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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히 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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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5,319 2008.04.1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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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히 12:1-13)

히브리서 12장 1-5절까지는 그리스도를 모델로 한 경주에 관한 권면의 글입니다.
1절에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란 11장에서 소개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수동적인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능동적인 참여자로서 진리를 고백하고 진리를 확증하고 진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친 순교자들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실체를 받지 못했지만 삶 속에서 약속의 실체를 기다리며 증언한 자들입니다. 여기서 “약속의 실체를 받지 못했지만”이란 뜻은 믿음의 조상들이 가나안 땅을 약속받았지만, 그곳 가나안 땅은 그림자와 모형일 뿐이고, 장차올 더 좋은 땅, 가나안 땅의 실체인 하늘 가나안 땅, 곧 영원한 나라의 땅을 아직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11장의 믿음의 조상들은 우리가 다 그 나라의 땅을 상속받기 위해서 동참할 때까지, 주님의 재림의 날까지. 그 땅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는 경주에 나가 달리는 자가 경주하는 데 방해가 되는 무거운 짐이나 거추장스런 것들을 말합니다. 고대 헬라인들이 시합 중에 옷을 벗고 벌거벗은 채 경기를 했던 관습에서 나온 말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추장스런 죄를 벗어버리자는 것입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는 먼 거리를 달리는 마라토너처럼 인내를 통해서 인내와 함께 낙오하지 말고, 끝까지 완주하자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또 다시 예수님을 본보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11장에서는 구름떼같이 수많은 증인들을 내세웠는데, 12장 2-3절에서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는 성도의 믿음이 예수님을 믿는 데서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지속적으로 그분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속에 있는 예수님을 믿는데서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들의 모범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과 죽음을 장차 받아 누리게 될 영광을 위해서 달게 받았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십자가를 지신 후에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는 보상을 받으셨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8장 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고 하셨고,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요한은 계시록 3장 21절에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 가운데 한 가지가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능력이 많으시고, 권세가 많으시며, 흑암을 빛으로, 혼돈을 질서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시니까, 아무런 부족함이나 어려움이나 시련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물론 지금은 능력의 주요, 심판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우편보좌의 권세를 가진 분이시지만, 그분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우리와 동일한 육체를 가지시고 우리와 동일한 고통들을 경험하셨으며,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시고, 배척당하셨으며,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게 하신 것은 그분이 아버지 하나님의 소중한 뜻을 받들어 그 과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 오랫동안 인내하며 견디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예수님에 비교되는 인물이 제우스의 인간아들 헤라클레스입니다. 헤라클레스가 누구입니까? 그를 힘센 장사쯤으로 아셨다면, 제대로 아신 게 아닙니다. 헤라클레스라는 이름은 ‘알케이데스’가 자신에게 운명으로 부과된 극한의 시련과 역경을 다 이긴 후에 얻게 된 이름입니다.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영광’이란 뜻입니다. 제우스의 부인 헤라가 운명으로 부여한 모진 고초를 극복한 다음에 얻은 이름, 그 이름이 바로 헤라클레스입니다. 그의 영웅성이 ‘힘’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가 영웅의 반열에 오른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가엾은 운명과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싸움을 하되,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했고, 옳은 가치와 정의를 위해서 했습니다.
둘째, 그는 지혜의 신 아테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신의 도움 없이 혼자의 힘으로 영웅의 반열에 오른 게 아닙니다.
셋째, 신은 고난을 극복할 방법을 항상 예비했고, 헤라클레스는 그 방법을 찾아 기어이 난관을 극복했습니다. 신은 앞문을 닫으면, 반드시 뒷문을 열어두십니다. 헤라클레스는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련을 주십니다. 시련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고, 영웅이 되게 하여 영광을 누리게 합니다.
넷째, 헤라클레스는 최후까지 신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그를 그토록 괴롭혔던 헤라까지도 박수를 보내며, 자신의 딸까지 주어 부인을 삼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헤라의 영광’이란 이름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 그를 독일의 시인 쉴러는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용감한 헤라클레스는 끝없이 싸우며 괴로운 가시밭길을 걸었다.... 헤라의 증오는 지상의 모든 고뇌를, 지상의 모든 수고를 그에게 지웠으나, 운명의 생일로부터 저 장렬한 최후의 날까지 그는 이 수고를 훌륭하게 참아내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가장 소중한 믿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신 앞에서 겸손할 줄 아는 인내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성도들을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들로 인해서 풀이 죽고 연약해져 심신이 괴로울 때, 그때 고난을 참고 이기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송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
히브리서 12장 6-13절까지는 훈련과 인내에 관한 권면의 글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훈련시키듯이, 하나님도 사랑하는 자녀들을 훈련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훈련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꾸지람을 듣더라도 낙심하지 말며, 그 훈련을 잘 참아 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훈련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그가 어떻게 사랑받는 자녀이겠습니까? 자녀가 마땅히 받아야 할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생아지, 참 자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훈련시키는 육신의 부모도 공경해야하는데, 하물며 천지대군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며 훈련을 잘 참고이기는 것이 더더욱 당연하지 않겠냐고 말합니다. 더욱이 하나님 아버지의 훈련은 우리를 당신의 거룩함에 참여케 하여 유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훈련이 다 그렀듯이, 받을 당시에는 괴롭지만, 받고나면 고생한 보람이 있고,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훈련받지 못해 시들부들한 사람처럼,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의 사람이 되지 말고, 훈련을 잘 마쳐서 꼿꼿하고 똑바로 걷는 씩씩한 용사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는 격언이 있듯이, 훈련이 없으면 발전이 없습니다. 바울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시련과 연단을 받도록 허락하시고, 그 과정을 통해서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엄격히 말해서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시험과 시련을 주시지 않고, 그들이 당하는 시험과 시련을 허락하실 뿐입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의 시험과 시련이 자기 자신의 문제나 주변 환경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험과 시련을 막아주시고, 피할 길을 주시지 않고, 허락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표를 정해서 가는 길에 산이 나타나면 산을 넘어야 하고, 강이 나타나면 강을 건너야 합니다. 바다가 나타난다면, 바다도 건너야 합니다. 하늘이 가로막는다면, 하늘이라도 건너야 합니다. 그래야 목표한 지점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듯이, 산과 강과 바다와 하늘이라는 장애물들은 인간들에게 배도 만들게 하고, 자동차도 만들게 하고, 비행기도 만들게 하였습니다. 시련이 인간에게 기술과학문명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시련이 자주 사람을 유익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이미 알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과 연단을 받도록 허락하시는 이유가 자녀들인 우리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받고 있는 시련과 연단이 물질에 관한 것이든, 건강에 관한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짧은 시련과 고통을 달게 받고, 영원한 영광을 얻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인내하면 반드시 영광을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유명한 목회자들일수록 자주 하나님을 믿으면 시련은 사라지고 축복만 있는 것처럼 설교하는데 사람들은 그런 아편설교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칼 마르크스(1818-1883)가 종교를 억울한 인민의 한숨이요 아편이라고 비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축복만을 선한 것으로 여기고, 결과만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공리주의나 실용주의적 설교들은 꿀처럼 달지 모르지만, 사람들을 쉽게 중독에 빠지게 하고, 사람들을 병들게 하기 때문에 아편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힘들고 지칠 때 한방 맞는 진통제나 피로회복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서 66권은 고생 후에 오는 더 좋은 복락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신실한 믿음과 인내를 강조합니다. 성서가 물질축복을 마치 최고의 선인 것처럼 꾸미지 않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대부분의 축복은 시련을 이긴 후에 얻게 되는 복락을 말합니다. 고난을 이기고 누리는 축복을 말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롬 8:17)고 말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들도 고난과 시련을 당하고 있고, 매일의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성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절망을 경험합니다. 좌절을 겪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승리하도록 예정되어졌고, 운명 지어져 있습니다. 성도들의 운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것입니다(고전 15:57).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고, 또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승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운명입니다. 그렇게 예정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알고 계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본보기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은 사실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분을 신실하게 따르는 신자들도 줄줄이 승리의 열매들이 될 것입니다. 성서는 우리 성도들이 ‘최후의 승자,’ ‘영원한 승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월계관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것이 운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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