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과 천상 예배(계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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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과 천상 예배(계 4:1-11)
계시록 1장의 인자가 천상의 환상이었다면, 2-3장의 일곱 교회는 지상의 환상이었다. 그리고 다시 4-5장의 보좌방은 천상의 환상이다. 계시록에서는 천상의 환상과 지상의 환상이 교대로 반복된다. 4-5장이 천상의 환상이기 때문에 6장에서는 다시 지상의 환상으로 바뀐다.
계시록 1장의 인자의 환상이 멜기세덱 계열의 영원한 대제사장과 만왕의 왕과 신실한 예언자 그리스도였다면, 2-3장의 지상의 교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세운 교회들이다. 히브리서의 언급대로, 그리스도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과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로서 자기 피로 세운 지상의 교회들을 위해서 천상의 참 성전에서 섬기시며,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며, 우리를 궁극적으로 구원하실 분이시다.
그러므로 계시록 4-5장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섬기시는 천상의 성전에서 이뤄지는 예배의 모습이다. 계시록 1-6장까지를 넓은 그림으로 보면, 1-3장이 천상의 그리스도와 고난당하는 지상 교회들의 모습이고, 4-6장은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과 갈등하는 세상사의 모습이다. 그러나 4-5장만을 따로 세밀하게 살펴보면, 하나님을 모신 천상의 참 성전과 그곳에서 펼쳐지는 참 예배의 모습을 보게 된다.
계시록 4장을 잘 이해하려면 먼저 지상 성막의 구조부터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한 성막의 양식은 뜰과 성소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 출입구 쪽에 번제단이 있고, 번제단과 성막 입구사이에 물두멍이 있었다. 성막 출입문을 열고 성소에 들어서면 왼쪽에 일곱 줄기 금등대가 있었고, 다시 성막휘장을 열고 지성소에 들어서면, 서쪽 벽면에 법궤가 있었다. 이 법궤의 뚜껑을 ‘시은소’라고 불렀는데, 그곳이 하나님의 보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황금으로 만든 케루빔 천사 둘을 법궤의 뚜껑 양끝에 세워 시은소를 감싸게 하였는데, 계시록 4장에 나오는 보좌 주변의 네 생물과 동일한 천사들이다. 성막의 벽과 모든 기물은 금으로 입혔고, 일곱 줄기 등대와 케루빔 천사들은 황금덩어리를 두들겨서 만들었다. 그리고 천장의 앙장들과 휘장 문에는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케루빔 천사들을 수놓아 길게 늘어뜨렸다. 따라서 황금빛 찬란한 성막내부와 그곳에 놓인 기물들, 특히 법궤와 뚜껑 위의 케루빔 천사들의 모습은 하늘 보좌방의 모습을 축소시켜 놓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계시록 4장 1절의 ‘하늘에 열린 문’은 성막 문을 연상케 하고, 2-3절의 ‘하늘에 보좌’는 성막 지성소의 법궤 위 시은소를 연상케 하며, 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습이 재스퍼(jasper)와 루비(ruby)와 같았고, 에메랄드(emerald)와 같은 무지개가 보좌를 둘렀다고 했는데, 이는 성소와 법궤와 케루빔 천사들의 황금빛 광휘를 연상케 한다. 또 4절의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보좌를 둘러싸고 앉은 24장로들은 유대교 회당예배 때에 단 앞에 앉는 장로들을 연상케 하며, 또 5절의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는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줄기 등대’는 성소의 금 등대를, 그리고 6절의 ‘수정처럼 맑은 유리 바다’는 성막 뜰에 있는 물두멍을, 그리고 6-9절의 ‘네 생물’은 법궤 위의 케루빔 천사들을 연상케 한다. 무엇보다도 네 생물과 24장로가 밤낮 쉬지 않고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보낸다는 점에서 4-5장의 장면은 지상 성막에서의 예배의 모습을 연상케 하며 참 성전인 하늘 성소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원형을 보여준다.
계시록 4장 3-5절의 ‘보좌’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전능하심의 상징이다. 보좌에서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5절의 ‘일곱 등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서 ‘전지’ 곧 완전한 지혜와 지식을 상징한다. 네 생물들의 여섯 날개들 안팎에 눈이 가득한 것도 지혜와 지식을 상징한다.
6절의 ‘보좌 앞에 있는 수정처럼 맑은 유리 바다’는 성막 뜰에 있었던 물두멍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이나 제단에서 화제(火祭)를 하나님 앞에 사르기 전에 수족을 씻기 위한 물통이었다.
물은 침례의 모형이다. 놋으로 만든 물두멍의 물로 수족을 씻는 것은 놋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와 침례를 통해서 죄를 씻고 하나님이 계신 성소에 나아갈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또 제단에 나아가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고 예배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성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 하라”는 출애굽기 30장 20절의 말씀은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4장 6절의 ‘수정처럼 맑은 유리 바다’가 15장 2절에서는 ‘불이 섞인 유리 바다’로 설명되고 있다. 이 바다는 홍해를 상징한다. 히브리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건너야했던 죽음의 바다이다. 그러나 이 바다를 건너야 구원이 있다. 그들은 이 죽음의 바다를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희생자 없이 무사히 건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홍해도하를 그리스도인들의 침례의 모형으로 설명하였다. 침례는 영적으로 죽음의 바다에서 죽고, 구원의 해변에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계시록 15장 2-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여기서 불이 섞인 유리 바다는 사단과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들의 활동무대요, 성도들에게 시련과 고통을 안겨주는 고해(苦海)요, 세상이다. 고통의 바다를 이기고 극복한 성도들이 구원의 해변에 서서 큰 구원자요, 대승을 이끈 성도의 지도자들인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물두멍과 침례가 상징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제사장들이 물두멍에서 씻은 후에 성소에 들어 갈 수 있었고, 번제단 앞에 나아가 제물을 바칠 수 수 있었던 것처럼, 성도들은 바다로 상징되는 죽음의 세상을 건너 영원한 나라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침례는, 요나의 경우에서 보듯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 바다에서 죽고, 구원의 해변에서의 부활을 상징한다.
그리스신화에서도 물은 흑암과 죽음을 상징한다. 그 반대로 해변은 흑암과 죽음의 터널을 벗어나 부활한 자들이 밝고 안전한 곳에 도달한 상태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상징되는 물은 빛과 환희의 세계인 구원의 해변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가 침례를 받는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4장 6-9절의 ‘네 생물’은 에스겔 1장에 나오는 네 생물들과 매우 흡사하다. 그들은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의 얼굴 모습을 가진 살아있는 네 생물들이다. 그들은 각각 날개들을 가지고 있는데, 계시록 4장은 여섯 날개를, 에스겔 1장은 네 개의 날개를 언급하고 있다. 에스겔서의 경우 날기 위한 날개가 두 개 더 있었을 것으로 보아 실제로 날개는 여섯 개였을 것이다. 그리고 날개들에는 눈들이 가득했다.
이들 네 생물들은 매우 중요한 천사들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 네 생물들이 사복음서 즉 사자는 마태복음을, 송아지는 마가복음을, 사람은 누가복음을, 그리고 독수리는 요한복음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경이 형성되지 아니한 1세기 말 상황에서 이들 네 생물들이 사복음서를 상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들 네 생물들이 사람의 네 가지 덕성 즉 사자는 숭고함과 충성을, 송아지는 힘을, 사람은 지능을, 그리고 독수리는 속도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 네 가지 덕성이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은 경건한 덕성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계시록 4장의 네 생물들은 지상의 모든 생물들을 하나님께서 돌보고 계신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된다. 사자는 야생동물을, 송아지는 가축을, 사람은 인류를, 그리고 독수리는 새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날개에 붙은 수많은 눈들은 지상의 생물들에게 발생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지켜보시는 것을 상징할 수 있다.
그러나 계시록 4장에서는 이들 네 생물들이 무엇을 상징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이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세세무궁토록 돌리는 것이다. 이들이 부른 찬양을 예배학에서는 상투스(sanctus) 또는 삼성창이라 부른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예배 때에 이 상투스를 불러오다가 개신교 예배에서 사라졌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삼위의 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할 때 세 번 ‘거룩’을 찬양한다. 대표적인 예가 이사야서 6장 3절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와 계시록 4장 8절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이다. 이 상투스를 숫자로 표시한다면, 777이 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완전하시고, 완전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시다. 그분은 완벽하게 거룩하시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룩(7), 거룩(7), 거룩(7)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거룩하다’의 뜻은 ‘완전하다’이다.
24장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정확하게 누구인가 중요하지 않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24장로들은 높은 계급의 천사일 수도 있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상징할 수도 있다. 24장로들 가운데 12장로들은 모든 신약의 성도들을 대표하는 12사도들일 가능성이 있고, 다른 12장로들은 모든 구약의 성도들을 대표하는 야곱의 12아들 또는 12부족일 가능성이 있다.
24장로들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찬양할 뿐 아니라, 자기들의 관을 보좌 앞에 내려놓고 있다. 그들의 이 행위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완전한 복종을 상징한다. 관이 상징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 성취하고 소유하고 누리게 된 그 어떤 축복과 생명조차도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심으로 왔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삶을 살려는 열망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관이 상징하는바 우리의 재산과 명예와 목숨조차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내려놓고 그 분을 경배해야 한다. 그분의 뜻에 따라 살겠다는 신념으로 우리의 헌신을 재 다짐해야 한다. 네 생물과 24장로들처럼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 그분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삶, 그분의 존귀와 영광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산 예배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예배이다.
계시록 1장의 인자가 천상의 환상이었다면, 2-3장의 일곱 교회는 지상의 환상이었다. 그리고 다시 4-5장의 보좌방은 천상의 환상이다. 계시록에서는 천상의 환상과 지상의 환상이 교대로 반복된다. 4-5장이 천상의 환상이기 때문에 6장에서는 다시 지상의 환상으로 바뀐다.
계시록 1장의 인자의 환상이 멜기세덱 계열의 영원한 대제사장과 만왕의 왕과 신실한 예언자 그리스도였다면, 2-3장의 지상의 교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세운 교회들이다. 히브리서의 언급대로, 그리스도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과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로서 자기 피로 세운 지상의 교회들을 위해서 천상의 참 성전에서 섬기시며,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며, 우리를 궁극적으로 구원하실 분이시다.
그러므로 계시록 4-5장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섬기시는 천상의 성전에서 이뤄지는 예배의 모습이다. 계시록 1-6장까지를 넓은 그림으로 보면, 1-3장이 천상의 그리스도와 고난당하는 지상 교회들의 모습이고, 4-6장은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과 갈등하는 세상사의 모습이다. 그러나 4-5장만을 따로 세밀하게 살펴보면, 하나님을 모신 천상의 참 성전과 그곳에서 펼쳐지는 참 예배의 모습을 보게 된다.
계시록 4장을 잘 이해하려면 먼저 지상 성막의 구조부터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한 성막의 양식은 뜰과 성소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 출입구 쪽에 번제단이 있고, 번제단과 성막 입구사이에 물두멍이 있었다. 성막 출입문을 열고 성소에 들어서면 왼쪽에 일곱 줄기 금등대가 있었고, 다시 성막휘장을 열고 지성소에 들어서면, 서쪽 벽면에 법궤가 있었다. 이 법궤의 뚜껑을 ‘시은소’라고 불렀는데, 그곳이 하나님의 보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황금으로 만든 케루빔 천사 둘을 법궤의 뚜껑 양끝에 세워 시은소를 감싸게 하였는데, 계시록 4장에 나오는 보좌 주변의 네 생물과 동일한 천사들이다. 성막의 벽과 모든 기물은 금으로 입혔고, 일곱 줄기 등대와 케루빔 천사들은 황금덩어리를 두들겨서 만들었다. 그리고 천장의 앙장들과 휘장 문에는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케루빔 천사들을 수놓아 길게 늘어뜨렸다. 따라서 황금빛 찬란한 성막내부와 그곳에 놓인 기물들, 특히 법궤와 뚜껑 위의 케루빔 천사들의 모습은 하늘 보좌방의 모습을 축소시켜 놓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계시록 4장 1절의 ‘하늘에 열린 문’은 성막 문을 연상케 하고, 2-3절의 ‘하늘에 보좌’는 성막 지성소의 법궤 위 시은소를 연상케 하며, 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습이 재스퍼(jasper)와 루비(ruby)와 같았고, 에메랄드(emerald)와 같은 무지개가 보좌를 둘렀다고 했는데, 이는 성소와 법궤와 케루빔 천사들의 황금빛 광휘를 연상케 한다. 또 4절의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보좌를 둘러싸고 앉은 24장로들은 유대교 회당예배 때에 단 앞에 앉는 장로들을 연상케 하며, 또 5절의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는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줄기 등대’는 성소의 금 등대를, 그리고 6절의 ‘수정처럼 맑은 유리 바다’는 성막 뜰에 있는 물두멍을, 그리고 6-9절의 ‘네 생물’은 법궤 위의 케루빔 천사들을 연상케 한다. 무엇보다도 네 생물과 24장로가 밤낮 쉬지 않고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보낸다는 점에서 4-5장의 장면은 지상 성막에서의 예배의 모습을 연상케 하며 참 성전인 하늘 성소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원형을 보여준다.
계시록 4장 3-5절의 ‘보좌’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전능하심의 상징이다. 보좌에서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5절의 ‘일곱 등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서 ‘전지’ 곧 완전한 지혜와 지식을 상징한다. 네 생물들의 여섯 날개들 안팎에 눈이 가득한 것도 지혜와 지식을 상징한다.
6절의 ‘보좌 앞에 있는 수정처럼 맑은 유리 바다’는 성막 뜰에 있었던 물두멍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이나 제단에서 화제(火祭)를 하나님 앞에 사르기 전에 수족을 씻기 위한 물통이었다.
물은 침례의 모형이다. 놋으로 만든 물두멍의 물로 수족을 씻는 것은 놋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와 침례를 통해서 죄를 씻고 하나님이 계신 성소에 나아갈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또 제단에 나아가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고 예배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성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 하라”는 출애굽기 30장 20절의 말씀은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4장 6절의 ‘수정처럼 맑은 유리 바다’가 15장 2절에서는 ‘불이 섞인 유리 바다’로 설명되고 있다. 이 바다는 홍해를 상징한다. 히브리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건너야했던 죽음의 바다이다. 그러나 이 바다를 건너야 구원이 있다. 그들은 이 죽음의 바다를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희생자 없이 무사히 건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홍해도하를 그리스도인들의 침례의 모형으로 설명하였다. 침례는 영적으로 죽음의 바다에서 죽고, 구원의 해변에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계시록 15장 2-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여기서 불이 섞인 유리 바다는 사단과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들의 활동무대요, 성도들에게 시련과 고통을 안겨주는 고해(苦海)요, 세상이다. 고통의 바다를 이기고 극복한 성도들이 구원의 해변에 서서 큰 구원자요, 대승을 이끈 성도의 지도자들인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물두멍과 침례가 상징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제사장들이 물두멍에서 씻은 후에 성소에 들어 갈 수 있었고, 번제단 앞에 나아가 제물을 바칠 수 수 있었던 것처럼, 성도들은 바다로 상징되는 죽음의 세상을 건너 영원한 나라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침례는, 요나의 경우에서 보듯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 바다에서 죽고, 구원의 해변에서의 부활을 상징한다.
그리스신화에서도 물은 흑암과 죽음을 상징한다. 그 반대로 해변은 흑암과 죽음의 터널을 벗어나 부활한 자들이 밝고 안전한 곳에 도달한 상태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상징되는 물은 빛과 환희의 세계인 구원의 해변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가 침례를 받는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4장 6-9절의 ‘네 생물’은 에스겔 1장에 나오는 네 생물들과 매우 흡사하다. 그들은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의 얼굴 모습을 가진 살아있는 네 생물들이다. 그들은 각각 날개들을 가지고 있는데, 계시록 4장은 여섯 날개를, 에스겔 1장은 네 개의 날개를 언급하고 있다. 에스겔서의 경우 날기 위한 날개가 두 개 더 있었을 것으로 보아 실제로 날개는 여섯 개였을 것이다. 그리고 날개들에는 눈들이 가득했다.
이들 네 생물들은 매우 중요한 천사들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 네 생물들이 사복음서 즉 사자는 마태복음을, 송아지는 마가복음을, 사람은 누가복음을, 그리고 독수리는 요한복음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경이 형성되지 아니한 1세기 말 상황에서 이들 네 생물들이 사복음서를 상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들 네 생물들이 사람의 네 가지 덕성 즉 사자는 숭고함과 충성을, 송아지는 힘을, 사람은 지능을, 그리고 독수리는 속도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 네 가지 덕성이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은 경건한 덕성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계시록 4장의 네 생물들은 지상의 모든 생물들을 하나님께서 돌보고 계신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된다. 사자는 야생동물을, 송아지는 가축을, 사람은 인류를, 그리고 독수리는 새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날개에 붙은 수많은 눈들은 지상의 생물들에게 발생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지켜보시는 것을 상징할 수 있다.
그러나 계시록 4장에서는 이들 네 생물들이 무엇을 상징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이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세세무궁토록 돌리는 것이다. 이들이 부른 찬양을 예배학에서는 상투스(sanctus) 또는 삼성창이라 부른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예배 때에 이 상투스를 불러오다가 개신교 예배에서 사라졌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삼위의 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할 때 세 번 ‘거룩’을 찬양한다. 대표적인 예가 이사야서 6장 3절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와 계시록 4장 8절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이다. 이 상투스를 숫자로 표시한다면, 777이 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완전하시고, 완전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시다. 그분은 완벽하게 거룩하시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룩(7), 거룩(7), 거룩(7)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거룩하다’의 뜻은 ‘완전하다’이다.
24장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정확하게 누구인가 중요하지 않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24장로들은 높은 계급의 천사일 수도 있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상징할 수도 있다. 24장로들 가운데 12장로들은 모든 신약의 성도들을 대표하는 12사도들일 가능성이 있고, 다른 12장로들은 모든 구약의 성도들을 대표하는 야곱의 12아들 또는 12부족일 가능성이 있다.
24장로들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찬양할 뿐 아니라, 자기들의 관을 보좌 앞에 내려놓고 있다. 그들의 이 행위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완전한 복종을 상징한다. 관이 상징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 성취하고 소유하고 누리게 된 그 어떤 축복과 생명조차도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심으로 왔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삶을 살려는 열망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관이 상징하는바 우리의 재산과 명예와 목숨조차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내려놓고 그 분을 경배해야 한다. 그분의 뜻에 따라 살겠다는 신념으로 우리의 헌신을 재 다짐해야 한다. 네 생물과 24장로들처럼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 그분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삶, 그분의 존귀와 영광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산 예배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예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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