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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짐승 적그리스도(계 1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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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773 2008.08.20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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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짐승 적그리스도(계 13:1-10)

요한계시록 13장 1절에서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상징이다. 바다는 음부 곧 죽음의 세계를 상징한다. 또는 복음서에 실린 예수님의 표현처럼 ‘악하고 음란한 세상’을 상징한다. 따라서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의 괴수를 상징한다. 이 괴수는 사단의 오른팔로써 칼의 권세를 가진 ‘악하고 음란한 세상’의 통수권자인 제왕(帝王)을 말한다. 계시록은 그를 적그리스도로 표현했다.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란 표현은 제왕들과 제국들을 상징한다. 열 뿔에 있는 왕관들과 일곱 머리에 있는 신성모독의 이름들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의 제왕들이 자칭 신이라 하여 하나님의 신성을 모방하고 그 영광을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곱 머리 열 뿔의 모형은 다니엘서 7장에 있다. 일곱 머리에서 머리는 제국 또는 왕국을 상징한다. 여기서 일곱은 바벨론, 메데파사, 마케도니아, 소아시아, 수리아, 이집트, 로마를 합한 숫자이다. 열 뿔은 이들 나라들의 제왕들을 말한다.

계시록에서 용은 사단을 상징한다. 사단도 바다에서 나온 첫째 짐승 적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일곱 머리 열 뿔의 소유자로서 일곱 머리에 왕관들을 쓰고 있다. 사단과 적그리스도를 일곱 머리 열 뿔로 묘사한 것은 하나님을 대항하고 교회와 성도를 탄압하는 악하고 음란한 나라들과 박해자들의 배후에 사단이 있고, 사단이 배후세력의 몸통이란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사단이 몸통이면, 적그리스도는 깃털에 불과하다. 사단과 적그리스도가 다른 점은 사단은 일곱 머리에 왕관들을 쓰고 있고, 적그리스도는 열 뿔에 왕관들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일곱 머리로 상징된 악하고 음란한 나라들의 머리에 있는 왕관들은 패권의 상징이다. 열 뿔로 상징된 악하고 음란한 제왕들의 왕관들은 권력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한 권력들은 사단이 부여한 악하고 음란한 것들이다. 사람을 살리는 권력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권력이고, 세상을 살리는 권력이 아니라, 세상을 무서운 심판과 재앙에로 몰아넣는 권력이다.

계시록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의 백성을 탄압하는 자들을 ‘짐승’으로 묘사하였는데, 적그리스도를 말한다. 이들 제왕들의 머리에 신성모독의 이름들이 있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신성을 모방하고 그 영광을 찬탈하기 때문이다.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유한한 것들이 스스로 신성을 주장하고 신전을 만들며 자신들을 본떠 만든 우상들에게 백성들로 하여금 절하고 분향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황제숭배’라 부르는데, 이것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는 제1계명을 어기는 중대한 범죄인 것이다.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율리우스 시저, 로마의 초대 황제들인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가 사후에 로마 상원에 의해서 신으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박해시대에는 신전에 나와 분향한 사람들에게 증서를 발부하기도 하였다.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환상을 봤던 때의 황제인 도미티아누스는 주화에 자신의 옆얼굴과 ‘주와 하나님’(DOMINUS ET DEUS)이란 단어를 새겨 넣게 하였다. 바울도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에서,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한다.”고 지적하였다.

계시록 13장 2절의 ‘짐승의 모양이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다’에서 표범은 헬라, 곰은 메데 파사, 사자는 바벨론을 상징한다. 그런데 사단인 용은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적그리스도에게 주고 있고, 적그리스도는 사단의 권세를 위임받고 있다. 성서적으로 인간조직의 권위와 권력은 하나님의 위임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의 권위와 권세도 하나님의 위임에 의한 것이라 해야 옳겠지만, 계시록에서는 그의 권위와 권세를 하나님의 위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단이 위임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대항하는 권위와 권세는 사단의 위임에 의한 권세이지, 하나님의 위임에 의한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해 진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정의를 위해서 적그리스도의 세력에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세상권세에 복종하라는 바울과 베드로의 정치 윤리적 권면은 이 점에 있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시록은 오히려 인내와 믿음으로써 성도들이 끝까지 거짓 진리에 대항하여 맞설 것을 권면하고 있다.

3-4절,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겠느냐? 하더라.”에서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다가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것’은 어린양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모방과 표절이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적그리스도를 따른다.’라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무지몽매함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과 귀머거리 됨을 의미한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인 적그리스도는 미가엘 천사장의 적수로 묘사되었다. 이 짐승 적그리스도는 두 가지를 표절하고 있다. 이 짐승이 “죽게 되었던 상처”로부터 나은 자로 기술되고 있으며,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겠느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죽게 되었던 상처”로부터 나았다는 것은 죽임을 당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모방과 표절이다. 설사 짐승에게 그와 같은 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사람을 살리고 복주는 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을 괴롭게 하고 죽이는 능력이다. 따라서 그를 따르는 자들은 모두 불행하게 될 것이고, 재앙과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겠느냐?”라는 것은 대천사인 미가엘 이름의 뜻인 “누가 하나님과 같겠는가?”와 “누가 그와 겨루어 싸우겠는가?”를 모방하고 표절한 것이다. 이들 모방과 표절은 모두 다 사람들을 속여서 지옥에 끌고 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적그리스도인 짐승은 자기가 마치 추종자들에게 빛과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처럼 꾸미고 있고, 큰 권능을 소유한 것처럼 속이고 있기 때문에 그의 기만술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계시록의 메시지이다. 용과 짐승은 만들어진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없고, 그것을 줄 수 있는 분들은 오직 ‘보좌에 앉으신 이’와 그의 곁에 계신 속죄양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확실하게 알고, 그리스도의 편에서 용과 짐승의 괴롭힘에 참고 싸워서, 승리자들의 대열에 합류할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구원의 해변에 서서 승리의 노래,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구원의 노래, 해방의 노래를 목 놓아 부르라는 것이 계시록의 메시지이다.

계시록 13장 5절의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았다.”에서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은 자신을 ‘주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분향하게 하는 뻔뻔스럽고 가증스런 주둥아리를 말하는 것이다. 아무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단의 영을 뒤집어 쓴 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역사적으로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니시우스로 주장한 것을 비롯해서 로마의 황제들이 신성을 주장하였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왕이 ‘가미사마’ 또는 ‘천황’이라 부르며 신성(神性)을 주장하면서 ‘황거요배’ 또는 ‘동방요배’(東方遙拜)를 강요한 사실이 있다. 정오 사이렌 소리가 나면 예배 중이라도 일제히 일어서서 동쪽을 향해 절을 해야 했다. 일제 강점기 말엽 신사참배가 심하던 때에는 예배당에 일본에서 가장 높은 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벽에다 걸어놓고 절을 하게 했고,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게 하였다. 예배당 안에는 ‘천조대신’뿐 아니라, ‘가미사마’ 곧 신(神)으로 신격화된 천황의 사진을 강단 뒤 벽에 걸게 하였고, '가미나다'라 불리는 이동식 신사(神社)를 예배당 안 동편에 놓게 하였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이들을 향해서 먼저 예의를 갖춘 후에라야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강요받았던 황제숭배와 유사한 강요를 일제 강점기 때 조선 기독교인들도 받았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박해기간에는 교회가 핍박을 받게 되고, 박해 후에는 그 후유증으로 인해서 분열의 아픔을 겪었다. 광복 후에 찾아온 교회분열은 조선기독교회라고 해서 피해가지 못했다. 신사참배와 동방요배 모두를 수용한 배도자, 신사참배만 거부하고 동방요배는 수용한 고려파, 신사참배와 동방요배 모두를 거부한 손양원 목사와 같은 재건파로 나눠졌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쓰나미 같은 박해의 해일을 종종 직면했다. 이 박해를 주도한 자들을 계시록은 첫째 짐승인 적그리스도로 표현하였다. 적그리스도는 사단의 권세를 받아 신성을 주장하면서 예배를 강요하고, 하나님의 일을 훼방한 자들로서 계시록은 그들의 활동기간을 상징적인 숫자인 마흔두 달 곧 삼년 반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마흔두 달’ 혹은 ‘1260일,’ ‘한 때 두 때 반 때’로 표현된 삼년 반은 성도들의 시련기간이 짧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6-8절,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는 말씀은 삼년 반으로 묘사된 사단과 적그리스도의 활동기간에 일어날 배도를 말한 것이다. 배도는 반역행위이다.

그러므로 9-10절은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자기도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고 하였다. 성도에게 인내와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사단과 적그리스도가 교회와 성도를 끝내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속죄양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성도의 편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용과 짐승은 창조주와 부활의 주님을 결코 이길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결단코 창조주가 될 수 없으며, 그 분을 이길 수 없다. 피조물은 아무리 힘이 세고 지혜로워도 하나님 앞에 영원히 부족하고 거짓 될 수밖에 없다. 짐승을 666으로 묘사한 것도 이 부족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그들이 주장하는 모든 것은 거룩하신 삼위 하나님에 대한 모방과 표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믿는 성도를 현혹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의 것을 가질 수 없다. 그들의 가르침은 언제나 거짓되고, 구원에 미치지 못한다.

셋째, 그들의 운명은 이미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황과 불과 연기로 타는 불 못에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게 되어 있다. 계시록은 용과 짐승, 곧 사단과 적그리스도를 결코 두려움의 존재로 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잠시 받은 환난의 경한 것이 장차 올 영원한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 18; 고후 4:17)는 사실을 고취하고 있다. 우리 성도들에게 믿음과 인내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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