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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 같은 이(계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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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667 2008.05.3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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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 같은 이(계 1:9-20)

오늘은 계시록 1장 13절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like a son of man)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인자’란 말은 사람의 아들이란 뜻이다. 이 특별한 용어가 쓰인 곳은 구약성서의 경우 시편과 에스겔서와 다니엘서이고, 신약성서의 경우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7:56) 그리고 계시록이다. 에스겔은 자기 자신을 호칭할 때 100회 이상 ‘인자’란 표현을 사용하였고, 시편에서는 단순히 사람을 호칭하는 말로써(8:4; 80:17), 에녹1서에서는 초인간적 존재로 선택받은 자를 말할 때, 랍비 아키바(Akiba/132-135)는 다윗왕국의 메시아를 말할 때 사용하였다. 그리고 다니엘서는 계시록과 동일한 표현을 써서 ‘인자와 같은 이’(like a son of man)란 말을 두 번(7:13, 10:16) 사용하고 있다. 다니엘서의 ‘인자와 같은 이’가 계시록의 ‘인자와 같은 이’하고 연관이 있는 표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두 묵시록은 모두 종말론적 왕국의 통치자를 ‘인자’로 표현하였다.
중요한 것은 신약성서에서의 ‘인자’란 표현이 예수님께만 사용된 표현이란 것이고, 특히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일컬을 때 ‘인자’라는 말을 사용하셨고, 제3자가 예수님을 일컬어 ‘인자’란 호칭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3자가 예수님을 일컬을 때는 ‘하나님의 아들,’ ‘랍비,’ ‘다윗의 자손,’ ‘유대인의 왕,’ ‘오실 그이’ 또는 ‘선지자’와 같은 호칭들을 사용하였다.
성서에서의 인자호칭은 세 가지 범주에서 사용되었다. 첫째는 지상에서의 예수님을 호칭할 때 사용되었다(막 2:10, 27; 마 11:19; 8:20; 12:32; 16:13; 13:37; 눅 6:22; 19:10; 22:48). 둘째는 ‘오실 그이’ 곧 메시아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막 8:38; 14:26, 62; 마 24:44; 27:37; 10:23; 13:41; 16:28; 19:28; 24:30, 39; 25:31; 눅 12:8; 17:22, 30; 18:8; 21:36). 여기서 ‘오실 그이’는 유대인들의 희망, 하티크바(Ha-Tikvah)이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이다. 유대인들에게 ‘오실 그이’는 아직 한 번도 오지 않은 모쉬아크(Moshiach)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미 한번 오셨고, 또 다시 오실 재림주 메시아이다. 계시록에서 말하는 ‘인자’란 바로 이 재림주 메시아를 말한다. 셋째는 마가복음서에 쓰인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련된 ‘수난자 인자’이다(막 8:31; 9:9, 12, 31; 10:33, 45; 14:21, 41; 마 12:40). 수난자 인자는 마가 자료에만 나타나 있는 마가 특유의 메시아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인자’가 민중의 슬픔과 수고와 고통에 마침표를 찍고, 그들에게 영광의 나라를 안겨줄 메시아이기 때문에 ‘수난자 인자’란 개념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유대인들에게 장차 오실 메시아 인자가 굴욕과 수난과 죽음을 당할 수 없는 것은 오히려 그가 세상을 심판해야할 권능과 영광의 메시아 인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의 심판주 메시아 인자사상이 우리 기독교에서는 재림주 메시아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없는 기독교만의 특징은 수난자 인자 메시아 개념인 셈이다.
‘수난자 인자’ 사상에서 나온 것이 영혼구원이다. 이 영혼구원은 현재구원으로써 미래구원을 성령님의 도움을 입어 이 땅의 삶 속에서 약속받고, 인침(직인)받아, 미리 맛보고, 누리는 축복을 말하는데, 유대인들에게는 없는 사상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영광의 인자’ 사상만 있는데, 이것은 육체구원, 이스라엘 민족구원, 이스라엘 나라 회복 사상으로써 아직 이뤄진 일이 없는 미래구원을 말한다. 우리 기독교에서 고대하는 주님의 재림이 바로 여기에 속하는 사상이다.
이 분 곧 ‘장차 다시 오실 분’이 밧모섬에 갇힌 요한 사도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셨다. 밧모섬은 중죄인들이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하던 곳이었는데, 사도 요한은 이미 백세가 훌쩍 넘은 노인이었기 때문에 주로 기도동굴에서 소일했다고 한다. 주후 92년경부터 소아시아에 황제의 기독교 탄압이 있었는데, 요한은 주후 95년부터 96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사망할 때까지 대략 1년 6개월 정도 밧모섬에 머물었고, 석방되어 에베소에 돌아와서 같은 해인 주후 96년에 105세의 나이로 소천 되셨다고 전한다.
백세가 넘는 노구로 박해받아 유배되었고, 주일 날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고, 사람들이 가장 난해하게 생각하면서도 가장 깊은 관심을 갖는 명작을 죽기 바로 전인 104-5세에 남겼다. 하나님의 일에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준다.
사도 요한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 정황은 주님의 날에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던 중이었다. 일요일에 기도하던 중에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게 된 것이다.
사도 요한이 본 첫 번째 환상은 오른손에 일곱별을 쥐고, '일곱 줄기 일곱 개의 금 등대들'(Menorah) 사이에 선 ‘인자와 같은 이’였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을 상징하였고, 일곱 줄기 일곱 개의 금 등대는 일곱 교회들을 상징하였다.
‘일곱 줄기의 일곱 개의 금 등대’는 그 상징성이 매우 크다. 첫째는 일곱 줄기 금 등대가 완전한 빛의 상징이란 점이다. 원래 이 일곱 줄기 금 등대는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상징물이다. 일곱 줄기에 일곱 개의 금 등대라면, 총 49개의 금 등잔이 빛을 발하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는 50를 말하는 오순절의 의미를 생각나게 하는 숫자이다. 둘째는 이 일곱 줄기 금 등대가 교회의 상징이란 점이다. 등대의 특징은 빛에 있고, 이 빛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며, 진리의 빛이고, 생명의 빛이며, 구원의 빛이다. 이런 고귀한 사명(mission)을 가진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셋째는 이들 등대들의 빛이 강한 폭풍을 맞아 꺼질 위기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사도 요한이 눈을 떠 본 것은 능력의 구세주였다. 그가 환상을 통해서 본 ‘인자 같은 이’는 ‘장차 오실 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자, 폭풍과 분노의 파도를 잔잔케 하신 자,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신 자였다. 그가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이나 백설 같고, 눈은 불꽃같고, 발은 화덕에 달궈진 놋쇠 같고,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고, 오른손에 일곱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로마 검이 뻗어 나오고, 얼굴은 해가 세차게 비치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에 내몰린 교회들 사이에 서서, 세차게 흔들리며 꺼질 것 같은 교회들의 불꽃에 깊은 우려와 관심을 가지고 긴장한 모습으로 금방이라도 무슨 행동을 취하실 것 같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인자 같은 이’의 모습에는 세 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띤 모습은 대제사장의 모습이다. 둘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눈은 불꽃같고,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은 모습은 엘리야나 세례 요한과 같은 예언자의 모습이다. 셋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일곱 금 등대 사이를 거닐며, 입에서 좌우에 로마 검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은 모습은 왕의 모습이다. 이들 모습들은 사도 요한이 본 ‘인자 같은 이’가 완벽한 그리스도이시란 점을 밝혀 준 것이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은 이처럼 완벽하신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에게 궁극적인 또는 최후에 값진 승리를 안겨줄 승리자이시다. 그분은 처음이며 마지막일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자요, 한 번은 죽었으나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진 자이시다.
요한은 이 분이 박해와 탄압이란 강풍을 만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의 배후에 서서 지키고 계신 것을 보았다. 우리도 능력의 주님께서 우리의 배후를 지키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이 뒤에 계시기 때문에 앞만 보고 달려갈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달리던 길을 멈춰 서서 숨을 고른 후에 지나온 길을 뒤돌아다 볼 필요가 있다. 어려울 때일수록, 고달플 때일수록, 강풍이 몰아칠 때일수록 더욱 그분에 대한 신뢰의 끊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 길만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길이요 복 받는 길이다.
인간은 크든 작든 영웅을 고대한다. 가정에서는 능력 있는 가장을 원하고, 교회는 능력 있는 목회자를, 회사는 능력 있는 사장을, 대학은 능력 있는 총장을 원한다. 백성들은 배불리 먹고 평안하게 살게 해줄 탁월한 지도자를 고대한다. 극도로 가난하거나, 억압과 고통 속에 있거나 할 때 더욱 간절하게 영웅을 고대한다. 그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든 자들이 바로 이단자들이다. 문선명, 박태선, 조희성, 최제우, 강증산과 같은 이들을 비롯해서 최근 교회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신천지 교주들이 그들이다. 문제는 그들의 터무니없는 말이 먹힌다는데 있다. 어쩌면 사람들의 절박감이 그만큼 큰지도 모른다. 또 다른 문제는 절박감이 큰 사람들일수록 진리를 거부한다는데 있다. 절박한 심정으로 메시아를 기다렸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거부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가 지난 이천년 동안 그들이 겪었던 고단한 삶과 발 코크바와 샤베타이 제비를 포함해서 30여명이 넘는 거짓 메시아들에 속아 살아온 세월이었다. 발 코크바는 주후 132-135년에 로마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열심당원이었고, 샤베타이 제비는 1665년 5월 31일에 자신이 진정한 메시아라고 선포한 가짜였다. 발 코크바는 칼을 손에 쥔 혁명가였고, 샤베타이는 성경을 손 쥔 거짓 예언자였다.
발 코크바는 ‘별의 아들’ 곧 다윗의 자손 메시아란 뜻으로 교회가 설립된 지 100여년만인 주후 132-135년 사이에 있었던 제2차 유대전쟁 당시 유대인들과 그들이 존경했던 랍비 아퀴바로부터 메시아로 추앙받았던 혁명가였다. 이 사람의 본명은 ‘코시바의 아들 시몬’(Simon ben Kosiba)이었다. 그를 추종하던 자들은 그를 ‘별의 아들’(Bar Kochba)이라 불렀지만, 그러나 그에게 실망한 사람들, 예를 들면, 팔레스타인 탈무드의 편집자 같은 사람들은 그를  ‘실망의 아들’(Bar Kozeba) 혹은 ‘거짓말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혁명의 허구성이 들어난 사례들은 인류 역사에 얼마든지 많다. 대부분의 혁명들이 성공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민중에게 큰 아픔과 기나긴 시련을 안겨준 채로 끝장난 경우가 많다. ‘시몬 벤 코시바’가 처음에는 ‘별의 아들’이란 이름을 듣다가 ‘실망의 아들’로 추락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태봉의 왕 궁예는 처음에는 백성을 구제하는 미륵처럼 행세하다가 나중에는 포악한 군주로 돌변했다. 근대혁명들의 경우, 예를 들어, 19세기 중반 청나라 사람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난(1850-1864), 20세기 초 레닌의 러시아혁명(1917), 20세기 후반 이디 아민의 우간다 혁명, 후세인의 이라크혁명, 카스트로의 쿠바혁명 등 민중에게 시련을 안기지 않았던 예가 드물다. 박정희의 군사혁명의 경우는 잘못한 부분도 있지만, 좋은 결과를 낳았던 드문 사례이다.
샤베타이 제비(Shabbetai Zevi)는 터키 서머나 출생의 유대인 거짓 메시아였다. 그는 성장기에 조울증으로 의심될만한 이상한 성향들을 보였고, 모세의 율법을 고의적으로 어긴다든지, 유대인들이 금하는 음식을 먹는다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함부로 올린다든지 하는 식의 일련의 불경스런 행동들로 인해서 1656년에 회당과 공동체로부터 파문당했던 사람이다. 이스탄불에 가서는 토라가 폐지되었노라고 선포하였고, 카이로에 가서는 1648년 폴란드에서 자행된 유대인학살 때 피신하여 매춘부로 살고 있던 여인과 결혼하여 살기도 했다. 1662년에는 예루살렘 인근 가자(Gaza)에서 젊고 박식하고 축귀(逐鬼)에 능숙한 나단(Nathan)이란 랍비를 만났는데, 그로부터 샤베타이는 자신의 조울증 현상이 자신이 메시아임을 입증하는 증거란 말을 듣게 되고, 드디어 1665년 5월 31일 자신이 메시아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이런 주장은 수세기에 걸친 박해와 추방으로 고립무원에서 고군분투하던 온 세계의 유대인들을 일시에 흥분시켰고, 일찍이 그 누구도 얻지 못했던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 팸플릿과 같은 전도용지들이 영어, 화란어, 독일어, 이탈리어로 만들어졌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는 그를 치켜세우는 대중행렬들이 있었으며, 오토만 제국에서는 예언자들이 거리를 오가면서 샤베타이가 옥좌에 앉은 것을 보았다는 환상을 퍼뜨렸다. 그러나 샤베타이는 1666년 1월 이스탄불에서 반역죄로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신이 쓴 편지에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샤베타이 제비.”라고 서명하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가 술탄으로부터 이슬람에 개종하든지 죽음을 선택하든지 하라고 했을 때에 샤베타이는 이슬람교를 선택했고, 그는 즉각 석방되었으며, 그에게는 황실연금이 지급되었고, 명백하게 충성스런 무슬림으로서 살다가 1676년 9월 17일 사망하였다.
바울이 위대한 것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란 것을 발견한 데 있다. 바울은 한때 기독교 탄압의 앞잡이였지만, 진정한 영웅성이 십자가에 있다는 하나님의 신비를 깨달았을 때, 그의 삶은 180도로 바꿨고, 그가 전파한 복음으로 인해서 거대한 로마제국이, 그토록 기독교를 탄압했지만, 불과 300여년 만에 기독교에 의해 접수되고 말았다.
사도 요한이 본 인자의 환상은 거대한 로마제국의 바벨탑을 붕괴시키고 말 십자가에 못 박혔던 그리스도였다. 요한은 그분이 박해와 탄압이란 강풍을 만난 교회들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안겨주실 자란 것을 알았다. 우리 성도들도 계시와 지혜의 영을 받고, 마음의 눈을 떠서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이 우리 모두에게 챔피언 반지를 끼게 하고 챔피언 트로피에 입 맞추게 할 우리 배후에 서서 우리를 지지하고 계신 대장군이신 것을 보아야 한다. 그분의 십자가의 깃발아래 모이는 군사만이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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