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한결같으신 예수(히 13:1-25)
본문
영원히 한결같으신 예수(히 13:1-25)
히브리서 13장은 예수님을 세 가지로 소개하였습니다. 첫째, 8절에서 ‘영원히 한결같으신 예수님,’ 12절에서 ‘성문 밖에서 고난 받으신 예수님,’ 그리고 20절에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실 뿐 아니라, 양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양들을 장차올 영원한 나라에로 인도하실 수 있는 위대한 목자이십니다.
또 히브리서 13장은 ‘이웃관계,’ ‘부부관계,’ ‘가정경제,’ ‘목회자 예우문제,’ ‘유대교인들의 음식규정,’ ‘주의 만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등에 관한 마지막 권면의 말씀입니다.
1-3절은 형제사랑, 나그네 대접,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는 이웃과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학자 판넨베르크는 “인간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기울이시는 최대관심은 인간입니다. 인간들을 관계단절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으로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관계, 대인관계, 자연관계의 원상회복과 화평을 위해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의 깨진 관계복원을 위해서 인간들이 먼저 취해야할 어떤 행동이나 제물을 바치도록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이 먼저 솔선해서 화목제물이 되어 희생당하시고 그 사랑의 힘과 신뢰를 바탕으로 깨진 관계가 복원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성서는 ‘아가페’라고 말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just love’ 혹은 ‘just peace’를 말하는 것으로써 ‘의로운 사랑’ 혹은 ‘의로운 평화’란 뜻입니다. 이 사랑은 자기희생과 자기 포기를 통해서 의로움을 세우는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죄인을 벌줌으로써 세워진 것이 아니라, 죄인을 대신해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시고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세운 의로움을 말합니다. 이것을 ‘의로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박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으로 이웃사랑의 가지를 뻗고 잎사귀를 내어 공동체발전이란 귀한 열매들을 맺게 하라는 것이 1-3절의 내용입니다.
인간의 하나님 사랑이나 관심은 이웃사랑에서 증명됩니다. 그러므로 말로만 하나님 사랑을 말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며,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라고 말씀합니다. 2천 년 전에는 기독교신앙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 부당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많았던 때였습니다. 이들을 교우들이 돌보지 않는다면 누가 돌보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에는 나그네와 감옥에 갇힌 자들을 꼭 문자적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나그네 된 자들이나 갇힌 자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히 정신적 혹은 영적 갇힘의 현상을 ‘코쿤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코쿤현상’이란 애벌레가 고치를 짓고 그 속에 자신을 가두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런 ‘코쿤현상’은 병든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겉으로 건강해 보이는 사람들한테도 많습니다. 매사를 자기중심에서 남을 생각하고, 자기우상에 빠져서 남을 이단시하는 것도 ‘코쿤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에 갇힌 사람, 자기 우상에 갇힌 사람, 자기 교만에 빠진 사람, 내가 남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까를 생각하기보다는 남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지 않을까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 이 범주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타적이고 희생적이며 헌신적이기 때문에 자기를 가둔 고치를 뚫고 나온 나비가 세상을 향해 날갯짓하며 꽃가루를 옮겨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부활의 정신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살림의 일이 풍성합니다.
4-8절은 부부관계, 가정경제,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으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혼인을 귀하게 여겨야 하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는 4절의 말씀은 “혼인은 귀한 것이므로 잠자리가 더러운 것이 아니다”는 말씀입니다.
부부관계는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이 언약을 깨고 간음을 하는 것을 '불신실'(unfaithful), 곧 ‘믿음이 없다,’ ‘믿을만하지 않다,’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고, 이 언약을 잘 지키고 끝까지 배우자에 충실한 것을 일컬어 ‘신실하다,’ ‘믿음이 많다,’ ‘믿을만하다,’ ‘믿을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관계도 마찬가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부부서약을 맺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침례서약을 통해서 부부서약을 맺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숭배에 빠질 때마다 예언자들은 그들의 음행과 간음에 대해서 꾸짖었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저자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려는 히브리인들에게 동일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도령에 대한 춘향이의 신실함, 약속한 것을 지키는 믿음의 정절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덕목입니다.
가정경제의 어려움만큼 우리들을 낙심시키고 팔다리에 기운을 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자족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우리를 지키시고 떠나지 않으며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처럼 세상의 것, 일시적인 것에 착념하지 말고 또 그것에 목숨을 걸지 말고, 하늘의 것,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서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에서가 한번 먹고 나면 없어지고 말 팥죽 한 그릇에 상속권을 포기했듯이, 일시적이고 유한한 세상 것 때문에 신앙의 소중함을 잃지 않도록 하자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으로 신앙을 지도하는 당신의 종들을 기억하고 본받자고 말합니다. 이뿐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한결같으신 예수님을 본받고, 그분을 신뢰하자고 말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한결같으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우리의 눈과 마음과 생각과 정신을 그분에게 고정시키고, 그분에 대한 믿음과 인내를 경주하여 최후의 승자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군과 천사와 수를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성도들이 운집한 큰 집회에서 영광스런 월계관을 받아쓰자는 말합니다. 이 영광의 장소에 반드시 서시게 될 여러분에게 축하를 보내고 축복합니다.
9-14절은 유대교인들의 카샤룻 음식규정과 주의 만찬에 관한 권면의 글입니다. 음식규정은 육체에는 어떤 유익이 있을지 몰라도 은혜로 마음과 영혼을 튼튼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음식규정에 매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유대인의 식탁은 제단에 가깝습니다. 특히 저녁식사는 매우 종교적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식사가 너무 종교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이방인들과의 식탁교제를 막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그들의 종교법에 따른 ‘코숴’ 곧 정한 음식만 먹을 뿐 아니라, 고기제품을 우유제품과 함께 먹을 수 없고, 고기제품에 접촉된 그릇들은 우유제품에 쓸 수 없고, 반대로 우유제품에 접촉된 그릇들은 고기에 쓰일 수 없도록 하고 있어서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사실상 차단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그것이 아무리 종교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성결하다 해도, 사람을 깨끗케 하지는 못한다고 말씀하셨고, 사람을 깨끗케 하는 것은 마음의 죄악을 제거하는 것이지, 특정 음식을 먹고 안 먹는 것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죽음의 근원인 죄악을 마음에서 제거하지 않은 채, 음식을 가려 먹는다고 해서 결코 성결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주님의 만찬은, 안디옥교회를 섬긴 이그나티오스 교부가 에베소 서신에서 밝힌 것처럼, “불사(不死)의 약(藥)이요, 죽음의 해독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한 수치와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에 불사(不死)의 능력과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역설(paradox)이 먼 옛날 유대인들에게는 수용하기 힘든 뜨거운 감자였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사람들은 이 역설이 믿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는가를 알 수 있는 시금석(試金石)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불사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는 예식이 바로 성만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는 예식이 성만찬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10-12절, “우리에게는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은 우리의 이 제단 위에 놓인 제물을 먹을 권리가 없습니다. 유대교의 제사의식에서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회중의 속죄를 위해서 짐승의 피를 지성소로 가지고 들어가는데, 그 몸을 진 밖에서 태워 버립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라고 한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절, “우리에게는 제단이 있습니다.”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말하고, ‘제단’은 예수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성만찬상을 말합니다. 10절 하반절, “그런데 유대교의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은 우리의 이 제단 위에 놓인 제물을 먹을 권리가 없습니다.”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축복들에 참여할 분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를 11절, “유대교의 제사의식에서 대제사장은 속죄 제물로 바치려고 짐승의 피를 지성소로 가지고 들어가는데, 그 몸을 진 밖에서 태워 버립니다.”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제사의 경우에 제사장들은 제물의 일정부분을 자기 몫으로 취하게 되지만, 대제사장이 주관하는 초막절 5일전에 드리는 대속죄제의 경우, 제물을 모두 진 밖에서 태워버렸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몫이 없었던 점을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12절에서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라고 한 것은 연중 한번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회중을 위한 희생제물이 진 밖에서 또는 성문 밖에서 모두 태워졌듯이,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당하신 사실을 말한 것이고, 이 사실을 믿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이루신 대속사역의 축복들을 누릴 수 없다는 점을 천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차별이 없는 이 대속의 은혜를 값없이 은혜로 입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옛 언약법이나 음식규정에 매이지 말고, “우리도 진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지자”고 권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영문 밖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의 수난을 다 참고 견디신 후에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추구하고 도달할 곳은 일시적이고 유한한 이 땅의 시온성이 아니고, 저 하늘에 있는 영원한 도시란 점을 14절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이 골로새서 3장 2절에서 말한 것처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자”는 것입니다.
15-16절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제의의 예배도 있고, 봉사의 예배도 있습니다. 제의예배는 15절의 말씀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봉사예배는 16절의 말씀대로 선행과 친교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의예배뿐 아니라, 봉사예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17-25절은 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또 작은 목자들인 목회자들에게 순종할 것과 그들을 위한 중보기도부탁과 저자가 기원하는 축복에 관한 글입니다. 저자는 목회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복종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도들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고, 그 일을 장차 하나님께 보고드릴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그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을 괴롭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늘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또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해주시기를 빌고 있습니다. 나머지 22-25절까지는 축복과 작별 인사입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히브리서 13장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히브리서 13장의 핵심메시지는 ‘영원히 한결같으신 예수님,’ ‘성문 밖에서 고난 받으신 예수님,’ ‘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양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양들을 장차올 영원한 세계에로 인도할 위대한 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큰 목자이신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 장차올 세계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기 위해서 이 땅에 사는 동안 형제를 사랑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며,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돌보고, 혼인을 귀하게 여기며, 돈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 것에 착념하지 않으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한결같으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며, 눈과 마음과 생각과 정신을 그분에게 고정시켜, 인내로 경주하며, 최후의 승자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군과 천사와 수를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성도들이 운집한 큰 집회에서 영광스런 월계관을 받아쓰셔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당한 수치와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에 불사(不死)의 능력과 지혜가 있다는 확신을 갖고 주의 만찬을 귀하게 여기며, 우리에게 그 같은 거룩한 예식에 참여할 권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미와 선행과 봉사의 예배로 기쁘시게 하셔야 합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듯이, 목회자들에게 순종하며, 그들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쉬지 마셔야 합니다. 그럴 때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13장은 예수님을 세 가지로 소개하였습니다. 첫째, 8절에서 ‘영원히 한결같으신 예수님,’ 12절에서 ‘성문 밖에서 고난 받으신 예수님,’ 그리고 20절에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실 뿐 아니라, 양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양들을 장차올 영원한 나라에로 인도하실 수 있는 위대한 목자이십니다.
또 히브리서 13장은 ‘이웃관계,’ ‘부부관계,’ ‘가정경제,’ ‘목회자 예우문제,’ ‘유대교인들의 음식규정,’ ‘주의 만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등에 관한 마지막 권면의 말씀입니다.
1-3절은 형제사랑, 나그네 대접,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는 이웃과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학자 판넨베르크는 “인간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기울이시는 최대관심은 인간입니다. 인간들을 관계단절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으로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관계, 대인관계, 자연관계의 원상회복과 화평을 위해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의 깨진 관계복원을 위해서 인간들이 먼저 취해야할 어떤 행동이나 제물을 바치도록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이 먼저 솔선해서 화목제물이 되어 희생당하시고 그 사랑의 힘과 신뢰를 바탕으로 깨진 관계가 복원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성서는 ‘아가페’라고 말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just love’ 혹은 ‘just peace’를 말하는 것으로써 ‘의로운 사랑’ 혹은 ‘의로운 평화’란 뜻입니다. 이 사랑은 자기희생과 자기 포기를 통해서 의로움을 세우는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죄인을 벌줌으로써 세워진 것이 아니라, 죄인을 대신해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시고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세운 의로움을 말합니다. 이것을 ‘의로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박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으로 이웃사랑의 가지를 뻗고 잎사귀를 내어 공동체발전이란 귀한 열매들을 맺게 하라는 것이 1-3절의 내용입니다.
인간의 하나님 사랑이나 관심은 이웃사랑에서 증명됩니다. 그러므로 말로만 하나님 사랑을 말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며,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라고 말씀합니다. 2천 년 전에는 기독교신앙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 부당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많았던 때였습니다. 이들을 교우들이 돌보지 않는다면 누가 돌보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에는 나그네와 감옥에 갇힌 자들을 꼭 문자적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나그네 된 자들이나 갇힌 자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히 정신적 혹은 영적 갇힘의 현상을 ‘코쿤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코쿤현상’이란 애벌레가 고치를 짓고 그 속에 자신을 가두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런 ‘코쿤현상’은 병든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겉으로 건강해 보이는 사람들한테도 많습니다. 매사를 자기중심에서 남을 생각하고, 자기우상에 빠져서 남을 이단시하는 것도 ‘코쿤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에 갇힌 사람, 자기 우상에 갇힌 사람, 자기 교만에 빠진 사람, 내가 남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까를 생각하기보다는 남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지 않을까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 이 범주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타적이고 희생적이며 헌신적이기 때문에 자기를 가둔 고치를 뚫고 나온 나비가 세상을 향해 날갯짓하며 꽃가루를 옮겨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부활의 정신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살림의 일이 풍성합니다.
4-8절은 부부관계, 가정경제,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으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혼인을 귀하게 여겨야 하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는 4절의 말씀은 “혼인은 귀한 것이므로 잠자리가 더러운 것이 아니다”는 말씀입니다.
부부관계는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이 언약을 깨고 간음을 하는 것을 '불신실'(unfaithful), 곧 ‘믿음이 없다,’ ‘믿을만하지 않다,’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고, 이 언약을 잘 지키고 끝까지 배우자에 충실한 것을 일컬어 ‘신실하다,’ ‘믿음이 많다,’ ‘믿을만하다,’ ‘믿을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관계도 마찬가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부부서약을 맺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침례서약을 통해서 부부서약을 맺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숭배에 빠질 때마다 예언자들은 그들의 음행과 간음에 대해서 꾸짖었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저자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려는 히브리인들에게 동일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도령에 대한 춘향이의 신실함, 약속한 것을 지키는 믿음의 정절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덕목입니다.
가정경제의 어려움만큼 우리들을 낙심시키고 팔다리에 기운을 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자족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우리를 지키시고 떠나지 않으며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처럼 세상의 것, 일시적인 것에 착념하지 말고 또 그것에 목숨을 걸지 말고, 하늘의 것,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서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에서가 한번 먹고 나면 없어지고 말 팥죽 한 그릇에 상속권을 포기했듯이, 일시적이고 유한한 세상 것 때문에 신앙의 소중함을 잃지 않도록 하자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으로 신앙을 지도하는 당신의 종들을 기억하고 본받자고 말합니다. 이뿐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한결같으신 예수님을 본받고, 그분을 신뢰하자고 말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한결같으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우리의 눈과 마음과 생각과 정신을 그분에게 고정시키고, 그분에 대한 믿음과 인내를 경주하여 최후의 승자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군과 천사와 수를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성도들이 운집한 큰 집회에서 영광스런 월계관을 받아쓰자는 말합니다. 이 영광의 장소에 반드시 서시게 될 여러분에게 축하를 보내고 축복합니다.
9-14절은 유대교인들의 카샤룻 음식규정과 주의 만찬에 관한 권면의 글입니다. 음식규정은 육체에는 어떤 유익이 있을지 몰라도 은혜로 마음과 영혼을 튼튼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음식규정에 매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유대인의 식탁은 제단에 가깝습니다. 특히 저녁식사는 매우 종교적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식사가 너무 종교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이방인들과의 식탁교제를 막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그들의 종교법에 따른 ‘코숴’ 곧 정한 음식만 먹을 뿐 아니라, 고기제품을 우유제품과 함께 먹을 수 없고, 고기제품에 접촉된 그릇들은 우유제품에 쓸 수 없고, 반대로 우유제품에 접촉된 그릇들은 고기에 쓰일 수 없도록 하고 있어서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사실상 차단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그것이 아무리 종교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성결하다 해도, 사람을 깨끗케 하지는 못한다고 말씀하셨고, 사람을 깨끗케 하는 것은 마음의 죄악을 제거하는 것이지, 특정 음식을 먹고 안 먹는 것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죽음의 근원인 죄악을 마음에서 제거하지 않은 채, 음식을 가려 먹는다고 해서 결코 성결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주님의 만찬은, 안디옥교회를 섬긴 이그나티오스 교부가 에베소 서신에서 밝힌 것처럼, “불사(不死)의 약(藥)이요, 죽음의 해독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한 수치와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에 불사(不死)의 능력과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역설(paradox)이 먼 옛날 유대인들에게는 수용하기 힘든 뜨거운 감자였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사람들은 이 역설이 믿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는가를 알 수 있는 시금석(試金石)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불사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는 예식이 바로 성만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는 예식이 성만찬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10-12절, “우리에게는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은 우리의 이 제단 위에 놓인 제물을 먹을 권리가 없습니다. 유대교의 제사의식에서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회중의 속죄를 위해서 짐승의 피를 지성소로 가지고 들어가는데, 그 몸을 진 밖에서 태워 버립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라고 한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절, “우리에게는 제단이 있습니다.”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말하고, ‘제단’은 예수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성만찬상을 말합니다. 10절 하반절, “그런데 유대교의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은 우리의 이 제단 위에 놓인 제물을 먹을 권리가 없습니다.”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축복들에 참여할 분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를 11절, “유대교의 제사의식에서 대제사장은 속죄 제물로 바치려고 짐승의 피를 지성소로 가지고 들어가는데, 그 몸을 진 밖에서 태워 버립니다.”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제사의 경우에 제사장들은 제물의 일정부분을 자기 몫으로 취하게 되지만, 대제사장이 주관하는 초막절 5일전에 드리는 대속죄제의 경우, 제물을 모두 진 밖에서 태워버렸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몫이 없었던 점을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12절에서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라고 한 것은 연중 한번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회중을 위한 희생제물이 진 밖에서 또는 성문 밖에서 모두 태워졌듯이,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당하신 사실을 말한 것이고, 이 사실을 믿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이루신 대속사역의 축복들을 누릴 수 없다는 점을 천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차별이 없는 이 대속의 은혜를 값없이 은혜로 입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옛 언약법이나 음식규정에 매이지 말고, “우리도 진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지자”고 권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영문 밖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의 수난을 다 참고 견디신 후에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추구하고 도달할 곳은 일시적이고 유한한 이 땅의 시온성이 아니고, 저 하늘에 있는 영원한 도시란 점을 14절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이 골로새서 3장 2절에서 말한 것처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자”는 것입니다.
15-16절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제의의 예배도 있고, 봉사의 예배도 있습니다. 제의예배는 15절의 말씀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봉사예배는 16절의 말씀대로 선행과 친교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의예배뿐 아니라, 봉사예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17-25절은 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또 작은 목자들인 목회자들에게 순종할 것과 그들을 위한 중보기도부탁과 저자가 기원하는 축복에 관한 글입니다. 저자는 목회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복종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도들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고, 그 일을 장차 하나님께 보고드릴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그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을 괴롭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늘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또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해주시기를 빌고 있습니다. 나머지 22-25절까지는 축복과 작별 인사입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히브리서 13장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히브리서 13장의 핵심메시지는 ‘영원히 한결같으신 예수님,’ ‘성문 밖에서 고난 받으신 예수님,’ ‘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양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양들을 장차올 영원한 세계에로 인도할 위대한 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큰 목자이신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 장차올 세계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기 위해서 이 땅에 사는 동안 형제를 사랑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며,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돌보고, 혼인을 귀하게 여기며, 돈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 것에 착념하지 않으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한결같으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며, 눈과 마음과 생각과 정신을 그분에게 고정시켜, 인내로 경주하며, 최후의 승자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군과 천사와 수를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성도들이 운집한 큰 집회에서 영광스런 월계관을 받아쓰셔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당한 수치와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에 불사(不死)의 능력과 지혜가 있다는 확신을 갖고 주의 만찬을 귀하게 여기며, 우리에게 그 같은 거룩한 예식에 참여할 권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미와 선행과 봉사의 예배로 기쁘시게 하셔야 합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듯이, 목회자들에게 순종하며, 그들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쉬지 마셔야 합니다. 그럴 때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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