 어떻게 복을 받겠습니까? 2008년 한 해 동안 충분한 복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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