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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들의 현주소4(계 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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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137 2008.06.28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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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들의 현주소4(계 3:14-22)

라오디게아는 터키 소아시아도 브루기아 지방의 주요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다. 해발 300미터 높이의 언덕 위에 세워졌으며, 20여리 떨어진 계곡 건너편 더 높은 지역에는 유명한 온천 도시 히에라폴리스(파묵칼레)가 위치하고 있었다. 라오디게아는 수로를 통해서 온천수를 공급받고 있었는데 오는 동안 식어서 미지근하게 되었다. 또 라오디게아는 50여리 떨어진 산지 골로새로부터 냉수를 공급받고 있었는데, 이 물 역시 외부기온이 워낙 높기 때문에 수로를 타고 오는 동안 미지근하게 되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에 도착한 물은 모두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오디게아는 온천물이 주는 치료효과를 누렸을 뿐 아니라, 귓병을 치료하는 특효약과 ‘콜로니온’이라 불리는 안약의 산지로도 이름이 나 있었다. 또 목화와 목축으로 옷감이 생산되던 산업과 금융의 중심지였고, 사치품도 많았다고 한다. 비잔틴 시대에는 주교가 상주했던 도시라고 하니까 그들이 누렸을 번영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주님은 이곳 성도들의 미지근한 믿음을 책망하셨다. 미지근한 믿음은 열정이 식은 믿음을 뜻한다. 주님은 열정이 식은 믿음의 가치를 아주 낮게 보셨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부유하고 싶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헌신이 없는 믿음, 구경꾼의 믿음, 아웃사이더의 믿음생활을 책망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교제를 끊겠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싶다. 식탁교제와 연관된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본문 20절에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세계에서는 식탁교제를 언약체결과 연결 지어 생각했다. 주님과 한 식탁에서 먹을 수 있기 위해서는 주님과 언약관계에 있거나 그 공동체의 회원이어야 한다. 또 주님의 가족이거나 친구이어야 한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 공동체의 회원들이자 가족이고 친구들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의 칭찬을 전혀 받지 못했다. 오히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알았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다. 번영을 누렸던 라오디게아 인들이 영적으로는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통달하였다고 믿는 유대인들에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머리가 있어도 깨닫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하신 것과 같다. 모든 것을 가졌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갖지 못한 자들이고,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무식한 자들이라는 이 현실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더 큰 아이러니는 그들이 그런 실상을 모른다는 데 있다. 그들은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했다. 물질적인 풍요가 곧 바로 영적인 풍요로 이어진다고 착각했다. 물질적인 부요가 영적인 경건을 대신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신앙인들이 많다. 물질적인 성공과 세상적인 성공이 곧 바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따라서 주님은 성공이 곧 축복이라고 믿는 성공지상주의에 대해서 우리에게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주고 있다. 세상에서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먹고 살만하고 입고 살만한 사람들에게 영적인 문제를 점검해 보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영적으로 매우 가난하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영적으로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었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착각 속에 살았고, 하나님을 오해했으며, 잘못 믿고 있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런 문제점을 갖고 있다면, 주님의 권면대로,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야 한다. 부자가 되기 원한다면, 주님께 순도 높은 금을 사서 소유하고,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고 싶다면, 주님의 보혈로 씻긴 흰 옷을 사서 입고, 눈이 밝아지고 싶다면, 주님이 열어 주시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야 한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생명이 재산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교훈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거둔 소출이 많아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비축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기 영혼에게 이렇게 말할 생각을 했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을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주님은 경고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경고한 말씀이다. 그러시면서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고, 깨어있어 주인이 돌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곧 열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라고 하셨다. 그러면 주인의 식탁에서 함께 먹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본문에서 중요한 주제는 누가 부유한 사람인가, 누가 수치를 드러내지 않은 사람인가, 누가 눈이 밝아진 사람인가라는 것이다. 불에 정련한 금을 주님께 산 사람, 흰 옷을 사서 입은 사람,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른 사람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어휘는 ‘사다’는 말인데, 이 ‘사다’는 말은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라”는 말과 연결된다.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비참함을 면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불에 정련한 금’과 ‘흰 옷’과 ‘안약’을 어디서 살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본문은 이것들을 우리 주님께 사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는 수고가 바로 그것들을 살 수 있는 값이라고 말한다. 단순하고 값싼 믿음 그 이상의 ‘고가의 믿음,’ ‘열정을 품은 믿음,’ ‘헌신의 믿음,’ ‘수고의 믿음,’ ‘신실한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고부가 가치의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신실하신 주님, 참되신 증인, 창조의 근본이신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기는 사람은 마치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식탁교제를 하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는 것이다. 첫 번 것은 천국혼인잔치의 참여권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권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구원 받은 자가 누릴 특권이다. 이 두 가지 구원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주님께 ‘불에 정련한 금’과 ‘흰 옷’과 ‘안약’을 사야 한다. 여기서 ‘사다’는 의미는 주님께 우리의 ‘고가의 믿음,’ ‘열정을 품은 믿음,’ ‘헌신의 믿음,’ ‘수고의 믿음,’ ‘신실한 믿음’을 보이고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 받는 것을 말한다. 마태복음 22장을 보면, 혼인잔치에 초대된 사람들 가운데 혼인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손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는 비유가 있다. 주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믿음은 유명무실한 죽은 믿음이요 값싼 믿음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에서 우리 성도들이 힘쓰고 노력해야할 일을 세 가지이다. 영적으로 부유한 자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손수 지어주신 가죽 옷으로 수치를 가린 아담과 이브처럼, 주님께서 보혈의 피로 빨아 희게 한 옷을 입어 죄로 인해 드러난 수치를 가리는 것이며, 주님의 손의 터치를 받아 닫힌 눈이 열려 만물을 밝히 보고 주님께 대한 분명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값싼 믿음이 판을 치고, 온갖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 쓴 눈먼 자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은 참혹한 세상이다. 이 점을 고발한 소설이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이다. 오늘날 사회는 다수의 눈먼 자들의 횡포와 폭력의 지배아래 있고, 또 그것에 빌붙어 살기를 즐겨한다. 그러나 천국혼인잔치와 같은 흥이 되살아나고, 진정한 의미의 주권이 행사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눈뜬 소수자들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아니한 한사람, ‘안과의사의 아내’로 인해서 인간관계가 점차 회복되고, 인간애가 살아나고, 연대의식이 살아나고, 나눔의 정신이 살아나고, 타인에 대한 책임의식이 살아나고, 그런 이들의 희생과 헌신과 열정을 통해서 오랫동안 오물구덩이 속에서 헤매던 인간들이 벌거벗고 깨끗하게 물로 씻듯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한 사람의 열정과 헌신으로 많은 사람이 흰 옷으로 갈아입게 되고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3장 20절은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주님과 함께 먹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있다. 여기서 음식을 먹는 행위는 천국 혼인잔치를 상징하는 것이고, 지상에서는 예배 때의 성만찬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서의 성만찬은 천국잔치를 미리 맛보고 그 축복을 미리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장차 오실 메시아가 가져올 ‘올람하바’(장차올 세계)를 희망하는 유대인의 식탁은 제단에 가깝다. 특히 저녁식사는 매우 종교적이다. 장차올 메시아 왕국에서 먹고 마시게 될 친교의 상징이다. 유대문헌인 에녹1서 62장 14절도 "그리고 인자와 함께 그들이 먹고 자고 영원히 일어날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오신 구세주 메시아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는 성만찬은, 상징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장차 임할 영원한 나라의 천국혼인잔치를 미리 맛보고 경험하는, 이미 우리 가운데 한 차례 오셨고, 지금은 영으로서 임재하시는 주님과의 친교식사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맞이한 자들에게 주어질 메시아 만찬(Messianic banquet)은 죽어서 참여할 미래의 잔치로 끝나지 않고, 동시에 지금 여기서 맛보고 경험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인 것이다. 이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이 진정 복된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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