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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예법과 성막(3)(히 9:1-10, 출 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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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3,783 2008.02.08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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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예법과 성막(3)(히 9:1-10, 출 29장)

신약성서에서 ‘구원’을 뜻하는 개념은 크게 네 가지 입니다. 법정개념인 ‘칭의’와 노예시장개념인 ‘해방’이 있고, 중재개념인 ‘화목’과 보상개념인 ‘속죄’가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성막제사와 관련된 용어는 ‘화목’과 ‘속죄’입니다. 중재에 필요한 제물이 화목제물이고, 피해보상에 필요한 제물이 속죄제물입니다. 이 가운데 화목제물은 자원해서 드리는 제물이기 때문에 ‘선물’의 의미가 강하고, 속죄제물은 피해보상차원에서 의무로 드리기 때문에 강제성이 강합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종류와 방법을 보면, 화목제(和睦祭)와 소제(素祭)는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였고, 속죄제(贖罪祭)와 속건제(贖愆祭/愆=허물)는 의무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네 가지 제사들 가운데 한 가지 제사와 함께 세트(Set)로 드리는 제사가 있었는데, 그것이 번제(燔祭)입니다. 번제는 함께 세트로 드리는 제사, 예를 들어, 속죄제를 번제와 함께 드린다면, 그 속죄제를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을 확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제사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었는데, 화제(火祭), 요제(搖祭), 거제(擧祭), 전제(奠祭)가 있었습니다. 화제(火祭)는 제물을 불에 태우거나 구워서 드리는 제사를 말하고, 요제(搖祭)는 제물을 흔들어서 봉헌하는 제사였습니다. 거제(擧祭)는 제물을 높이 들어서 바치는 것을 말하고, 전제(奠祭)는 포도주, 기름, 피 또는 물을 제물에 부어서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7절에서 자신을 ‘관제’(灌祭)로 드린다는 표현을 씀으로써 ‘전제’의 영적 의미가 ‘헌신’과 ‘순교’라는 점을 밝혀주었습니다. 제물에 물을 붓는 것은 특별한 경우로써 초막절 마지막 날 새해풍년기원예배 때에 쓰였습니다.
번제(燔祭)는 단독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다른 제사와 함께 세트로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번제는 가죽을 제외한 모든 것을 태워 향기로운 냄새가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화제였습니다. 제물은 예배자의 생활형편에 따라 수소, 숫염소, 숫양, 산비둘기 또는 집비둘기 가운데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흠이 없고, 1년 된 수컷이어야 했습니다.
번제 때 제물이 불에 타면서 나는 향기로운 냄새는 하나님의 몫이고, 가죽은 제사장 몫이 됩니다. 그러나 예배자는 번제를 통해서 온전한 헌신과 감사를 하나님게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몫이 없었습니다. 가죽만 취했던 제사장은 번제와 함께 세트로 드리는 소제나 화목제 등을 통해서 필요한 몫을 더 취할 수가 있었습니다.
소제(素祭)는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고운 가루에 올리브유, 유향, 소금을 섞어서 가루로 드리거나 굽거나 부치거나 쪄서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누룩과 꿀은 절대로 섞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기름은 성령님을, 유향은 기도를, 소금은 신실함을, 누룩은 부패를, 꿀은 쾌락을 상징하였습니다. 번제와 마찬가지로 향기로운 냄새가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화제지만, 번제처럼 다 태우지 않고 소량만 상징적으로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자기 몫으로 취했습니다.
소제는 단독제사이기보다는 번제와 함께 드려지는 제사였습니다. ‘공물’의 의미를 지닌 소제는 일반적으로 다른 제물들과 함께 드려졌습니다. 번제를 받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예물입니다. 따라서 제사장은 번제 때 취하지 못한 자신의 몫을 소제물로 대신 받게 됩니다.
화목제(和睦祭)도 소제처럼 자원해서 바치는, 불에 태우는 화제지만, 다 태우지 않고, 내장과 기름만 상징적으로 태웠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상징하기위해서 무교병과 함께 드려졌습니다. 번제와 고운가루로 만든 부침이나 전병이 함께 드려지듯이, 화목제도 무교병과 함께 드려졌습니다. 이는 속죄와 친교의미를 갖는 주의 만찬에서 성도들이 먹고 마시는 포도주와 누룩 없는 마른 빵의 예표이자, 모형이며 그림자였습니다.
화목제의 특징은 예배자에게도 일정한 몫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동물의 가슴은 요제로 흔들고, 오른쪽 뒤 넓적다리는 거제로 높이 쳐든 다음 가죽과 함께 제사장에게 주어지고, 나머지는 예배자가 가져다가 가족친지 또는 이웃들과 함께 그날로 다 먹어야 했고, 먹다 남은 것은 불에 태워야 했습니다. 제사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화목제로 드린 고기는 예배자든, 제사장이든 그것을 결코 혼자서 독식할 수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반드시 제사 드린 바로 그 날에 모두 먹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의무로 드리는 제사에는 속죄제(贖罪祭)와 속건제(贖愆祭/愆=허물)가 있습니다. 범법행위나 죄악을 속(贖)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들입니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제물에 안수해서 제사지내는 사람의 죄를 제물에게 전가시켰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제물이 다릅니다. 속죄제는 사회적 신분에 따라서 수송아지, 숫염소, 암염소나 어린양, 비둘기 두 마리, 고운 가루를 드렸지만, 속건제는 오로지 흠 없는 숫양을 드렸습니다. 속죄제에서 제물에 차별을 둔 이유는 의무제이기 때문에 형편이 어려워 속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속죄제는 부지중에 혹은 실수로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한 제사였고, 속건제는 보상이 가능한 죄, 곧 성물이나 이웃에게 범한 죄에 대하여 바치는 제사였습니다. 속죄제를 정화제사, 속건제를 배상제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속죄제의 경우 범죄자는 반드시 먼저 자기 죄를 인식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사실을 고백한 후에 속죄를 바라는 겸허한 마음으로 속죄제 규례를 따라 하나님께 예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것은 속죄제의 근본정신이 죄에 대해서 철저히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는데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속건제는 하나님 또는 사람에게 과실로 손해를 입혔을 때 그것을 배상함으로써 관계를 정상화하는 제사입니다. 배상의 방법은 끼친 손해에 대해서 5분의 1을 더 제사장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대한 예표이자 모형이며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따르는 형벌을 받음으로써 속죄제를 완성하셨고, 하나님의 모든 요구들을 순종함으로써 속건제를 완성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로써 하나님의 선민이 되었지만,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의 선민이 됩니다. 짐승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피가 믿는 자들의 죄를 대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시며, 중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법과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하나님의 임재와 교제입니다. 죄와 허물을 사함 받고, 해원상생을 위해서 선물과 감사예물을 주고받던 곳이 성막이고, 그 방법을 규정한 것이 성막예법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정의와 평화가 이뤄지는 장소가 성막이었습니다. 성막이 중요했던 것은 그곳이 하나님임재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막위로 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백성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에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만, 성막에서 말하는 임재는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 곧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과 은혜가 집중된 곳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지시와 양식에 따라 세운 성막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고, 그 임재 싸인(sign)이 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모세와 백성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이동을 충실하게 뒤따랐을 때, 그들은 목적지인 가나안 땅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은 사막의 이동성막을 계승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상성막이나 지상성전을 섬긴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섬기시는 곳은 천국성소입니다. 지상성막은 천국성소의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막은 예수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어 세운 교회를 예표 한다는 점에서, 또 하나님의 거처인 천국성소를 예표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갖습니다. 지상성막이든, 교회이든, 천국성소이든, 성막과 성전이 갖는 중요한 상징은 하나님의 임재에 있습니다. 출애굽기 29장 42-46절을 보면, 성막에서 드린 제사 때,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교회는 성막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주시고 말씀하시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맥락에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신성한 곳입니다. 물론 교회가 장소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건물이나 특정장소가 하나님의 임재장소로 여겨졌지만, 신약시대에는 건물이나 장소에 관계없이 성도들의 모임이 하나님의 임재장소로 인식되었습니다.
성막에는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들이 섬기도록 했는데, 이것은 백성이 자기들의 소견대로 사사로이 하나님께 제사하는 부작용을 막고, 제사장의 고유한 업무를 규정함으로써 제사의 성스러움을 유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일의 종사자는 부름을 받고 훈련받아 사명을 수행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성막에서의 제사장들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임재하고 계시다는 전제하에서 이뤄졌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예배당에 모여서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절차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받고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더 이상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유대교인들은 제사예배 대신에 제사를 드려야할 횟수만큼 매일 기도회를 갖고 기도문을 암송해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희생제물이 되시고, 단 한 번의 제사로써 더 이상의 동물제사가 필요 없게 된 지금에는 기도회가 더더욱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유대교인들 못지않게 기도로써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써 하루를 마감할 때 일상 속에서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성막예배뿐 아니라 성막의 집기들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을 만나주신다는 외적인 증거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결코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봐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막이나 예배당에서 이뤄지는 예배절차와 양식은 비록 그것들이 외적인 것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 속에서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성막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예배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짓게 하신 목적은 언약백성과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막은 시내산 언약의 외적인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실 목적으로 짓게 하신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교회는 유대민족의 좁은 틀을 벗어나서 보다 넓은 세계에 흩어져 사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실 목적으로 설계하신 것입니다. 유대교는 유대민족만을 위한 것이지만, 교회는 전 세계 민족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언약서인 토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토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라디오 채널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토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고, 통치하셨습니다.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앞세워 통치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통치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주신 새 언약서인 신약성서를 통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신약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통치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옛 언약서인 토라를 준수하듯이 우리 성도들은 새 언약서인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준수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막과 토라가 있었듯이, 우리 성도들에게는 교회와 신약성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재하시고, 토라를 통해서 말씀하셨듯이, 오늘날에는 교회에 임재하시고, 신약성서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를 떠나 살거나 신약성서를 떠나 사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임재의 거리밖에 있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거리 밖에서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혼자서는 그가 비록 신앙인일지라도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모여서 역할을 맡아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겠다.”(마 18:20)고 하셨습니다. 교회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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