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다는 것(막 8:18-29)
본문
눈을 뜬다는 것(막 8:18-29)
사람이 갖고 있는 장애 가운데 가장 큰 장애가 아마 눈먼 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소경이 가장 불쌍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문에서 눈뜬 소경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눈뜬 소경을 주제로 쓴 소설로써 노벨문학상을 받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있습니다. 이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멀쩡하던 사람이 눈이 멀고, 눈먼 사람을 만나는 사람마다 눈이 멀고, 그래서 기하급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리는 상황,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펼쳐지는 참혹함을 그렸습니다. 눈먼 한 사람이 전체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현대인들을 눈뜬 소경 혹은 볼 수 있으면서도 보지 않는 소경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눈먼 다수가 지배하는 세상은 참혹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마구는 눈먼 다수보다도 눈뜬 한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말합니다. 눈먼 대중이나 눈먼 ‘대’자 붙은 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눈뜬 모세, 눈뜬 엘리야, 눈뜬 예레미야, 눈뜬 예수님과 같은 한 사람이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살린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아니한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안과의사의 아내’입니다. 이 여인 한 사람을 통해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인간관계가 회복되고, 인간애가 살아나고, 연대의식이 살아나고, 나눔의 정신이 살아나고, 타인에 대한 책임의식이 살아나고, 결국 눈먼 죽음의 도시가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눈먼 한 사람으로 인해서 도시 전체가 눈먼 죽음의 도시가 되기도 하고, 눈뜬 한 사람으로 인해서 도시 전체가 활기찬 도시가 되기도 합니다. 눈뜬 한 사람이 전체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 18-29절을 보면, 한 소경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만물을 밝히 보게 되는 놀라운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가 소경이었을 때는 전혀 볼 수가 없었지만, 눈을 뜨게 되니까 만물을 밝히 보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눈뜬 사람이 한 사람 더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밝히 보게 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하던 눈뜬 소경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높은 차원의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신령한 눈이 열린 후에 비로소 베드로가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기독교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 베드로의 눈이 열림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의 눈이 열리는 살림의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옳은 가치를 알고, 옳은 삶을 실천하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이토록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소경이 눈을 뜬 사건에서 ‘눈을 뜬다’는 의미를 몇 가지 더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눈을 뜬다’는 의미는 낡은 가치관과 낡은 세계관에서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세계관에로 눈이 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청전에서 클라이맥스는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입니다. 눈을 뜬 심봉사가 좋아서 노래합니다. “깜깜한 우리 눈이 부모 얼굴 모르더니 밝고 밝은 이 세상에 오색 분간하겠구나. 일월성신 보겠구나, 산천초목 보겠구나. 용루봉각(용의 누각과 봉황의 대궐) 보겠구나. 의관문물 보겠구나. 얼씨구 지화자.” 여기서 ‘의관물문’이란 말은 오늘날로 말하면 도덕과 법률, 문화와 문명을 말합니다. 심청전에서 ‘눈을 뜬다’는 의미는 낡은 가치관에서 새로운 가치관에로, 낡은 세계관에서 새로운 세계관에로 옮겨가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눈을 뜬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어두운 현실에서 밝은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2008년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사전편찬위원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4천776명을 발표하자 사회적인 파장이 일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 신현확(국무총리), 김활란(이화여대총장), 안익태(애국가), 서정주(시인), 최남선, 이광수, 최린(이상 독립지사) 등 알 만한 사람들이 대거 실렸기 때문입니다. 이들 가운데 최남선, 이광수, 최린은 특별히 주목해볼 인물들입니다.
이광수는 1919년 동경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가하였고, 1937년 독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일제 말인 1939년부터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최린은 메이지대 졸업 후 신민회에 가입하였고,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징역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1933년 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우며 변절하였습니다.
최남선은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민족대표 33인중에 한 사람입니다. 체포되어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 교수가 되었고,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장하기 위해서 동경에 건너갔습니다.
이들 세 사람의 공통점은 한 때 독립을 위해 투신했다가 일제말엽에 변절자가 된 것입니다. 이 무렵은 교회들조차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등 해방의 꿈이 산산 조각나던 때였습니다. 이 시기는 일제의 발악이 극에 도달한 때였지만, 다른 한편 일제의 멸망이 코앞에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만일 수년 내에 조국광복이 이뤄질 것을 알았다면, 어느 누구도 변절이란 수치스런 일을 감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 세 천재들은 물론이고 하나님만 바라봐야할 교회지도자들조차도 암담한 현실의 무덤에 갇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본문의 말씀도 이런 정황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현실의 어둠에서 벗어나 밝게 열린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열린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눈을 뜬다’는 것은 자기를 묶는 족쇄를 풀고, 자기를 가두는 동굴을 탈출하여 밝고 빛난 세계로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던 소경이 눈을 뜬 후에는 만물을 밝히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보면, 어느 날 용감한 노예 한명이 쇠고랑을 풀고, 길고 어두운 동굴을 벗어나서 빛과 소리가 들리는 입구 쪽을 향해서 힘차게 돌진해갑니다. 그러나 엄습해오는 두려움과 입구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강한 빛 때문에 그는 눈을 뜰 수가 없었고, 떠나온 동굴 속 깊은 옛 광장에로 되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서 용감한 노예는 끝내 동굴의 입구에 도달하여 찬란한 태양과 바깥 세계의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게 됩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마치 노예가 평생 알지 못했던 밝은 광명의 세계를 발견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눈을 뜬다’는 것은, 베드로의 눈이 마침내 열리고, 비로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게 된 것처럼, 신앙의 눈이 활짝 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1장 17-19절에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아버지를 알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소망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그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눈이 열리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신가를 알게 되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이 무엇인지,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눈뜬 한 사람만의 축복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됩니다. 눈먼 한 사람이 전체를 망가뜨릴 수도 있고, 눈뜬 한 사람이 전체를 살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눈을 뜹시다. 눈을 뜨기 위해서는 본문의 소경과 바울의 기도처럼 주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사람이 갖고 있는 장애 가운데 가장 큰 장애가 아마 눈먼 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소경이 가장 불쌍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문에서 눈뜬 소경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눈뜬 소경을 주제로 쓴 소설로써 노벨문학상을 받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있습니다. 이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멀쩡하던 사람이 눈이 멀고, 눈먼 사람을 만나는 사람마다 눈이 멀고, 그래서 기하급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리는 상황,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펼쳐지는 참혹함을 그렸습니다. 눈먼 한 사람이 전체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현대인들을 눈뜬 소경 혹은 볼 수 있으면서도 보지 않는 소경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눈먼 다수가 지배하는 세상은 참혹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마구는 눈먼 다수보다도 눈뜬 한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말합니다. 눈먼 대중이나 눈먼 ‘대’자 붙은 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눈뜬 모세, 눈뜬 엘리야, 눈뜬 예레미야, 눈뜬 예수님과 같은 한 사람이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살린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아니한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안과의사의 아내’입니다. 이 여인 한 사람을 통해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인간관계가 회복되고, 인간애가 살아나고, 연대의식이 살아나고, 나눔의 정신이 살아나고, 타인에 대한 책임의식이 살아나고, 결국 눈먼 죽음의 도시가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눈먼 한 사람으로 인해서 도시 전체가 눈먼 죽음의 도시가 되기도 하고, 눈뜬 한 사람으로 인해서 도시 전체가 활기찬 도시가 되기도 합니다. 눈뜬 한 사람이 전체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 18-29절을 보면, 한 소경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만물을 밝히 보게 되는 놀라운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가 소경이었을 때는 전혀 볼 수가 없었지만, 눈을 뜨게 되니까 만물을 밝히 보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눈뜬 사람이 한 사람 더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밝히 보게 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하던 눈뜬 소경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높은 차원의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신령한 눈이 열린 후에 비로소 베드로가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기독교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 베드로의 눈이 열림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의 눈이 열리는 살림의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옳은 가치를 알고, 옳은 삶을 실천하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이토록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소경이 눈을 뜬 사건에서 ‘눈을 뜬다’는 의미를 몇 가지 더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눈을 뜬다’는 의미는 낡은 가치관과 낡은 세계관에서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세계관에로 눈이 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청전에서 클라이맥스는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입니다. 눈을 뜬 심봉사가 좋아서 노래합니다. “깜깜한 우리 눈이 부모 얼굴 모르더니 밝고 밝은 이 세상에 오색 분간하겠구나. 일월성신 보겠구나, 산천초목 보겠구나. 용루봉각(용의 누각과 봉황의 대궐) 보겠구나. 의관문물 보겠구나. 얼씨구 지화자.” 여기서 ‘의관물문’이란 말은 오늘날로 말하면 도덕과 법률, 문화와 문명을 말합니다. 심청전에서 ‘눈을 뜬다’는 의미는 낡은 가치관에서 새로운 가치관에로, 낡은 세계관에서 새로운 세계관에로 옮겨가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눈을 뜬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어두운 현실에서 밝은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2008년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사전편찬위원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4천776명을 발표하자 사회적인 파장이 일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 신현확(국무총리), 김활란(이화여대총장), 안익태(애국가), 서정주(시인), 최남선, 이광수, 최린(이상 독립지사) 등 알 만한 사람들이 대거 실렸기 때문입니다. 이들 가운데 최남선, 이광수, 최린은 특별히 주목해볼 인물들입니다.
이광수는 1919년 동경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가하였고, 1937년 독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일제 말인 1939년부터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최린은 메이지대 졸업 후 신민회에 가입하였고,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징역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1933년 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우며 변절하였습니다.
최남선은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민족대표 33인중에 한 사람입니다. 체포되어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 교수가 되었고,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장하기 위해서 동경에 건너갔습니다.
이들 세 사람의 공통점은 한 때 독립을 위해 투신했다가 일제말엽에 변절자가 된 것입니다. 이 무렵은 교회들조차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등 해방의 꿈이 산산 조각나던 때였습니다. 이 시기는 일제의 발악이 극에 도달한 때였지만, 다른 한편 일제의 멸망이 코앞에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만일 수년 내에 조국광복이 이뤄질 것을 알았다면, 어느 누구도 변절이란 수치스런 일을 감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 세 천재들은 물론이고 하나님만 바라봐야할 교회지도자들조차도 암담한 현실의 무덤에 갇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본문의 말씀도 이런 정황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현실의 어둠에서 벗어나 밝게 열린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열린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눈을 뜬다’는 것은 자기를 묶는 족쇄를 풀고, 자기를 가두는 동굴을 탈출하여 밝고 빛난 세계로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던 소경이 눈을 뜬 후에는 만물을 밝히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보면, 어느 날 용감한 노예 한명이 쇠고랑을 풀고, 길고 어두운 동굴을 벗어나서 빛과 소리가 들리는 입구 쪽을 향해서 힘차게 돌진해갑니다. 그러나 엄습해오는 두려움과 입구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강한 빛 때문에 그는 눈을 뜰 수가 없었고, 떠나온 동굴 속 깊은 옛 광장에로 되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서 용감한 노예는 끝내 동굴의 입구에 도달하여 찬란한 태양과 바깥 세계의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게 됩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마치 노예가 평생 알지 못했던 밝은 광명의 세계를 발견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눈을 뜬다’는 것은, 베드로의 눈이 마침내 열리고, 비로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게 된 것처럼, 신앙의 눈이 활짝 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1장 17-19절에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아버지를 알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소망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그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눈이 열리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신가를 알게 되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이 무엇인지,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눈뜬 한 사람만의 축복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됩니다. 눈먼 한 사람이 전체를 망가뜨릴 수도 있고, 눈뜬 한 사람이 전체를 살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눈을 뜹시다. 눈을 뜨기 위해서는 본문의 소경과 바울의 기도처럼 주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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