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의 자료와 게시판을 분류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료 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

장차올 좋은 것(히 11:33-40, 고후 5:1-5)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조동호
댓글 0 조회 12,880 2008.03.22 10:33

본문

장차올 좋은 것(히 11:33-40, 고후 5:1-5)

신약성서는 ‘장차올 좋은 것’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장차올 좋은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장차올 좋은 것’은 참 안식을 주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 나라에 들어가 살기 위해서 받아야할 거룩하고 영화로운 부활의 몸을 말합니다.
히브리서는 ‘장차올 좋은 것’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 6장 9절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더 좋은 것이 있다’는 말씀으로 포문을 연 히브리서는 ‘좋은 소망’(7:19), ‘더 좋은 언약’(7:22), ‘더 좋은 약속’(8:6), ‘장차올 좋은 일’(9:11), ‘장차 나타날 좋은 것’(10:1)을 연이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1장에서는 역사를 수놓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더 좋은 것을 사모’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으시고, 미리 세워둔 ‘더 좋은 계획’에 따라(40절) 그들을 위한 ‘한 도시’ 곧 하나님의 나라를 마련해 주셨다(16절)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태여 감옥에서 풀려나기를 바라지 않았다’(35절)고 말합니다.
바울서신들도 ‘장차올 좋은 일’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5절을 보면,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제대로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영어성경에서는 이 말씀이 “장차올 것을 보장하는 보증금으로써”(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성령님은 ‘장차올 좋은 것’에 대한 ‘약속’의 ‘보증금’과 ‘인감’으로써 설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서신들에서도 ‘장차올 좋은 것’은 ‘영원한 집,’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생명,’ ‘부활’을 말합니다.
여기서 ‘영원한 집’(eternal house)은 하늘에 있는 집,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집,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집이고, ‘지상의 텐트’(earthly tent)는 우리의 육신, 장차 죽어서 썩어질 몸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와 지혜의 영을 받고, 마음의 눈이 열린 믿음의 사람들은 이 지상의 삶이 너무 고달파 신음하면서도 우리를 위해 마련된 하늘의 집, 부활의 몸을 새로 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이생에서는 무거운 짐을 지듯이 힘들어 탄식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죽을 육신을 벗고, 영원히 사는 부활의 몸을 입기 위한 잠시 동안의 아픔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영원히 사는 부활의 몸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보장하는 보증금과 인감으로써”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둘째, ‘장차올 좋은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이고, 그 나라에서 받을 상속을 ‘기업’과 ‘후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1절은 ‘올 세상’을 말하고 있고, 디모데전서 4장 8절도 “올 세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도 2장 5절에서 “앞으로 올 세상”(the world to come)을 말하고 있고, 11장 40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고,” 13장 14절에서는 “장차 올 도시” 곧 천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장차올 나라’에서 받을 상속을 ‘기업’이란 말로 설명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장 14절을 보면, 고린도후서 5장 5절에서 사용된 “장차올 것을 보장하는 보증금”이란 말 대신에 ‘기업에 대한 보증’이란 말을 쓰고 있어서 우리가 장차 받을 기업, 상속의 내용은 ‘장차올 좋은 세상’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8절에서는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게 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셋째, ‘장차올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끝까지 견디는 신실한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6장을 보면,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끝까지 이기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12절). 또 믿음의 사람들이 ‘장차올 좋은 것’ 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을 확실하게 받게 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다”(17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1장을 보면, 이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로마서 8장 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후사’란 기업을 상속할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넷째, ‘장차올 좋은 일’은 구약성서에 그 배경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을 일컬어 신학에서는 ‘묵시문학사상’이라 부르고 있고, 유대교적 배경에서 보면, ‘올람 하바’에 대한 ‘하티크바’ 곧 ‘다가올 세상’에 대한 ‘희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유대교적 배경은 고대 페르시아제국시절에 활동했던 역대기 역사가들의 가나안신정국가이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유대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테마가 안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유배생활에 지쳐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안식은 절대적이고, 신성하며, 지복의 상징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은 정말 특별한 개념입니다.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유배생활에 찌들었던 유대인들, 조상들도 떠돌이였고, 후손들도 떠돌이였던 유대인들에게 안식은 정말 특별한 의미를 지닌 개념이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안식일을 엄하게 지킨 이유, 상황에 따라서는 수백 가지가 넘는 상식을 초월한 안식일 법들을 만들어서 지킨 이유가 그들의 오랜 유배생활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사람, 그 어떤 민족보다도 더 절실하게 더 뼈저리게 안식이 필요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이 안식의 원형(prototype)이 가나안 땅입니다. 그래서 아람의 유목민이었던 히브리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유랑세월 끝에 안식의 상징인 가나안 땅에 진입합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다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진입합니다. 그래서 기나긴 세월의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얻게 되는 가나안 땅, 나라 없이 떠돌던 서러움을 한 순간에 씻어버린 가나안 땅의 진입은 오랜 고난과 시련에 종지부를 찍고 얻게 되는 안식을 상징합니다. 오늘날에도 세계 도처에 흩여져 사는 유대인들의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 땅입니다.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방인들의 눈으로 볼 때, 불모지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유대인들이 볼 때는 젖과 꿀이 흐르는 희망의 땅이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요, 거룩한 땅이요,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월절 밤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여기 타향에 살아도 내년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고 희망을 노래합니다. 그들은 또 가나안 땅 밖에서 사는 것을 유배생활로 간주하면서 언젠가는 그 땅에 들어가 살게 될 거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희망을 담은 이스라엘 애국가가 ‘하티크바’(Ha-Tikvah)입니다. “동쪽 끝자락을 향해서 시온에로 눈은 향하고, 우리의 희망은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천년을 간직한 희망은 우리 자신의 땅에서 자유민이 되는 것, 시온과 예루살렘 땅에서....시온과 예루살렘 땅에서.”
이런 간절함 때문에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으로 거침없이 향합니다. 이것을 ‘알리야’(aliyah)라 부르는데 ‘오름’이란 뜻입니다. 이 오름이 다윗왕조회복, 성전예배재건, 세계통합이란 역대기 사가들의 이념과 연결이 되면 ‘시온에 오름’(ascension to Zion)이 됩니다. 이 꿈이 이뤄질 때, 그곳에 진정한 안식이 주어진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오름, 이것은 분명 유대인들의 집단무의식이자 원형이며, 끈질긴 집념이면서 절대 신앙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유대인이 되게 하는 조건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이 원형에, 그들의 집단 무의식에, 그들의 끈질긴 집념에, 그들의 절대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신약성서의 시각이고, 그 잘못을 바른 방향으로 업그레이드시킨 내용이 신약성서입니다.
유대인들의 안식개념은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이며, 영토 중심적입니다. 그것은 또 지나치게 현세적이고 물질적입니다. 이런 잘못된 안식개념을 우주적이고 탈 민족주의적인 개념으로 승화시킨 것이 신약성서입니다. 유대인들의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안식개념을 내세적이고 영적인 개념으로 승화시킨 것이 신약성서입니다.
이 땅에는 그 어떤 곳에도 진정한 안식이 없습니다. 이 땅에는 진정한 평화와 안식이 없으며, 갈등과 전쟁과 질병이 결코 쉬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약성서는 영원한 안식, 참 안식의 개념을 이 땅에서 찾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을 다윗왕가의 복원지로, 예루살렘을 성전예배의 중심지로, 율법을 헌법으로, 메시아를 왕으로 하는 신정통치를 가장 이상적인 세계로 꿈꾸었습니다. 이 정치종교의 통합이념이 ‘장차올 좋은 세계’를 뜻하는 ‘올람 하바’(Olam Ha-Ba)에 나타난 유대사상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는 메시아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들이 꿈꾸는 나라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기독교인들은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무덤에 장사되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승천하신 예수님을 장차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로 확신하였고, 그분이 선포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참되고 영원한 안식처로, ‘장차올 좋은 일’로, ‘장차올 세상’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일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문자적 의미의 이스라엘 왕국이 아니라, 성령님이 예수님을 믿는 자 개개인들에게 임하신 후에 이뤄질 영적 의미의 이스라엘 나라이며,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민족과 신분과 남녀노소의 차별 없이, 공평하고 값없이 은혜로 열려있는 현재의 영적구원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궁극적으로 이뤄질 부활과 영원한 세계를 성령님을 통해서 약속하고 보장하고 인증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문자적인 세계이고, 아직 이뤄진 적이 없는 미래세계입니다. 그래서 유대교에는 현재의 삶 속에서 이뤄지는 영적구원이란 것이 없고, 오로지 미래세계에서 이뤄질 육적구원만이 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사건을 이스라엘 민족의 대(大)구원 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메시아가 오시면 제2출애굽사건이 일어나게 될 것인데, 그때가 되면 유대인이 중심이 되는 좋은 세계가 성취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은 제2출애굽사건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려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라고까지 말합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통해서 이미 우리 가운데서 이뤄진 현재구원과 예수님 재림 때에 성취될 미래의 축복들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지금 여기서 미리 맛보고 누리는 영적축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이미' 이뤄진 현재구원이 없고, 오직 ‘아직’ 이뤄지지 않은 미래구원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장차올 좋은 것’인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우리 안에 상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 속에서 이미 우리 가운데서 이뤄졌고, 장래에 이뤄질 거룩하고 영화로운 몸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안식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셨고, “그 약속을 보장하는 보증금과 인감으로써”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장차올 좋은 것들’을 ‘기업’으로 ‘상속’받게 될 ‘후계자들’이고, 이런 일을 미리 계획하시고 실천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차올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끝까지 견디는 신실한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앞서간 신앙인들은 이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손에 넣기 위해서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며 앞으로 나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추구하고 바라는 희망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이며, 영토 중심적이고, 또 지나치게 현세적이고 물질적이지만, 그들이 바라는 ‘장차올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만은 우리가 배워야할 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희망을 ‘하티크바’라 부릅니다. ‘하티크바’의 정점은 ‘예루살렘 시온에로 오르는 것’입니다. 이 ‘오름’을 ‘알리야’라 부릅니다. 여기서 ‘오름’이라 불리는 ‘알리야’는 짧게는 1878년 길게는 2500년 넘게 그 긴 세월, 유대인들이 한으로 가슴에 품어온 ‘안식을 위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는 과업’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오름’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름’을 향한 희망은 유대인들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성공적인 신앙인의 삶을 향한 오름으로 강하게 불타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인내로써 이룬 ‘오름에의 희망’이 부활주일을 맞이한 성도님들의 마음에서 불타오르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차올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끝까지 견디는 신실한 믿음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기업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순종하며 전진해야 합니다. 이미 주어진 것들을 선용하시면서 ‘장차올 좋은 것’들에 대한 희망을 키워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