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예법과 성막(4)(히 9:1-10, 출 30장)
본문
.
구약의 예법과 성막(4)(히 9:1-10, 출 30장)
신에게 향을 태워 제사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성막이나 성전에서뿐 아니라 이집트와 바벨론, 그리스와 로마 등지에서도 시행되던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막에서의 ‘향’은 고대 근동의 다른 종교들의 제의와는 달랐습니다. 성막에서의 향은 타종교에서처럼 예배자들에게 신비감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성스런 구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스런 구별 속에서 이뤄지는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생명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알리는데 그 의미가 있었습니다. 기억하실 것은 성막은 타종교의 성전들과는 달리 예배자가 분향단이 놓여 있는 성소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분향이 성막 밖으로 새어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조차도 고기타는 냄새 때문에 분향(焚香)을 맡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이후 기독교에서는 향을 거의 사용하지 않다가 8세기 이후 가톨릭에서 성직자의 축복의 상징으로 향이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배의식이 장엄해지면서 이러한 이교적인 요소들이 가톨릭 예배에 유입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회들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비사도적이고 이교적인 것으로 여겨서 예배 중에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 한 가지는 기독교가 구약성서에 기초한 종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독교나 유대교나 같은 하나님을 믿는데, 왜 구약성서에 있는 대로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기독교는 구약성서에 있는 대로 행하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들이 구약성서를 해석하고 이해한 새롭고 한 차원 높은 신약성서에 기초한 종교입니다. 안식일교회가 십계명에 있는 대로 안식을 거룩히 지켜야한다고 말하지만, 예수님과 사도들이 안식일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시행했느냐가 십계명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보다 결정에 더 우선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과 실천은 앞서 유대교에서 행하던 것들의 원형과 실체이며, 앞서 유대교에서 행하던 것들은 장차 나타날 기독교의 모형이고 그림자이며 예표라고 보기 때문에 새롭고 한 차원 높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과 실천들이 하나님의 뜻과 계시의 완성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크고 성공한 교회나 장엄한 예배당을 가진 교회라고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잘못알고 믿더라도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는 생각이 기독교의 본질을 많이 흐려놓고 있습니다. 아무리 의도가 좋고, 뜻이 선하다하더라도 본질이 흐려지면, 선한 뜻과는 무관하게, 궤도를 벗어난 기차가 사고를 일으키듯이, 문제를 일으키고 맙니다.
성막의 분향단은 조각목궤에다 정금을 입혀 만들었으며, 가로, 세로가 각각 45.6센티미터, 높이가 91.2센티미터였습니다. 운반이 용이하도록 고리와 운반채가 있었고, 운반채를 고리에 끼어놓은 채 성소 안 휘장 앞 중앙에 놓았습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남쪽과 북쪽 벽은 금으로 싼 벽이고, 입구와 정면과 천정은 휘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천정과 정면의 휘장에는 케루빔 천사들이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입구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금등대, 오른쪽에 금떡상, 정면에 금향단이 놓여 있었습니다.
성막내부, 곧 성소와 지성소에 놓이는 성구들은 모두 정금을 입혔습니다. 성막 벽인 48개의 널판, 지성소에 놓인 언약궤와 시은소, 성소에 놓인 분향단과 떡상은 모두 다 조각목궤들에다 정금을 입힌 것들이고, 일곱 줄기 등대만이 34킬로그램의 순금덩어리를 두들겨서 만든 것입니다. 조각목은 우리 성도들을 의미하고, 금은은 믿음을 의미합니다. 사막의 조각목처럼 버림받고 쓸모없던 인간들이지만, 주님의 손에 들려져서 다듬어지고, 정금 같은 믿음의 옷을 입게 되면, 하나님의 성소의 벽과 기둥도 되고, 성구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이렇듯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하나님의 성막, 곧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거룩한 성구들이 되는 것입니다. 분향단이 바로 그 거룩한 성구들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분향은 성도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계시록 5장 8절을 보면, “이 향은 성도의 기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시 141:2, 계 8:3,4). 출애굽기 30장 7-8절을 보면,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분향단의 향불이 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듯이, 기도의 불이 꺼져서는 안 됩니다(살전 5:17).
흔히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호흡하지 못하면 생명이 끊어지듯이 기도하지 못하면 영혼이 죽습니다. 반대로 날마다 영혼의 창을 열어놓고 신령한 공기를 마시며 하나님과 격의 없는 대화를 기도로써 나눈다면, 우리의 영혼은 활력으로 넘칠 것입니다(사 40:31). 분향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휘장 앞에서 드려졌다는 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임재의식’ 속에서 해야 할 것을 교훈합니다.
출애굽기 30장 9절은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순종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향이외의 것을 사용하지 말며, 분향의식을 다른 목적으로 행하지 말 것을 교훈합니다. 이것은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뤄야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는 순종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기도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채워 주십니다(엡 3:20).
분향단을 위해서 드리는 속죄제는 기도의 효력이 인간이 가진 능력에 있지 않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기도의 근거는 하나님의 사죄은총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죄은총의 근거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힘입어서 감사함으로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무시로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고 늘 깨어 구하기를 힘써야합니다(엡 6:18).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놋으로 만든 물두멍은 성소의 뜰, 성소와 번제단 사이에 놓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소에 들어가기 직전에 그들 자신을 위해서 이곳에서 수족을 씻어야 했고,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하나님 앞에 사를 때에도 수족을 씻어야 했습니다(20절). 이 명령은 성막 내의 다른 규정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씻음은 단지 의식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위생에도 아주 중요했습니다. 광야는 사막입니다. 먼지가 많은 곳입니다. 또 제단에서 발생하는 도살로 인해서 손발이 짐승의 피나 기름으로 더러워져 있었을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먼지나 피와 같은 더러움을 씻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정결의식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도 먼저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인 것입니다.
성막에 쓰인 놋은 그것이 기둥을 받치는데 쓰인 놋이든, 놋그릇이든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물은 침례나 세례의 모형입니다. 따라서 놋으로 만든 물두멍의 물로 수족을 씻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와 침례를 통해서 죄를 씻고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소에 나아갈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 제단에 나아가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고 예배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물두멍의 물로 씻어 죽음을 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0장의 관유는 자연에서 채취된 기름이 아니라 조제된 기름이었습니다. 올리브유에 향을 적절히 배합하여 정성껏 만든 기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향기로운 이 기름을 거룩히 구별하였으며, 그 기름을 성막 기구들에 발라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일군들이 이 기름을 머리에 발라 거룩히 구별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기름을 바른 하나님의 일군들은 향기롭고 가치 있는 일에 종사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었습니다.
관유는 성령님의 임재를 상징하였습니다. 앞에서 보셨듯이, 구약시대에는 구별된 하나님의 일군들에 한해서 기름부음을 받고, 또 머리에 발라 거룩히 구별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울과 다윗의 경우에서 보듯이,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은 즉시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침례가 기름부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침례 직후에 성령님이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침례 직후에 견진례를 시행하였는데, 견진례란 관유를 이마에 발라 십자가 성호를 그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성령의 인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식이 바로 견진례입니다.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되었음을 ‘직인 찍어’ 확인하는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개신교의 교회들이 이 견진례를 대부분 시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머리에 관유를 바르고 하나님의 신이 내린 이 특별한 의식이 구약시대에는 구별된 하나님의 종들, 예를 들면, 제사장들이나 예언자들 또는 왕들에 국한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또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믿고, 침례를 받은 자들에게 제한 없이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점입니다.
믿음으로, 값없이, 은혜로, 구원의 선물로, 구원의 보증으로, 구원의 인감 찍음으로, 성령님을 모든 성도들에게 물 붓듯이 부여주십니다. 성령님이 성도들의 심령에 함께 하시는 축복이 구약시대에는 없던 신약시대만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를 ‘성령시대’라 부릅니다.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말하고, 병을 고친다고 해서 성령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구약시대에도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일들입니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구약시대에는 성령님의 임재가 특별히 구별된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있었고, 하나님의 신, 곧 성령님의 능력의 역사만 있었으며, 하나님의 신이 친히 그들 마음속에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제한 없이 누구에게나 성령님이 그들 마음속에 항구적으로 임재하고 계시며, 그 대신 방언을 한다든지, 예언을 한다든지, 병을 고친다든지 하는 은사는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때에 일시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은사들이 우리에게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추가해서 말씀드린다면, 관유부음이 하나님이 특별히 뽑으셨음을 상징한다는 구약시대의 측면에서 신약시대에도 주의 종들이 안수례를 통해서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에베소서의 말씀대로,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은사 자들입니다(4:12). 같은 맥락에서 성도들도 뽑힌 자들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어 봉사의 일을 하는 은사 자들입니다. 만인제사장 개념에서는 성도들도 모두 주의 일군들입니다. 그러나 안수례를 받고 전임(專任)하는 일군들과는 책임과 직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성막에서 쓰인 성물들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거룩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세속적인 것과 구별하지 않고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행위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도, 예배에 참예하는 성도들도, 예배에 쓰이는 모든 기물과 제기들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도 깨끗하게 구별되고 거룩하게 바쳐져야 합니다. 여기에는 몸과 마음이 겉과 속이 모두 해당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마음가짐이나 몸가짐이나 모든 것이 거룩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30장 26-29절에서 “너는 그것으로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며 등대와 그 기구며 분향단과 및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그것들을 지성물로 구별하라.”고 한 말씀은 예배를 드리는 마음가짐이나 몸가짐이나 모든 것이 거룩해야 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쓰이는 모든 도구와 장소가 성물로서 귀하게 쓰임을 받는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믿음과 신앙의 자세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성소의 모든 도구들은 그 자체가 거룩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관유가 발라짐으로써 비로소 성스러움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도서 3장 5절의 말씀대로, 본래 죄인이었던 우리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곧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늘 우리 자신들을 세상과 구별하고,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만한 거룩하고 살아있는 제사로 마음을 모아 드려야할 것입니다.
구약의 예법과 성막(4)(히 9:1-10, 출 30장)
신에게 향을 태워 제사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성막이나 성전에서뿐 아니라 이집트와 바벨론, 그리스와 로마 등지에서도 시행되던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막에서의 ‘향’은 고대 근동의 다른 종교들의 제의와는 달랐습니다. 성막에서의 향은 타종교에서처럼 예배자들에게 신비감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성스런 구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스런 구별 속에서 이뤄지는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생명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알리는데 그 의미가 있었습니다. 기억하실 것은 성막은 타종교의 성전들과는 달리 예배자가 분향단이 놓여 있는 성소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분향이 성막 밖으로 새어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조차도 고기타는 냄새 때문에 분향(焚香)을 맡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이후 기독교에서는 향을 거의 사용하지 않다가 8세기 이후 가톨릭에서 성직자의 축복의 상징으로 향이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배의식이 장엄해지면서 이러한 이교적인 요소들이 가톨릭 예배에 유입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회들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비사도적이고 이교적인 것으로 여겨서 예배 중에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 한 가지는 기독교가 구약성서에 기초한 종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독교나 유대교나 같은 하나님을 믿는데, 왜 구약성서에 있는 대로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기독교는 구약성서에 있는 대로 행하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들이 구약성서를 해석하고 이해한 새롭고 한 차원 높은 신약성서에 기초한 종교입니다. 안식일교회가 십계명에 있는 대로 안식을 거룩히 지켜야한다고 말하지만, 예수님과 사도들이 안식일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시행했느냐가 십계명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보다 결정에 더 우선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과 실천은 앞서 유대교에서 행하던 것들의 원형과 실체이며, 앞서 유대교에서 행하던 것들은 장차 나타날 기독교의 모형이고 그림자이며 예표라고 보기 때문에 새롭고 한 차원 높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과 실천들이 하나님의 뜻과 계시의 완성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크고 성공한 교회나 장엄한 예배당을 가진 교회라고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잘못알고 믿더라도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는 생각이 기독교의 본질을 많이 흐려놓고 있습니다. 아무리 의도가 좋고, 뜻이 선하다하더라도 본질이 흐려지면, 선한 뜻과는 무관하게, 궤도를 벗어난 기차가 사고를 일으키듯이, 문제를 일으키고 맙니다.
성막의 분향단은 조각목궤에다 정금을 입혀 만들었으며, 가로, 세로가 각각 45.6센티미터, 높이가 91.2센티미터였습니다. 운반이 용이하도록 고리와 운반채가 있었고, 운반채를 고리에 끼어놓은 채 성소 안 휘장 앞 중앙에 놓았습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남쪽과 북쪽 벽은 금으로 싼 벽이고, 입구와 정면과 천정은 휘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천정과 정면의 휘장에는 케루빔 천사들이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입구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금등대, 오른쪽에 금떡상, 정면에 금향단이 놓여 있었습니다.
성막내부, 곧 성소와 지성소에 놓이는 성구들은 모두 정금을 입혔습니다. 성막 벽인 48개의 널판, 지성소에 놓인 언약궤와 시은소, 성소에 놓인 분향단과 떡상은 모두 다 조각목궤들에다 정금을 입힌 것들이고, 일곱 줄기 등대만이 34킬로그램의 순금덩어리를 두들겨서 만든 것입니다. 조각목은 우리 성도들을 의미하고, 금은은 믿음을 의미합니다. 사막의 조각목처럼 버림받고 쓸모없던 인간들이지만, 주님의 손에 들려져서 다듬어지고, 정금 같은 믿음의 옷을 입게 되면, 하나님의 성소의 벽과 기둥도 되고, 성구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이렇듯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하나님의 성막, 곧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거룩한 성구들이 되는 것입니다. 분향단이 바로 그 거룩한 성구들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분향은 성도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계시록 5장 8절을 보면, “이 향은 성도의 기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시 141:2, 계 8:3,4). 출애굽기 30장 7-8절을 보면,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분향단의 향불이 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듯이, 기도의 불이 꺼져서는 안 됩니다(살전 5:17).
흔히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호흡하지 못하면 생명이 끊어지듯이 기도하지 못하면 영혼이 죽습니다. 반대로 날마다 영혼의 창을 열어놓고 신령한 공기를 마시며 하나님과 격의 없는 대화를 기도로써 나눈다면, 우리의 영혼은 활력으로 넘칠 것입니다(사 40:31). 분향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휘장 앞에서 드려졌다는 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임재의식’ 속에서 해야 할 것을 교훈합니다.
출애굽기 30장 9절은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순종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향이외의 것을 사용하지 말며, 분향의식을 다른 목적으로 행하지 말 것을 교훈합니다. 이것은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뤄야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는 순종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기도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채워 주십니다(엡 3:20).
분향단을 위해서 드리는 속죄제는 기도의 효력이 인간이 가진 능력에 있지 않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기도의 근거는 하나님의 사죄은총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죄은총의 근거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힘입어서 감사함으로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무시로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고 늘 깨어 구하기를 힘써야합니다(엡 6:18).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놋으로 만든 물두멍은 성소의 뜰, 성소와 번제단 사이에 놓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소에 들어가기 직전에 그들 자신을 위해서 이곳에서 수족을 씻어야 했고,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하나님 앞에 사를 때에도 수족을 씻어야 했습니다(20절). 이 명령은 성막 내의 다른 규정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씻음은 단지 의식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위생에도 아주 중요했습니다. 광야는 사막입니다. 먼지가 많은 곳입니다. 또 제단에서 발생하는 도살로 인해서 손발이 짐승의 피나 기름으로 더러워져 있었을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먼지나 피와 같은 더러움을 씻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정결의식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도 먼저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인 것입니다.
성막에 쓰인 놋은 그것이 기둥을 받치는데 쓰인 놋이든, 놋그릇이든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물은 침례나 세례의 모형입니다. 따라서 놋으로 만든 물두멍의 물로 수족을 씻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와 침례를 통해서 죄를 씻고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소에 나아갈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 제단에 나아가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고 예배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물두멍의 물로 씻어 죽음을 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0장의 관유는 자연에서 채취된 기름이 아니라 조제된 기름이었습니다. 올리브유에 향을 적절히 배합하여 정성껏 만든 기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향기로운 이 기름을 거룩히 구별하였으며, 그 기름을 성막 기구들에 발라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일군들이 이 기름을 머리에 발라 거룩히 구별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기름을 바른 하나님의 일군들은 향기롭고 가치 있는 일에 종사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었습니다.
관유는 성령님의 임재를 상징하였습니다. 앞에서 보셨듯이, 구약시대에는 구별된 하나님의 일군들에 한해서 기름부음을 받고, 또 머리에 발라 거룩히 구별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울과 다윗의 경우에서 보듯이,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은 즉시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침례가 기름부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침례 직후에 성령님이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침례 직후에 견진례를 시행하였는데, 견진례란 관유를 이마에 발라 십자가 성호를 그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성령의 인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식이 바로 견진례입니다.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되었음을 ‘직인 찍어’ 확인하는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개신교의 교회들이 이 견진례를 대부분 시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머리에 관유를 바르고 하나님의 신이 내린 이 특별한 의식이 구약시대에는 구별된 하나님의 종들, 예를 들면, 제사장들이나 예언자들 또는 왕들에 국한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또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믿고, 침례를 받은 자들에게 제한 없이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점입니다.
믿음으로, 값없이, 은혜로, 구원의 선물로, 구원의 보증으로, 구원의 인감 찍음으로, 성령님을 모든 성도들에게 물 붓듯이 부여주십니다. 성령님이 성도들의 심령에 함께 하시는 축복이 구약시대에는 없던 신약시대만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를 ‘성령시대’라 부릅니다.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말하고, 병을 고친다고 해서 성령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구약시대에도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일들입니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구약시대에는 성령님의 임재가 특별히 구별된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있었고, 하나님의 신, 곧 성령님의 능력의 역사만 있었으며, 하나님의 신이 친히 그들 마음속에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제한 없이 누구에게나 성령님이 그들 마음속에 항구적으로 임재하고 계시며, 그 대신 방언을 한다든지, 예언을 한다든지, 병을 고친다든지 하는 은사는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때에 일시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은사들이 우리에게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추가해서 말씀드린다면, 관유부음이 하나님이 특별히 뽑으셨음을 상징한다는 구약시대의 측면에서 신약시대에도 주의 종들이 안수례를 통해서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에베소서의 말씀대로,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은사 자들입니다(4:12). 같은 맥락에서 성도들도 뽑힌 자들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어 봉사의 일을 하는 은사 자들입니다. 만인제사장 개념에서는 성도들도 모두 주의 일군들입니다. 그러나 안수례를 받고 전임(專任)하는 일군들과는 책임과 직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성막에서 쓰인 성물들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거룩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세속적인 것과 구별하지 않고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행위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도, 예배에 참예하는 성도들도, 예배에 쓰이는 모든 기물과 제기들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도 깨끗하게 구별되고 거룩하게 바쳐져야 합니다. 여기에는 몸과 마음이 겉과 속이 모두 해당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마음가짐이나 몸가짐이나 모든 것이 거룩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30장 26-29절에서 “너는 그것으로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며 등대와 그 기구며 분향단과 및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그것들을 지성물로 구별하라.”고 한 말씀은 예배를 드리는 마음가짐이나 몸가짐이나 모든 것이 거룩해야 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쓰이는 모든 도구와 장소가 성물로서 귀하게 쓰임을 받는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믿음과 신앙의 자세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성소의 모든 도구들은 그 자체가 거룩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관유가 발라짐으로써 비로소 성스러움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도서 3장 5절의 말씀대로, 본래 죄인이었던 우리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곧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늘 우리 자신들을 세상과 구별하고,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만한 거룩하고 살아있는 제사로 마음을 모아 드려야할 것입니다.
- 이전글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 예수(히 9:11-28) 08.03.05
- 다음글 구약의 예법과 성막(3)(히 9:1-10, 출 29장) 08.02.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