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들의 현주소1(계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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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들의 현주소1(계 2:1-17)
2-3장에서 일곱 교회들에 주신 말씀들은 공통의 특징들을 갖고 있다. 첫째는 각 교회의 상황에 따라 간략한 인자의 특징이 소개된다는 점이고, 둘째는 각 교회는 행위에 따라서 칭찬과 권면과 책망을 받는다는 점이며, 셋째는 매 교회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강한 충고를 받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넷째는 각 교회에게 이기는 자에게 주실 보상을 약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2장 1-17절에 등장하는 교회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모두 세 교회이다. 이들 교회들에 주신 말씀들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먼저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이 생사여탈권을 가진 분, 곧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등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으로 소개되었고, 문제의 심각성으로 지적된 것이 처음 사랑이 식었다는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특징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사이에 혼인(사랑)서약으로 관계가 맺어진 데 있다. 만일 사랑이 식는다면, 이 혼인이 깨질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혼인(사랑)서약은 사랑해도 그만이고, 사랑이 식어도 그만인 그런 남녀사이의 애정문제하고는 크게 다르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사랑이 있고 없고는 애정문제가 아니라, 생사문제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권태기에 빠진 에베소 교회에 첫사랑을 회복하라(2:5)는 권면을 강한 어조로 주고 있고, 끝까지 그 사랑을 유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줘서 먹게 하겠다(2:7)고 약속하셨다.
에베소 교회는 행위의 수고가 있었고, 고난을 잘 참고 잘 견뎠으며,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여 용납하지 아니하고 배척하였다. 또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였다. 그러나 첫 사랑을 버린 일은 생사가 걸린 반드시 회개해야만 되는 일이었다. 누가복음 10장 38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머무실 때에 마리아는 주님 곁에 앉아서 말씀을 경청하였고, 마르다는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불평하는 마르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다. 말씀을 경청하는 쪽을 택한 마리아가 음식준비에 분주한 마르다보다 좋은 몫을 차지한 것이고, 또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행위의 수고와 인내도 소중한 것이고 칭찬받을만한 것이지만, 첫 사랑을 간직하는 일이 더 소중하고 모든 일에 우선된다는 말씀이다. 부부가 아무리 서로에게 맡겨진 일을 잘하고, 최선을 다해서 가정에 충실하다고해도, 피차 사랑이 식어버려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의무로 사는 부부이지, 행복한 부부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도 부부사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아무리 우리가 열심히 성도의 본분을 다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한다.
서머나 교회는 책망이 없고, 오히려 칭찬과 격려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죽도록 충성하라”(2:10)고 당부하였다. 여기서 ‘충성’은 ‘신실’을 말하고, 신실은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죽기까지 신실하라’ 또는 ‘죽기까지 하나님께 행한 서약을 지키라’ 또는 ‘목숨 바쳐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라’는 말씀이다. 그래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2:11)고 말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주님의 특징을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2:8)으로 서머나 교회에 소개한 것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한 것이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요 11:25-26).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겪고 있었다. 이 당시 터키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큰 도시들마다에는 회당을 중심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 살았고, 그들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설립된 기독교를 크게 핍박하였다. 기독교 핍박의 주된 이유들로는 첫째로 누가 메시아인가라는 견해차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교의 문의 개종자들, 곧 유대교의 손님격이었던 많은 수의 이방인들이 훨씬 자유롭고 오픈된 기독교로 다시 개종했기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이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돌에 한 번 맞고, 수없이 옥에 갇히고, 굶주리고, 헐벗고, 목말랐던 것은 유대인들의 박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죽도록 충성하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월계관을 씌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버가모 교회에 대한 경고는 날카로운 양날 칼을 가진 주님의 입의 말씀으로 시작된다. 버가모 교회에 발람의 가르침과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좇는 이단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속히 오셔서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칼로 그들과 싸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버가모는 사탄이 살고 있고, 그의 왕좌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신실한 증인인 안디바가 순교를 당한 곳이라고 했다. 강진 후에 더 강한 여진을 맞듯이, 그야말로 위기에 위기를 맞고 있는 곳이었다. 이토록 위험하고 살벌한 곳에서조차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을 붙잡고 놓지 않았으며,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는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한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고,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만일 회개치 않으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칼로 그들을 치겠다고 말씀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신실한 믿음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감추어 둔 만나를 주고, 흰 돌을 주겠다고 하셨다.
여기서 흰 돌은 경주에서의 승리자와 재판에서 무죄를 선언 받은 자들에게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의 법정에서는 흰 돌과 검은 돌을 사용해서 유무죄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흰 돌은 무죄를 의미하였고, 검정 돌은 유죄를 의미하였다. 또 노예가 해방될 때 그에게 흰 돌을 주었는데, 때때로 새로운 이름이 그 돌 위에 새겨졌다고 한다. 또 흰 돌은 싸움에서 15번 이상 승리한 투사에게도 주어졌다. 이렇듯 흰 돌은 자유와 명예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흰 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세상을 승리한 그리스도인이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명예를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니골라당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계시록에서는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에 두 번 사용되었다.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배척하였으나 버가모 교회에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
니골라당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로 해석되어지고 있다. 첫째는 교권주의를 의미한다는 설이다. 니골라당에서 ‘니콜라오스’의 어원은 '니코'(niko)와 ‘라오스’(laos)의 합성어이다. ‘니코’(niko) 즉 ‘우세하다’는 뜻이고, ‘라오스’(laos)는 ‘백성’이란 뜻이다. ‘백성에 우세하다,’ 즉 ‘백성을 지배하다’라는 뜻이 니골라당의 의미란 것이다. 그러므로 니골라당은 교권주의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견해는 니골라당이 영지주의를 의미한다는 설이다. 주후 180년경에 프랑스 리옹의 이래내우스(Irenaeus, Against Heresies 1.26.3; 3.10.6)와 주후 200년경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Miscellanies, 3.4.25f)는 안디옥의 니콜라오스(Nicolas of Antioch)가 니골라당으로 알려진 영지주의 이단의 창시자로 보았다. 이래내우스의 제자로서 로마의 감독이 된 히폴리투스(Hippolytus, Refutation of All Heresies, 7.24)도 니콜라오스가 “건전한 교리를 버리고, 삶과 음식 모두에 무관심할 것을 습관적으로 가르쳤다.”고 하였다. 또 클레멘트는 니콜라오스가 금욕주의자가 되었고, 그의 추종자들이 후에 그의 가르침들을 우상숭배와 음행에로 변질시켜 니골라당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 이단의 특징은 육체와 율법을 악하게 보았고, 악한 육신을 다스리기 위한 금욕주의나 육신을 함부로 다루는 방탕주의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이 은혜로 보호받기 때문에 어느 곳에 가서 무엇을 행하던 해 받음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우상의 재물을 먹게 할 뿐 아니라, 음행을 부추겼다.
버가모 교회에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좇을 뿐 아니라, 발람의 교훈을 좇는 무리도 있었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 40년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진입하기 위하여 여리고성 맞는 편 요단강 건너편 모압평지에 진을 친다. 이 때 모압의 왕 발락이 발람을 초대하여 바알의 신전이 있는 브올산에 올라가 이스라엘을 저주토록 하였다. 싯딤이란 곳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 사람들과 알고 지내면서 바알브올을 섬기자,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염병을 퍼트려 2만 4천명이 죽는 엄한 벌을 내리셨다.
염병이 번진 싯딤은 사막문화권이 끝나고 농경문화권이 시작되는 관문과 같은 곳이다. 예로부터 항구도시에는 홍등가가 발달했다.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40년을 유랑하던 이스라엘의 남성들이 농경문화권의 첫 관문인 이곳 싯딤에서 바알종교에 접하게 되었다. 바알은 농사의 신이기 때문에 농사가 잘되기 위해서는 비로써 상징되는 하늘의 남신과 밭으로 상징되는 땅의 여신 사이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실제로 바알종교의식은 바알신전의 남녀 사제들과 예배자들 사이에서 만나 이루어지는 행위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예배행위는 광야에서 오랜 텐트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매혹적인 것으로 받아드려졌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섬기는 야훼는 모습도 없고, 모습을 만들어서도 안 되고, 볼 수도 없었다. 신화도 없고, 여신도 없고, 여사제도 없었다. 성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은 모두가 남성들뿐이었다. 이런 메마른 종교의식에 식상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숭배에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도 끝없이 받았던 유혹이 바로 바알숭배였다. 아무튼 이스라엘사람들의 일부가 싯딤에서 성창과의 행위들을 경험했을 것이고, 그 결과 성적으로 깨끗했던 그들 대부분이 성병에 감염되어 죽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발람의 유혹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계시록은 말하고 있다.
바알종교의 특징은 향락문화에 있다. 돈과 성, money와 sex를 섬기는 현대문화는 현대판 바알종교이다. 현대인들은 돈과 성을 최고의 가치로 숭배하고 있다. money와 sex는 현대인들의 우상이다. 니골라당의 특징은 방탕문화에 있다. 법질서를 무시하고 몸을 함부로 내맡기는 현대문화는 현대판 니골라당이다. money신(神), sex신(神)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향락문화를 섬기는 발람의 교훈을 좇지 말라는 주님의 경고를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한다. 무법과 방탕문화를 좇는 니골라당의 행위와 영지주의적 방탕주의를 버리라는 주님의 경고를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한다.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주실 하나님의 보상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값진 영생이란 보물이다. 그러므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강한 충고를 받들어야 한다.
2-3장에서 일곱 교회들에 주신 말씀들은 공통의 특징들을 갖고 있다. 첫째는 각 교회의 상황에 따라 간략한 인자의 특징이 소개된다는 점이고, 둘째는 각 교회는 행위에 따라서 칭찬과 권면과 책망을 받는다는 점이며, 셋째는 매 교회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강한 충고를 받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넷째는 각 교회에게 이기는 자에게 주실 보상을 약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2장 1-17절에 등장하는 교회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모두 세 교회이다. 이들 교회들에 주신 말씀들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먼저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이 생사여탈권을 가진 분, 곧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등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으로 소개되었고, 문제의 심각성으로 지적된 것이 처음 사랑이 식었다는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특징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사이에 혼인(사랑)서약으로 관계가 맺어진 데 있다. 만일 사랑이 식는다면, 이 혼인이 깨질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혼인(사랑)서약은 사랑해도 그만이고, 사랑이 식어도 그만인 그런 남녀사이의 애정문제하고는 크게 다르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사랑이 있고 없고는 애정문제가 아니라, 생사문제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권태기에 빠진 에베소 교회에 첫사랑을 회복하라(2:5)는 권면을 강한 어조로 주고 있고, 끝까지 그 사랑을 유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줘서 먹게 하겠다(2:7)고 약속하셨다.
에베소 교회는 행위의 수고가 있었고, 고난을 잘 참고 잘 견뎠으며,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여 용납하지 아니하고 배척하였다. 또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였다. 그러나 첫 사랑을 버린 일은 생사가 걸린 반드시 회개해야만 되는 일이었다. 누가복음 10장 38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머무실 때에 마리아는 주님 곁에 앉아서 말씀을 경청하였고, 마르다는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불평하는 마르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다. 말씀을 경청하는 쪽을 택한 마리아가 음식준비에 분주한 마르다보다 좋은 몫을 차지한 것이고, 또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행위의 수고와 인내도 소중한 것이고 칭찬받을만한 것이지만, 첫 사랑을 간직하는 일이 더 소중하고 모든 일에 우선된다는 말씀이다. 부부가 아무리 서로에게 맡겨진 일을 잘하고, 최선을 다해서 가정에 충실하다고해도, 피차 사랑이 식어버려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의무로 사는 부부이지, 행복한 부부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도 부부사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아무리 우리가 열심히 성도의 본분을 다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한다.
서머나 교회는 책망이 없고, 오히려 칭찬과 격려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죽도록 충성하라”(2:10)고 당부하였다. 여기서 ‘충성’은 ‘신실’을 말하고, 신실은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죽기까지 신실하라’ 또는 ‘죽기까지 하나님께 행한 서약을 지키라’ 또는 ‘목숨 바쳐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라’는 말씀이다. 그래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2:11)고 말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주님의 특징을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2:8)으로 서머나 교회에 소개한 것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한 것이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요 11:25-26).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겪고 있었다. 이 당시 터키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큰 도시들마다에는 회당을 중심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 살았고, 그들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설립된 기독교를 크게 핍박하였다. 기독교 핍박의 주된 이유들로는 첫째로 누가 메시아인가라는 견해차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교의 문의 개종자들, 곧 유대교의 손님격이었던 많은 수의 이방인들이 훨씬 자유롭고 오픈된 기독교로 다시 개종했기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이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돌에 한 번 맞고, 수없이 옥에 갇히고, 굶주리고, 헐벗고, 목말랐던 것은 유대인들의 박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죽도록 충성하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월계관을 씌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버가모 교회에 대한 경고는 날카로운 양날 칼을 가진 주님의 입의 말씀으로 시작된다. 버가모 교회에 발람의 가르침과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좇는 이단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속히 오셔서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칼로 그들과 싸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버가모는 사탄이 살고 있고, 그의 왕좌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신실한 증인인 안디바가 순교를 당한 곳이라고 했다. 강진 후에 더 강한 여진을 맞듯이, 그야말로 위기에 위기를 맞고 있는 곳이었다. 이토록 위험하고 살벌한 곳에서조차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을 붙잡고 놓지 않았으며,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는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한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고,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만일 회개치 않으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칼로 그들을 치겠다고 말씀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신실한 믿음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감추어 둔 만나를 주고, 흰 돌을 주겠다고 하셨다.
여기서 흰 돌은 경주에서의 승리자와 재판에서 무죄를 선언 받은 자들에게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의 법정에서는 흰 돌과 검은 돌을 사용해서 유무죄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흰 돌은 무죄를 의미하였고, 검정 돌은 유죄를 의미하였다. 또 노예가 해방될 때 그에게 흰 돌을 주었는데, 때때로 새로운 이름이 그 돌 위에 새겨졌다고 한다. 또 흰 돌은 싸움에서 15번 이상 승리한 투사에게도 주어졌다. 이렇듯 흰 돌은 자유와 명예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흰 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세상을 승리한 그리스도인이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명예를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니골라당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계시록에서는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에 두 번 사용되었다.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배척하였으나 버가모 교회에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
니골라당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로 해석되어지고 있다. 첫째는 교권주의를 의미한다는 설이다. 니골라당에서 ‘니콜라오스’의 어원은 '니코'(niko)와 ‘라오스’(laos)의 합성어이다. ‘니코’(niko) 즉 ‘우세하다’는 뜻이고, ‘라오스’(laos)는 ‘백성’이란 뜻이다. ‘백성에 우세하다,’ 즉 ‘백성을 지배하다’라는 뜻이 니골라당의 의미란 것이다. 그러므로 니골라당은 교권주의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견해는 니골라당이 영지주의를 의미한다는 설이다. 주후 180년경에 프랑스 리옹의 이래내우스(Irenaeus, Against Heresies 1.26.3; 3.10.6)와 주후 200년경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Miscellanies, 3.4.25f)는 안디옥의 니콜라오스(Nicolas of Antioch)가 니골라당으로 알려진 영지주의 이단의 창시자로 보았다. 이래내우스의 제자로서 로마의 감독이 된 히폴리투스(Hippolytus, Refutation of All Heresies, 7.24)도 니콜라오스가 “건전한 교리를 버리고, 삶과 음식 모두에 무관심할 것을 습관적으로 가르쳤다.”고 하였다. 또 클레멘트는 니콜라오스가 금욕주의자가 되었고, 그의 추종자들이 후에 그의 가르침들을 우상숭배와 음행에로 변질시켜 니골라당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 이단의 특징은 육체와 율법을 악하게 보았고, 악한 육신을 다스리기 위한 금욕주의나 육신을 함부로 다루는 방탕주의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이 은혜로 보호받기 때문에 어느 곳에 가서 무엇을 행하던 해 받음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우상의 재물을 먹게 할 뿐 아니라, 음행을 부추겼다.
버가모 교회에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좇을 뿐 아니라, 발람의 교훈을 좇는 무리도 있었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 40년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진입하기 위하여 여리고성 맞는 편 요단강 건너편 모압평지에 진을 친다. 이 때 모압의 왕 발락이 발람을 초대하여 바알의 신전이 있는 브올산에 올라가 이스라엘을 저주토록 하였다. 싯딤이란 곳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 사람들과 알고 지내면서 바알브올을 섬기자,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염병을 퍼트려 2만 4천명이 죽는 엄한 벌을 내리셨다.
염병이 번진 싯딤은 사막문화권이 끝나고 농경문화권이 시작되는 관문과 같은 곳이다. 예로부터 항구도시에는 홍등가가 발달했다.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40년을 유랑하던 이스라엘의 남성들이 농경문화권의 첫 관문인 이곳 싯딤에서 바알종교에 접하게 되었다. 바알은 농사의 신이기 때문에 농사가 잘되기 위해서는 비로써 상징되는 하늘의 남신과 밭으로 상징되는 땅의 여신 사이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실제로 바알종교의식은 바알신전의 남녀 사제들과 예배자들 사이에서 만나 이루어지는 행위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예배행위는 광야에서 오랜 텐트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매혹적인 것으로 받아드려졌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섬기는 야훼는 모습도 없고, 모습을 만들어서도 안 되고, 볼 수도 없었다. 신화도 없고, 여신도 없고, 여사제도 없었다. 성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은 모두가 남성들뿐이었다. 이런 메마른 종교의식에 식상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숭배에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도 끝없이 받았던 유혹이 바로 바알숭배였다. 아무튼 이스라엘사람들의 일부가 싯딤에서 성창과의 행위들을 경험했을 것이고, 그 결과 성적으로 깨끗했던 그들 대부분이 성병에 감염되어 죽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발람의 유혹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계시록은 말하고 있다.
바알종교의 특징은 향락문화에 있다. 돈과 성, money와 sex를 섬기는 현대문화는 현대판 바알종교이다. 현대인들은 돈과 성을 최고의 가치로 숭배하고 있다. money와 sex는 현대인들의 우상이다. 니골라당의 특징은 방탕문화에 있다. 법질서를 무시하고 몸을 함부로 내맡기는 현대문화는 현대판 니골라당이다. money신(神), sex신(神)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향락문화를 섬기는 발람의 교훈을 좇지 말라는 주님의 경고를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한다. 무법과 방탕문화를 좇는 니골라당의 행위와 영지주의적 방탕주의를 버리라는 주님의 경고를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한다.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주실 하나님의 보상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값진 영생이란 보물이다. 그러므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강한 충고를 받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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