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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실상과 증거이신 예수(히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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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894 2008.03.2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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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실상과 증거이신 예수(히 11:1-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설명이 필요한 말씀이란 점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말씀의 뜻에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바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하티크바’ 희망을 말하고, 유대인들이 그토록 바랐고, 아직도 바라고 있는 ‘올람하바,’ ‘장차올 좋은 것,’ ‘장차올 좋은 세상,’ ‘하나님의 나라,’ 역사를 수놓았던 ‘믿음의 사람들’이 몹시 갈망했던 것, 목숨을 잃을지언정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모든 것을 다 팔아 사고 싶었던 것,‘ ‘영원한 집,’ ‘영원한 생명,’ ‘부활,’ 그리고 그 나라에서 받을 ‘상속’과 ‘참 안식’ 등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처음부터,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이 몹시 바랐던 것이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연고로 얻지 못했고, 결국은 대다수가 이방인인 그리스도인들,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박해했던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받게 된 하나님의 약속을 말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에서 ‘실상’은 ‘실체,’ ‘확신,’ ‘보장,’ ‘기초’를 뜻합니다.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바라는 것’을 이루는 보장이 되고, 실체가 되고, 실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믿는 이들에게 “장차올 것을 보장하는 보증금으로써” 성령님을 선물로 주셨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그것들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그들의 신분이 비록 천할지라도, ‘그들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모든 사람이 그토록 바라던 것을 이루는 보장이 되고 실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에서 ‘보지 못하는 것’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며 ‘장차올 좋은 세상,’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을 전혀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진입한 것, ‘알리야’라 부르는 ‘오름’을 시행한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유대인의 대표자로서 아브라함이 대가족을 이끌고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것을 향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에 오른 것을 볼 수 있고,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에 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오름’에서 가장 큰 특징은 ‘순례자의 길,’ ‘나그네의 길’입니다. 신약성서는 이 ‘오름’이 ‘장차올 더 좋은 것’인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순례자의 길, 믿음의 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그러나 영광의 길, 끝내 이기고 예수님의 영광스런 보좌에 함께 앉는 길임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는 것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한 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 등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눈에 보이지 않고 알지 못하는 것을 향해서 오름의 행진을 펼친 후에 끝내는 이기고 약속의 증거로 바라고 소원했던 가나안 땅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비록 우리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오르는 무모한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끝내는 이기고 약속의 증거를 손에 넣게 할 것이고, 바라던 것을 이루게 할 능력이고,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할 지혜입니다. 신실한 믿음과 순종함으로 우리의 선배 신앙인들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었고, 그 아들 예수님을 구세주로 신뢰함으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증거물로 얻었다는 것이 히브리서 11장 1절의 대 선언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히브리서 11장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었는데도,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순종함으로 나아갔을 때, 그 약속의 실체와 실상을 증거로 확보했던 증인들의 이름들을 열거한 것입니다. 여기에 열거된 이름들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들입니다. 우리의 이름들도 반드시 이 생명책에 등재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열거된 이름들은 ‘장차올 더 좋은 세상’에 세워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도 끝까지 견디고 이겨서 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대기 역사가들의 가나안신정국가이념에 대해서 살펴본 대로 유대인들은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메시아가 등장하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세계를 통합하는 제국을 세우고, 율법과 성전예배를 통해서 신정국가를 이루게 된다는 야무진 희망을 품고 메시아가 등장할 마지막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리던 유토피아는 문자적이고, 세속적이며, 땅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런 유토피아의 세계는 그들의 미완성의 꿈으로 남아있을 뿐 단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는 절망에 가까운 희망이었습니다.
이천년 전 가나안 땅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상황에 대해서 신약성서는 몇 가지 암시적인 표현들을 쓰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그 땅을 “사망의 땅과 그늘”이라고 했고, 그 땅의 백성을 “흑암에 앉은 백성”(4:16),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백성(9:36)이라 하였으며, 그 시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 “표적을 구하는”(12:39) 세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유대민중은 메시아를 기다렸고, 장차올 더 좋은 세상을 바라보았지만 아직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초기에 유대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었는데, 그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려고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을 입는 사람이냐?”(마 11:7-9). 바람에 흔들리는 상한 갈대와도 같았든 민중은 그들에게 참 안식을 가져다줄 메시아를 고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이 혹시 메시아인가해서 나가보았던 것입니다.
유대민중이 광야에 나가 보았던 또 다른 이유는 광야의 외치는 자에게서 메시아라면 반드시 자신을 증명해보일 표적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장차올 메시아는 모세나 엘리야처럼 하늘로부터 내리는 큰 능력을 행하는 자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께 하늘로써 내리는 표적을 보여 메시아인 것을 입증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마 12:39)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타는 목마름으로 바라던 것은 그들에게 충분한 먹을 것을 주고, 육체의 고달픔을 면하게 해줄 메시아였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장차올 더 좋은 것’이 문자적이고, 세속적이며, 땅 중심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내세적이며, 천국중심의 영원한 안식과 평강이란 점을 명백히 밝히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세속적인 희망 ‘하티크바’에 대해서 바울도 언급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을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바라던 메시아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가 아니란 점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렸지만,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들이 희망하는 메시아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를 거부했고, 몹시 싫어하여 십자가에 처형시켜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메시아가 그들을 구원하는 능력이요 지혜란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알렉산더와 같은 정복자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알렉산더와 같은 영웅들이 그들을 위해서 희생당하고, 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들을 위해서 죽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노역과 무거운 세금을 강요하고, 죽음을 강요할 것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영웅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민중들의 피눈물과 땀방울이 메마른 대지를 적셔야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것의 실상이요 실체란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도래시킬 장차올 더 좋은 세상이 전쟁과 정복과 피 흘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고, 정의와 평강이 넘치는 예수님의 나라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이야말로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실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유대인들처럼 세속적이고, 땅 중심적이며, 일시적인 축복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적이고, 내세적이며, 천국중심의 영원한 안식과 평강을 구하기보다는 물질적인 축복에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인들도 간절히 보기를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이데아의 세계,’ ‘장차올 참 세계’로 인도해줄 지혜를 찾고 있었습니다. 플라톤은 보이는 이 자연세계를 보이지 않은 참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데아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이 영적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신비한 지식(gnosis)이 필요하였는데, 헬라인들은 이 지식을 얻을 지혜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을 얻지 못했고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 참 세계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어야 하는데, 엉뚱한데서 지식과 지혜를 찾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어리석게 생각하여 조롱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그들을 장차올 더 좋은 세계로 인도할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란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성서는 믿음의 실상과 증거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발견한 사람들이 장차올 좋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팔아 투자하는 사람과 같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과 고가의 진주를 발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팔아 사는 사람과 같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 13:44-46).
또 성서는 세상적인 일과 빵의 문제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은, 타고난 소경처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들이요, 귀먹고 어눌한 사람처럼, 천국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밭에 숨겨진 보물을 찾지 못한 자들이요, 값진 진주를 진흙에 놓고 짓밟는 돼지와 같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자들은 참 진리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꺼려하고, 어리석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고 바라는 것들, 특히 참 안식과 평강을 얻는 실상이요 증거란 사실을 잊지 맙시다. 믿음의 조상들처럼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일지라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오르는 길일지라도, 손에는 아무 것도 안 잡힐지라도, 끝까지 인내합시다. 믿음과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우리의 바라는 바 꿈, 우리의 바라는 바 비전, 우리의 바라는 바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힘차게 ‘알리야’ 곧 오름의 행진을 합시다. <찬미예수 500, 227장: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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