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의 행진과 그 방향(히 11:3-32)
본문
오름의 행진과 그 방향(히 11:3-32)
본향을 떠난 삶을 유배생활로 인식하는 유대인들이 동쪽 끝자락 시온과 예루살렘의 땅에 눈을 향하고 이주하는 것을 일컬어 ‘시온에 오름’이라 부릅니다. 이사야 35장 5-10절을 보면, 시온에 이르는 대로(highway)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35장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는 메시아시대에 관한 예언이자 이스라엘 회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문자적 이해되어지고, 언젠가는 실제로 이스라엘 땅에서 이뤄질 ‘올람하바’ 곧 ‘장차올 세상’입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시온에 이르는 대로(highway)가 하늘나라 시온성에 오르는 길로 이해되어지고 있고, 신실한 믿음과 인내가 요구되는 길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2절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시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란 표현을 써가며 ‘장차올 더 좋은 세상’이 하늘나라인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오름의 행진을 성공리에 펼치고 명예의 전당에 그 이름을 올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믿음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을 때, 그 믿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마음에 믿는 것을 말합니다(롬 10:9). 이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값없이 선물로 구원의 꽃을 피우지만, 이 꽃에 열매를 맺게 하는 비료는 신실한 믿음, 순종의 믿음, 인내의 믿음입니다. 한번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끝까지 지키는 신실한 믿음, 순종의 믿음, 인내의 믿음이 화려하게 핀 구원의 꽃을 풍성한 열매로 결실을 맺게 하는 비료입니다. 이 의인의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업을 받기 위해서, 유대인들처럼 저 팔레스타인에 있는 예루살렘 시온에로 오르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도시, 하늘의 예루살렘을 향해서 한걸음씩 힘차게 오르는 것입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어서 이 오름의 행진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세계창조의 근원을 알 수 있게 되고, 믿음으로 노아처럼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갖고 거대한 방주를 건조할 수 있으며, 믿음으로 아벨처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더 나은 예배에 대해서 알 수 있고, 믿음으로 에녹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죽음을 피할 수도 있습니다. 비록 육신은 땅에 묻혀 썩는다 해도 영원히 썩지 않는 불사의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믿음으로 노아처럼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을 좇는 의의 상속자가 될 수 있고, 아벨과 아브라함처럼 ‘의인’이란 증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또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순종하였고, 믿음으로 장래 유업으로 받을 약속의 땅에 나아갔으며, 갈 바를 모르지만 오름의 행진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으로 사라도 나이가 많아서 수태할 수 없는 몸이었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나이 많아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에서도 하늘의 별과 같이 또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셀 수 없이 많은 자손들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삭을 바쳤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오랜 약속의 성취로 얻는 외아들이었고, 그를 통해서 바닷가의 모래알과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던 아브라함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한번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임을 믿고, 외아들 이삭을 기꺼이 바치려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리신다는 믿음을 입증하였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아브라함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나사로를 되돌려 받은 것처럼, 이삭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되돌려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100세 때에 외아들 이삭을 주시고, 그 외아들을 나에게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이 누굽니까? 그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들을 위해서 바친 분이십니다. 그분은 또한 그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내서 되돌려 받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흑암을 빛으로, 혼돈을 질서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살림의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귀하고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에서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여 드리는 것,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여 드리는 것이 의롭다함을 입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순도를 재는 척도가 시련입니다. 광석이 용광로에서 녹아질 때, 가치 있는 금속재료가 뽑혀져 나오듯이, 시련을 통해서 믿음이 단련되고, 그 진가가 판별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대표적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삭과 야곱도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야곱에게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나왔고, 그의 열두 아들들에서 12부족이 형성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환도 뼈가 부러지기까지 치열한 싸움을 하나님과 펼쳤고, 그곳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뼛속에 새길 만큼 깊은 인상을 받은 야곱은 그곳을 ‘하나님의 얼굴’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남의 뒤를 집요하게 추적하며 속이는 자’란 야곱의 이름 대신에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인내할 것이다. 또는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고통당할 것이다’는 뜻을 가진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새로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바로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갓 태어난 모세를 숨겨 키웠으며, 성인된 모세는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였고, 세상의 향락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또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였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본 듯이, 가보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는 약속의 땅을 마치 봤거나 가본 듯이 오름의 행진을 힘차게 해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구약시대의 조상들은 하나님께 약속 받은 것을 문자적으로는 받지 못하였다는 점입니다. 히브리서의 해석에 따르면, 그들은 약속받은 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을 뿐이지, 이 땅에서는 그것들을 손에 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이 땅에서는 남의 나라에 얹혀사는 외국인이요, 유배지를 떠도는 나그네인 것을 인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말한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본향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수천 년에 걸쳐 그래왔던 것처럼, 그들도 본향을 향해 눈을 고정시키고, 돌아갈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았던 조상들이 그토록 바랐던 ‘하티크바’ 곧 ‘희망’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나라’ 곧 하늘나라를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한 영원한 도시를 마련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유대민족이 하나님께 받은바 약속을 바라는 희망에 대해서 차원 높게 해석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께 받았던 약속, 그리고 믿음의 조상들이 진정으로 바라보았던 희망은 이 땅이 아니고, 이 땅의 것들도 아니고, 저 하늘나라에 관한 것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들이 마음으로 원하고 바라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처럼 세상적인 것은 아닌지요?
믿음의 조상들은 그들의 믿음으로 나라들을 정복하고, 정의를 실천하고, 약속된 것을 받고, 사자의 입을 막고, 불의 위력을 꺾고, 칼날을 피하고, 약한 데서 강해지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고, 외국군대를 물리쳤습니다.
믿음으로 여자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가족을 다시 만났고, 또 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태여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맞고, 결박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지만, 믿음으로 그 시련을 이겼습니다. 또 그들은 돌로 맞고 톱으로 켜이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박해 중에 이들은 숨을 곳을 찾아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맸습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그들의 믿음으로 인하여 좋은 증언을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아무도 받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현재의 우리들을 위하여 더 좋은 것을 계획하셨기 때문이며, 유대인들이 바랐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이것을 그들이 우리와 함께 받아 누림으로써 그들이 완성에 이르게 하려 하셨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약속을 받았으되, 그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은 에베소서 3장 5-6절의 말씀대로, 이방인인 우리가 그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약속을 함께 나누는 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바울 사도에 따르면, 이것은 복음의 신비요, 하나님의 은혜의 결정 속에 있었던 것이며, 우리와 같은 자들을 위해서 오랫동안 감춰뒀던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의 신비로 말미암아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되고, 한 몸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모든 축복을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나눌 자격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천성을 향한 행진이 바보들의 행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천년 전에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유대인들이 꺼려했고, 헬라인들이 어리석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행진은 위대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 시온성을 향해서 펼치는 오름의 행진을 어리석게 생각할 것이고 바보들의 행진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의 이 오름의 행진은 위대한 행진이고, 우리를 구원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는 행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도를 바보로 아는 이유는 성도들이 본향을 향해서 오르는 길이 그들과 반대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들이야말로 역주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길은 하늘 시온성에로 오르는 길이고, 또 다른 길은 이 땅의 시온성에로 오르는 길입니다. 이 땅의 시온성이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문자적으로 세우기를 바라는 시온성말고도, 세속주의자들이 하나님 없이도 세울 수 있다고 믿는 완벽한 과학기술문명사회, 또는 인본주의에 근거한 메시아주의를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천성을 향한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어느 쪽입니까?
본향을 떠난 삶을 유배생활로 인식하는 유대인들이 동쪽 끝자락 시온과 예루살렘의 땅에 눈을 향하고 이주하는 것을 일컬어 ‘시온에 오름’이라 부릅니다. 이사야 35장 5-10절을 보면, 시온에 이르는 대로(highway)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35장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는 메시아시대에 관한 예언이자 이스라엘 회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문자적 이해되어지고, 언젠가는 실제로 이스라엘 땅에서 이뤄질 ‘올람하바’ 곧 ‘장차올 세상’입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시온에 이르는 대로(highway)가 하늘나라 시온성에 오르는 길로 이해되어지고 있고, 신실한 믿음과 인내가 요구되는 길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2절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시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란 표현을 써가며 ‘장차올 더 좋은 세상’이 하늘나라인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오름의 행진을 성공리에 펼치고 명예의 전당에 그 이름을 올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믿음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을 때, 그 믿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마음에 믿는 것을 말합니다(롬 10:9). 이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값없이 선물로 구원의 꽃을 피우지만, 이 꽃에 열매를 맺게 하는 비료는 신실한 믿음, 순종의 믿음, 인내의 믿음입니다. 한번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끝까지 지키는 신실한 믿음, 순종의 믿음, 인내의 믿음이 화려하게 핀 구원의 꽃을 풍성한 열매로 결실을 맺게 하는 비료입니다. 이 의인의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업을 받기 위해서, 유대인들처럼 저 팔레스타인에 있는 예루살렘 시온에로 오르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도시, 하늘의 예루살렘을 향해서 한걸음씩 힘차게 오르는 것입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어서 이 오름의 행진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세계창조의 근원을 알 수 있게 되고, 믿음으로 노아처럼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갖고 거대한 방주를 건조할 수 있으며, 믿음으로 아벨처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더 나은 예배에 대해서 알 수 있고, 믿음으로 에녹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죽음을 피할 수도 있습니다. 비록 육신은 땅에 묻혀 썩는다 해도 영원히 썩지 않는 불사의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믿음으로 노아처럼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을 좇는 의의 상속자가 될 수 있고, 아벨과 아브라함처럼 ‘의인’이란 증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또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순종하였고, 믿음으로 장래 유업으로 받을 약속의 땅에 나아갔으며, 갈 바를 모르지만 오름의 행진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으로 사라도 나이가 많아서 수태할 수 없는 몸이었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나이 많아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에서도 하늘의 별과 같이 또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셀 수 없이 많은 자손들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삭을 바쳤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오랜 약속의 성취로 얻는 외아들이었고, 그를 통해서 바닷가의 모래알과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던 아브라함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한번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임을 믿고, 외아들 이삭을 기꺼이 바치려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리신다는 믿음을 입증하였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아브라함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나사로를 되돌려 받은 것처럼, 이삭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되돌려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100세 때에 외아들 이삭을 주시고, 그 외아들을 나에게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이 누굽니까? 그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들을 위해서 바친 분이십니다. 그분은 또한 그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내서 되돌려 받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흑암을 빛으로, 혼돈을 질서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살림의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귀하고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에서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여 드리는 것,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여 드리는 것이 의롭다함을 입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순도를 재는 척도가 시련입니다. 광석이 용광로에서 녹아질 때, 가치 있는 금속재료가 뽑혀져 나오듯이, 시련을 통해서 믿음이 단련되고, 그 진가가 판별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대표적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삭과 야곱도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야곱에게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나왔고, 그의 열두 아들들에서 12부족이 형성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환도 뼈가 부러지기까지 치열한 싸움을 하나님과 펼쳤고, 그곳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뼛속에 새길 만큼 깊은 인상을 받은 야곱은 그곳을 ‘하나님의 얼굴’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남의 뒤를 집요하게 추적하며 속이는 자’란 야곱의 이름 대신에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인내할 것이다. 또는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고통당할 것이다’는 뜻을 가진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새로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바로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갓 태어난 모세를 숨겨 키웠으며, 성인된 모세는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였고, 세상의 향락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또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였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본 듯이, 가보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는 약속의 땅을 마치 봤거나 가본 듯이 오름의 행진을 힘차게 해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구약시대의 조상들은 하나님께 약속 받은 것을 문자적으로는 받지 못하였다는 점입니다. 히브리서의 해석에 따르면, 그들은 약속받은 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을 뿐이지, 이 땅에서는 그것들을 손에 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이 땅에서는 남의 나라에 얹혀사는 외국인이요, 유배지를 떠도는 나그네인 것을 인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말한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본향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수천 년에 걸쳐 그래왔던 것처럼, 그들도 본향을 향해 눈을 고정시키고, 돌아갈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았던 조상들이 그토록 바랐던 ‘하티크바’ 곧 ‘희망’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나라’ 곧 하늘나라를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한 영원한 도시를 마련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유대민족이 하나님께 받은바 약속을 바라는 희망에 대해서 차원 높게 해석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께 받았던 약속, 그리고 믿음의 조상들이 진정으로 바라보았던 희망은 이 땅이 아니고, 이 땅의 것들도 아니고, 저 하늘나라에 관한 것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들이 마음으로 원하고 바라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처럼 세상적인 것은 아닌지요?
믿음의 조상들은 그들의 믿음으로 나라들을 정복하고, 정의를 실천하고, 약속된 것을 받고, 사자의 입을 막고, 불의 위력을 꺾고, 칼날을 피하고, 약한 데서 강해지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고, 외국군대를 물리쳤습니다.
믿음으로 여자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가족을 다시 만났고, 또 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태여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맞고, 결박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지만, 믿음으로 그 시련을 이겼습니다. 또 그들은 돌로 맞고 톱으로 켜이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박해 중에 이들은 숨을 곳을 찾아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맸습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그들의 믿음으로 인하여 좋은 증언을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아무도 받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현재의 우리들을 위하여 더 좋은 것을 계획하셨기 때문이며, 유대인들이 바랐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이것을 그들이 우리와 함께 받아 누림으로써 그들이 완성에 이르게 하려 하셨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약속을 받았으되, 그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은 에베소서 3장 5-6절의 말씀대로, 이방인인 우리가 그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약속을 함께 나누는 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바울 사도에 따르면, 이것은 복음의 신비요, 하나님의 은혜의 결정 속에 있었던 것이며, 우리와 같은 자들을 위해서 오랫동안 감춰뒀던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의 신비로 말미암아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되고, 한 몸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모든 축복을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나눌 자격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천성을 향한 행진이 바보들의 행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천년 전에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유대인들이 꺼려했고, 헬라인들이 어리석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행진은 위대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 시온성을 향해서 펼치는 오름의 행진을 어리석게 생각할 것이고 바보들의 행진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의 이 오름의 행진은 위대한 행진이고, 우리를 구원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는 행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도를 바보로 아는 이유는 성도들이 본향을 향해서 오르는 길이 그들과 반대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들이야말로 역주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길은 하늘 시온성에로 오르는 길이고, 또 다른 길은 이 땅의 시온성에로 오르는 길입니다. 이 땅의 시온성이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문자적으로 세우기를 바라는 시온성말고도, 세속주의자들이 하나님 없이도 세울 수 있다고 믿는 완벽한 과학기술문명사회, 또는 인본주의에 근거한 메시아주의를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천성을 향한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어느 쪽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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