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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보다 뛰어난 예수(히 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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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526 2007.12.14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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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보다 뛰어난 예수(히 3:1-19)

2장에서 언급된 ‘오는 세상’이 3장에서 예수님과 모세를 비교해야할 이유가 됩니다. 유대인들이 꿈꾸는 세상은 문자적인 신정국가입니다. 유대교와 예루살렘 성전예배가 재건된 이스라엘 왕국건립과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이스라엘 국가의 우산아래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오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의 가능성을 열어준 인물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일찍이 종살이로 비참하게 살아가던 히브리인들을 막강한 제국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사막에서 40년간 이끌면서 율법과 종교를 제정하였고, 선민의식을 고취시켜 12부족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노예출신의 오합지졸들을 모아 법과 조직으로 부족동맹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히브리 민족이 가나안 땅의 일곱 부족들을 몰아내고, 발해를 세운 대조영처럼, 가나안 땅에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초석을 놓은 영웅이자, 구세주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영도로 이뤄진 이집트 탈출을 대 구원사건이라고 부릅니다. 드디어 가나안 땅에 히브리 민족의 나라가 서게 되고, 다윗왕조가 세워졌지만, 2대만인 솔로몬 사후에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는 아픔을 겪게 되었고, 이후 이웃 나라들의 침략으로 패망의 멍에와 쇠사슬에 묶인 채 또 다시 노예로 끌려가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내지 못한 유배생활을 시작합니다.
모세시대에 히브리인들은 이미 이집트에서 430년간 종살이를 했다는 해석도 있고, 그 절반인 215년간 종살이를 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아무튼 기나긴 속박의 세월입니다. 눈물과 한숨과 고통의 세월치고 너무나 긴 세월이었습니다. 이집트 탈출 후, 가나안 땅을 차지하여 국가를 세운 후에 이스라엘 국가의 영화는 1,000년을 넘지 못합니다. 솔로몬 사후에 세워진 북이스라엘 왕국은 모세이후 5백여 년 만에 앗수리아의 공격을 받고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고, 남유다 왕국도 모세이후 7백여 년 만에 바벨론에 패망한 후로 또 다시 수백 년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으며, 1948년 5월 14일 건국을 선포할 때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2,500년이나 됩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집트 탈출과 같은 제2의 대 구원사건을 눈물겹게 기다려왔고, 그 때를 메시아가 나타나는 때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와 같이 왕권과 신권을 가진 예언자가 메시아의 자격을 가진 자로 보게 되었고, 그가 나타나면 예루살렘에 거룩한 성이 세워지고, 성전예배가 재건되며, 유대교를 국교로 하는 세계통합이 이뤄져 유대인들이 통치하는 세상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오는 세상’ 곧 ‘올람 하바’입니다. 이 새로운 세상은 영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세상입니다. 비록 팔레스타인에 세속주의 이스라엘 국가가 건국된 지 60여년이나 되었지만, 정통 보수주의 유대교인들은 메시아가 출현할 때까지는 진정한 이스라엘 국가, 곧 영적이면서 동시에 물질적인 이스라엘 국가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이토록 ‘오는 세상’에 대한 유대인들의 희망 곧 ‘하티크바’가 뼛속깊이에까지 사무치다보니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기독교에 입문했다가도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유혹을 쉽게 물리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 큰 이유는 예수님이 세운 나라가 물질세계가 아니라 영적세계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메시아관과 메시아가 세울 나라의 성격만 바꿔 생각하면 쉽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수 있지만, 현세에서는 물론이고 앞으로 오는 세상에서도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혜택과 역할이 주어지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다른 이방인들과 전혀 차별이 없다는 점에 이르게 되면, 심하게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주장이 그만큼 유대인들로서는 받아드리기 힘든 부분이고, 모세와 같은 왕권과 신권을 가진 능력자가 메시아여야 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죄수가 메시아라고 하니까, 수용하기가 더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선민의식, 특권의식, 우월의식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이 그들의 유익을 빼앗아 이방인들에게 고르게 나눠주는 식의 기독교만인평등사상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주장을 퍼뜨리고 다니던 바울이 죽이도록 미웠고, 그의 만인평등설에 자극되어 썰물 빠지듯이 기독교로 옮겨간 헬라인 개종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더더욱 바울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자였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왜 예수님이 모세보다 뛰어난 분인지를 설명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나와 인류를 위해서 무슨 일을 이뤄놓으셨는지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가 안식에 관한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랜 노예생활에 지쳐있던 사람들이거나 그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정과 삶의 터전과 나라는 안식처요 행복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땅은 안식의 상징입니다. 비록 그 땅이 쓸모가 많지 않은 버려진 땅들이고, 산악지역들이고, 사막지역들일지라도, 그곳이 내 땅이고, 내 조국이고, 노예상태가 아닌 자유 시민으로 살 수 있는 나라란 점에서는 명백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아무리 비옥한 땅일지라도 젖과 꿀은 저절로 나지도 않고 저절로 흐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땅이 아무리 쓸모없는 땅일지라도, 그곳이 내 땅이고, 내 조국이고, 내가 그곳에서 마음껏 자유롭게 짐승을 먹이고 밭을 갈수만 있다면, 밀크는 먹이는 짐승들한테서 쏟아져 나올 것이고, 꿀은 가꾸는 논밭에서 쏟아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가나안 땅은 유대인들에게 절대인 곳이고, 신성한 곳이고, 영원한 안식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꿈이 결코 지중해 연안의 불모지 같은 곳에 토지 장만하고 집짓는데 그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꿈은 그보다 훨씬 원대하고 커서 세계를 다윗의 깃발아래 두고 통치하는 것입니다. 그런 꿈의 소유자들에게 그 꿈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기독교의 십자가 깃발아래 모이라는 것입니다. 편협한 민족주의, 배타적 선민사상으로는 진정한 의미의 안식은 없습니다. 행복은 없습니다. 오히려 민족주의와 선민사상은 끊임없이 갈등과 분쟁과 전쟁만을 촉발시킵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언제쯤 안식의 날이 찾아올까요? 대답은 편협한 민족주의, 배타적 선민사상, 이기적 영토주의를 버리는 때입니다. 내 소유의 땅이 아무리 좋다한들, 내 조국이 아무리 부유하다한들, 그것이 내게 진정한 안식을 주는 충분조건이 됩니까? 물질의 축복만으로 인간이 행복하고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다 우리의 온 몸을 던지고, 목숨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돈과 명예와 권세로는 행복과 안식을 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돈과 명예와 권세는 우리 인간들을 긴장과 억압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하는 창살입니다. 평강과 기쁨과 감사는 돈과 명예와 권세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참 안식과 자유는 물질이나 세상 것의 소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가 나쁘거나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을 소유했다고 해서 안식이나 자유가 저절로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땅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무 오랜 세월 남의 나라에서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 없이 너무 오랜 세월동안 셋방살이 전세살이 한 사람들처럼, 유대인들에게는, 비록 그곳이 불모의 땅일지라도, 젖과 꿀이 흐르는 소중한 땅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땅이 그들에게 행복을 주고, 평화를 주고, 기쁨을 주고, 안식을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땅에 대한 집착은 과거 60년 동안 그들에게 끊임없는 분쟁과 불안과 죽음의 공포를 안겨주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행복과 안식과 기쁨과 감사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집중해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수박겉핥기 식으로 생각지 말고 정말 진지하게 한번쯤 깊이 심사숙고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행복이 어디 저절로 주어집니까?
‘성 베드로 마을’이란 뜻을 가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명한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영국의 브리티시박물관, 미국의 스미소니언박물관과 함께 세계적인 박물관이라고 합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에는 400여 개의 전시실이 있고, 전시실들을 두루 돌아다니자만 약 27킬로미터를 걸어야 한다고 합니다. 전시품 하나하나를 1분씩 하루 8시간씩 감상할 경우, 전 품목을 감상하는데 대략 15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 엄청난 박물관을 패키지여행 관람객들은 두세 시간 만에 주파해 버린다는 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펴낸 이윤기 작가의 설명입니다. 많은 돈을 들여 머나먼 하늘 길을 날아와서 문화의 속살을 그렇게 쏜살같이 스쳐가는 수박겉핥기식 관광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퍼뜨렸다는 말,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고,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 같지 않다”는 의미심장한 구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바로 히브리서 저자가 3장에서 기독교인 유대인들에게 하고자한 말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독교를 그렇게 얄팍하게 스쳐지나가서야 그 무궁무진한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있겠으며, 그곳에서 나오는 영생수를 마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맑고 단 영생수를 마셔볼 기회도 갖지 않고, 예전에 마시던 썩은 물이 좋다고 돌아간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 맛을 보고, 그 진가를 누리던 사람이 억압에 못 이겨 떠난다면, 스스로 자괴감에 빠져 어찌 되돌아올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우리 형제자매들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시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가족을 위한 성실한 일군이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자기를 일군으로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성실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집을 건축한 사람이 집보다 더 존귀한 것처럼, 예수님이 모세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하나님의 집의 성실한 청지기였다면, 예수님은 모세가 섬긴 집주인의 상속자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소망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또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면 우리는 다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사막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강퍅해져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킴으로써,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끝내는 사막에서 죽어 묻힌 것처럼,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서로 권해서 아무도 잘못된 유혹에 빠져 불행을 맛보지 않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가지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에 동참하여 맛보고 누리는 복된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12월은 대강절입니다. 대강절은 이 땅에 오셔서 남녀노소 빈부귀천 인종의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있는 구원의 길을 마련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석가보다, 공자보다, 강증산보다, 그 누구보다 위대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금년 한해를 잘 마무리 짓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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