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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안식을 주시는 예수(히 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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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953 2007.12.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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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안식을 주시는 예수(히 4:1-16)

유대사상 가운데 중요한 테마가 안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유배생활에 지쳐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가나안 땅은 안식의 상징입니다. 비록 가나안 땅이 쓸모가 적고, 산악지역이고, 사막일지라도, 내 소유의 땅이고, 내 조국이고,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란 점에서 그곳은 명백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아무리 비옥한 땅일지라도 젖과 꿀은 저절로 나지도 않고 저절로 흐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땅이 아무리 쓸모없는 땅일지라도, 그곳이 내 소유의 땅이고, 내 조국이고, 내가 그곳에서 마음껏 자유롭게 짐승을 먹이고 밭을 갈수만 있다면, 우유는 먹이는 짐승한테서, 꿀은 가꾸는 밭에서 흐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가나안 땅은 유대인들에게 절대적인 곳이고, 신성한 곳이며, 안식의 상징입니다.
문제는 그 땅에 진정한 안식이 존재했는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평화가 없는 곳에 안식이 없듯이, 예수님이 없는 곳에 평화가 없고, 예수님이 없는 곳에 진정한 안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안식의 상징인 가나안 땅에는 평화가 없었고, 진정한 안식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민족 갈등, 종교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전쟁이 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나안 땅에 오셔서 바라본 백성의 모습은 돌보는 목자 없이 유리하는 양떼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안식이 가나안 땅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땅은 흑암에 덮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이 활동을 막 시작한 당시의 사정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마 4:16).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예수님의 등장은 태양빛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참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수박겉핥기식으로 생각지 말고 정말 진지하게 심사숙고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은 정말 특별한 개념입니다.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유배생활에 찌들었던 유대인들, 조상들도 떠돌이였고, 후손들도 떠돌이였던 유대인들에게 안식은 정말 특별한 의미를 지닌 개념이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안식일을 엄하게 지킨 이유, 상황에 따라서는 수백 가지가 넘는 상식을 초월한 안식일 법들을 만들어서 지킨 이유가 그들의 오랜 유배생활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사람, 그 어떤 민족보다도 더 절실하게 더 뼈저리게 안식이 필요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안식의 원형(prototype)은 가나안 땅입니다. 그래서 아람의 유목민이었던 히브리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오랜 유랑 끝에 안식의 상징인 가나안 땅에 진입합니다. 야곱의 후손들은 이집트에서 짧게는 215년, 길게는 430년 동안 노예로 살다가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넙니다. 홍해를 건넌 후 사막에서 40년을 살다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진입합니다. 기나긴 세월의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얻게 되는 가나안 땅, 나라 없이 떠돌던 서러움을 한 순간에 씻어버린 가나안 땅의 진입이었습니다. 따라서 가나안 땅의 진입은 오랜 고난과 시련에 종지부를 찍고 얻게 되는 안식을 상징합니다. 오늘날에도 세계 도처에 흩여져 사는 유대인들의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 땅입니다.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방인들의 눈으로 볼 때, 불모지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유대인들이 볼 때는 젖과 꿀이 흐를 수 있는 희망(하티크바)의 땅이요, 하나님이 점지하신 땅이요, 약속의 땅이요, 거룩한 땅이요,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매년 유월절 밤이면, 이렇게 희망을 노래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여기 타향에 살아도 내년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지금은 노예이지만 내년에는 자유인이 될 것이다.” 그들은 또 가나안 땅 밖에서 사는 것을 유배생활로 간주하면서 언젠가는 그 땅에 들어가 살게 될 거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희망을 담은 이스라엘 애국가가 ‘하티크바’(Ha-Tikvah) 곧 ‘희망’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마음 속 깊이만큼 오랫동안 유대인의 영혼은 따스하다./ 그리고 동쪽 끝자락을 향해서 시온에로 눈은 향하고,/ 우리의 희망은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천년을 간직한 희망은 우리 자신의 땅에서 자유민이 되는 것,/ 시온과 예루살렘 땅에서/ 우리 자신의 땅에서 자유민이 되는 것,/ 시온과 예루살렘 땅에서.
이런 간절한 희망 때문에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으로 거침없이 향합니다. 이것을 ‘알리야’(aliyah)라 부르는데 ‘오름’이란 뜻입니다. 이 오름이 다윗왕조회복, 성전예배재건, 세계통합이란 역대기 사가들의 이념과 연결이 되면 ‘시온에 오름’(ascension to Zion)이 됩니다. 이 꿈이 이뤄질 때, 그곳에 진정한 안식이 주어진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오름, 이것은 분명 유대인들의 집단무의식이자 원형이며, 끈질긴 집념이면서 절대 신앙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유대인이 되게 하는 조건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이 원형에, 그들의 집단 무의식에, 그들의 끈질긴 집념에, 그들의 절대 신앙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 기독교입니다. 유대인들의 안식개념은 지나치게 민족적이고, 배타적이며, 땅 중심 곧 땅에 집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또 지나치게 현세적이고 물질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민족적이고, 배타적이며, 영토중심적인 안식개념을 우주적이고 탈민족적인 포용개념으로 승화시킨 것이 기독교입니다. 유대인들의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안식개념을 내세적이고 영적인 개념으로 승화시킨 것이 기독교입니다.
사복음서에 실린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의 안식일 논쟁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안식일 개념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마 12:8)고 하신 말씀이나, "수고하여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28-30)고 하신 말씀이 다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이집트 탈출, 홍해도하, 광야생활, 요단강도하, 가나안정복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이며, 영토 중심적이고, 지나치게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반면, 기독교에서는 이집트 탈출을 죄악과 사단의 억압에서의 탈출로, 홍해도하를 침례 또는 세례 받음으로, 광야생활을 지상에서의 교회생활로, 요단강도하를 육체의 죽음으로, 가나안 땅의 진입을 천국에 들어감으로 내세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승화시켜 안식개념을 우주적이고 탈민족적인 포용개념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진정한 안식은 이 땅에서 이뤄지지 않습니다. 일시적이고 불안한 안식이 있을 뿐, 영원하고 참된 안식은 이 땅에서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이상이고 꿈일 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육체노동을 마치고 잠시 쉬는 일시적인 안식의 개념 즉 유대교적인 안식개념을 버리고, 무덤(흑암, 혼돈, 죽음)의 상황을 박차고 일어나는 부활정신, 부활신앙, 부활의 삶을 안식의 개념으로 취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노동으로부터의 쉼을 강조하는 제칠 안식일 즉 토요일을 지키지 않고, 예수님께서 무덤을 박차고 나오신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에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제칠 안식일 즉 토요일 안식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 안식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그런 진정한 쉼을 주는 참 안식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안식은 '일하지 않는다.'는 육체의 쉼보다는 '참 평안을 누린다.' '해방을 만끽한다.' '자유를 누린다.'와 같은 마음과 정신과 영혼의 쉼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의 안식은 하나님의 무죄선언과 예수님의 대속의 피와 성령님의 중생의 씻음으로 '이미' 우리 가운데서 시작된 안식을 바탕으로 '지금, 여기서,' ‘지금 내 안에서’ 성취시켜 나가는 현재 진행 중인 안식입니다. 마음속에 성령님의 은혜와 감사와 평강이 넘치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진정한 쉼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의 은혜와 감사와 평강이 넘치는 가정이면, 그 가정은 진정한 쉼의 축복을 누리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이 안식이 완성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맛봄의 안식이며, 이 맛봄의 안식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이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들어서게 되면, 성도들은 완전한 쉼과 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 안식이 영원한 안식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고, 히브리서 4장 10-11절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마치고 쉬신 것과 같이, 그도 자기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을 씁시다. 아무도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권합니다. 또 계시록 7장 15-17절에 보면,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 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쉼이 온전한 안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적그리스도와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며, 그들의 군사가 된 자들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며,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며,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게 된다(14:9-11)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무한 지옥인 타르타로스(Tartaros)가 나옵니다. 타르타로스에는 많은 죄인들이 벌을 받고 있는데, 그 중 탄탈로스는 물속에 몸을 잠그고 있는데도 영원히 갈증에 시달립니다. 탄탈로스가 마시려고 입을 대면 물이 달아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익시온은 끝없이 도는 불 바퀴에 매달려 비명을 지릅니다. 티튀오스는 독수리의 부리에 살을 파 먹히면서 소리를 지르고, 다나오스의 딸들은 밑 빠진 독에다 끝없이 물을 길어다 부으며, 시쉬포스는 산꼭대기로 바위를 굴려 올리는데, 바위가 산꼭대기에만 이르면 다시 굴러 떨어지기 때문에 시쉬포스는 영원토록 그 바위와 씨름을 합니다. 영원토록 쉼이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영혼의 안식과 쉼이 없는 곳, 고통과 괴로움만이 존재하는 곳, 원망과 불평이 충만한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히브리서 4장은 3장 7절 이하에서 시작된 ‘안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닫지 말라는 것입니다. 광야시절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기 때문에 안식처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막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장 15절과 4장 7절,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반역하던 때와 같이 너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을 일곱 가지로 요약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첫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자는 것입니다(1절).
둘째, 오늘 이 시간 말씀을 듣는 바로 이 순간, 그 말씀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안식에 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2-3절).
셋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입니다(11절).
넷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 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12-13절)라고 말합니다.
다섯째, 우리에게는 승천하신 위대한 대제사장,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음 고백한 신앙을 굳게 지키자는 것입니다(14절).
여섯째,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15절).
그리고 일곱째로, 그러므로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자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참 안식과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면서 즐거운 성탄절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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