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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천상의 백성(계 7: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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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3,241 2008.07.25 15:34

본문

구원받은 천상의 백성(계 7:1-17)

계시록 7장은 천상의 환상이다. 지상에서 펼쳐질 일곱 나팔재앙을 피한 구원받은 큰 무리에게 주어진 '안식'에 관한 환상이다. 이사야서 43장 1절에서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한 것처럼, 이들 천상에 운집한 셀 수 없는 무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환상에서 천상의 구원받은 백성과 지상의 저주받을 백성이 구별되고, 철저하게 분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시 103:12), 하늘의 백성과 땅의 백성이 멀리 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계시록 7장 1절에 네 천사가 나온다. 그들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네 바람을 붙잡고, 땅이나 바다나 모든 나무에 불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여기서 ‘땅의 네 모퉁이’는 동서남북 지구를 말하고, ‘네 천사’는 “땅과 바다를 해하는 권세를 받은”(2절) 자들이다. 그들은 여섯 번째 나팔재앙 때에 놓일 유프라테스 강에 매여 있던 네 천사들과 관련된다.
중요한 것은 영원한 멸망을 상징하는 그 어떤 재앙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정된 자들에게는 미치지 않는다는 점이고, 생사화복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땅에서 연단을 위한 고난을 당할지언정 결코 재앙을 받지 않는다. 그들의 몫은 영생의 복이지 저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3절의 말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는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계시록에서 볼 수 있는 두 백성의 철저한 분리는 구약성서에서 그 모형을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모형은 노아의 방주와 홍수심판에서 볼 수 있다(창 6-8장). 홍수 심판 때에 하나님의 사람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는 안전한 방주에 피신하여 재앙을 면하였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홍수로 재앙을 당했다. 구원의 방주에 탄 하나님의 사람들과 창일한 물속에서 참담하게 죽어 가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대조적인가! 여기서 대홍수는 영멸재앙의 모형이다.
두 번째 모형은 소알로 피신한 롯과 두 딸과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타는 소돔과 고모라에 남은 불행한 사람들에서 볼 수 있다. 천사들의 경고를 받고 안전한 곳에 피신한 롯과 두 딸의 안도와 불세례를 받아 타 죽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대조적인가! 여기서 소돔의 멸망은 영멸재앙의 모형이다.
세 번째 모형은 출애굽 사건 때 열 가지 재앙을 면한 고센 땅에 분리된 히브리 민족과 열 가지 재앙들을 고스란히 당한 이집트인들에서 볼 수 있다. 고센 땅의 히브리인들이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어린양의 피는 계시록에서 말한 ‘인침’과 깊은 관련 있다. 양의 피를 발라 장자들과 모든 맏배의 죽음을 면한 히브리인들의 안도와 시체들을 앞에 놓고 통곡하는 이집트인들의 모습이 얼마나 대조적인가! 여기서 장자재앙은 영멸재앙의 모형이다.
네 번째 모형은 히브리인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해변에 운집하여 부르는 해방의 노래, 구원의 노래와 붉은 바다 속에서 허우적이며 죽어가는 이집트 마병대의 모습이 얼마나 대조적인가! 여기서 홍해의 물은 영멸재앙의 모형이다. 계시록은 이런 대조적인 모습들을 상기시켜줌으로써 시편 1편의 노래처럼, 우리가 서야할 자리, 앉아야할 자리, 걸어야할 길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약성서에는 ‘인침’ 곧 ‘도장 찍음’이란 말이 여러 번 쓰였다. 특히 바울은 구원의 상징인 천국 ‘기업’(땅)의 ‘약속’(약정서)의 ‘보증’(선수금)과 ‘인침’(인감 찍음)으로써 성령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고 에베소서 1장 13-14절과 고린도후서 1장 21-22절에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인침’은 구원의 보증이 되시는 성령님을 선물로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사야서 43장 1절에서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한 것처럼, ‘인침’은 하나님의 것,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
계시록 7장 4절에 유대인 열두지파에서 인 맞은 자가 십사만 사천 명으로 나온다. 각 지파마다 일만 이 천 명씩 선별되었다. 이 숫자를 문자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상징적인 숫자로 볼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역사적으로 약간의 변동이 있어왔다. 요셉 지파는 므낫세 지파(민 13:11)로 불렸고, 레위 지파를 빼고 요셉의 두 번째 아들인 에브라임을 넣어 지파족장으로 삼기도 하였다. 계시록 7장에서는 레위와 요셉이 들어간 대신에 단과 에브라임이 빠졌다. 단 지파의 경우, 확실히 무슨 문제가 있었던 같다. 다른 지파들은 후손들이 생존해 있는 반면, 단 지파만큼은 지금도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단 지파가 단군의 조상일 것이란 억측도 있지만, 우스개로 하는 말이지 사실성은 희박하다.
‘십사만 사천’은 뒤에 나오는 ‘셀 수 없는 큰 무리’와 동일 집단일 수도 있고, 다른 집단일 수도 있다. 만일 다른 집단이라면, ‘십사만 사천’은 열두 지파에서 각각 12,000명씩 뽑힌 유대인 집단일 것이고, ‘십사만 사천’이 ‘셀 수 없는 큰 무리’와 같은 집단이라면, ‘십사만 사천’이 문자적인 숫자이기보다는 상징적인 숫자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144,000는 144x1000에서 나온 숫자인데, 계시록 21장 17절을 근거로 볼 때, 144는 새 예루살렘 성벽의 두께이고, 1,000은 ‘영원’을 뜻한다. 또 144는 12x12에서 만들어진 숫자이다.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를 의미할 수 있다. 또 12는 3(하나님)x4(세상/땅)에서 나온 숫자일 수 있다. 3은 성 삼위 하나님을, 4는 세상과 땅을 의미한다.
중요하고 명백한 것은 이스라엘에서 구원 받을 사람이 각 지파에서 공평하게 문자적인 12,000명씩 144,000명만 선택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숫자는 지나치게 운명적이고 획일적이며, 인간의 책임과 응답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신구약성서 메시지에 어긋난다. 그렇기 때문에 ‘십사만 사천’을 ‘셀 수 없는 큰 무리’와 동일한 숫자로 볼 수밖에 없고, ‘십사만 사천’이란 숫자를 문자적인 숫자가 아닌 상징적인 숫자로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십사만 사천’은 9절에 언급된,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와 동일한 숫자이고,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이며, “흰 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10절)고 외치며, 승리의 노래,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다(계 15:2-3).
이들 ‘십사만 사천’은 14절의 말씀처럼, 큰 환란을 당하였지만, 춘향이처럼 끝까지 믿음의 정절을 지킨 사람들이다. 그것을 상징하는 말이 어린 양의 피로 자기 옷을 희게 빨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환란’은 ‘재앙’하고 다르다. 환란은 믿음의 연단을 위해 잠시 받는 시련을 말하는 것이고, 재앙은 불신자들이 당할 저주를 말하는 것이다. 계시록 7장은 성도들이 ‘대 환난’을 잘 견디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후에 구원받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도열해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보좌에 앉으신 이’를 섬기는 장면이다. 이들 승리자들이 받을 보상과 위로는 보좌에 앉으신 이가 친히 그들의 보호막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하며,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아니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배고픔, 목마름, 태양열, 눈물은 큰 환난의 내용이자 상징들이다.
순교사를 보면, 박해 중에 성도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배고픔이다. 곤장, 주리틀림, 각종 고문, 옥살이보다 더 고통스런 것이 배고픔과 목마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까? 동일한 내용이 이사야 49장 10절에서 발견된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
이사야서와 요한 계시록에서 나타난 메시아상은 유대교인들이 고대하는 ‘군주적 메시아상’하고 비슷한 면이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메시아상은 모성적이고 여린 십자가에 못 박힌 어린양 구세주이다. 이 메시아상은 유대교인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기독교만의 독특한 메시아상이다. 그러나 계시록에서의 메시아상은 어린양으로 설명되기는 했어도, 부성적이고 강한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심판주, 재림주이시다. 천상 보좌방의 어린양으로 묘사된 것만 아니라면, 유대교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상과 거의 비슷하다. 그렇더라도 다른 점이 더 많다.
첫째, 유대교인들의 종말론은 내세적이지 않고 현세적이다. 계시록에 묘사된 천상의 메시아를 수용하기 어렵다.
둘째, 유대교인들의 종말론은 우주적인 것보다 민족적이다. 계시록에 묘사된 우주적 메시아를 수용하기 어렵다.
셋째, 유대교인들의 종말론은 모세나 다윗과 같은 순수인간 메시아에서 출발되기 때문에 천상에서 내려오는 메시아를 수용하기 어렵다.
넷째, 유대인 또는 유대교에 기우려진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 재림 직후에 유대왕국으로써 천년왕국이 출범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보통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 재림 직후에 있을 문자적인 천년왕국을 믿지 않는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죽은 직후부터 낙원에서 복된 삶을 누리다가 그리스도의 지상재림 직후에는 즉시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시록 7장의 장면은 구원 받은 성도들이 보상과 위로를 받는 낙원의 상황을 보여준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들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면서 천국생활을 맛보고, 죽어서 낙원에 이른 후에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도열하여 하나님의 성전에서 ‘네 생물’과 ‘24 장로들’과 ‘천사’들과 더불어 밤낮으로 ‘보좌에 앉으신 이’를 섬기게 된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께서 재림을 하시게 되면, 그분과 함께 모든 성도들도 부활하여 흰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분의 뒤를 따라 지상으로 내려와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에서 새 인생을 출발하게 된다. 하늘 보좌방 앞에 운집한 승리자들의 대열에 끼는 성도들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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