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는 뒤돌아보지 않는다(창 19:15-38)
본문
나는 새는 뒤돌아보지 않는다(창 19:15-38)
창세기 19장의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것이다.
노사연의 만남이란 노래에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는 노랫말이 있듯이, 성서에도 뒤돌아보지 말라는 경고가 대단히 많다. 성서에서 뒤돌아보지 말라는 대부분 배교하지 말라는 경고지만, 어떻든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뒤돌아보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류시화의 시에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가 있다. 그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옛날 전북 옥구군 미면(米面) 미제지(米堤池)에 오늘날 군산의 은파유원지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욕심이 많고, 포악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중이 시주를 부탁하였는데, 그는 시주 대신 쇠똥을 주었다. 때마침 그 광경을 보던 부인이 몰래 중을 불러 쌀을 주면서 남편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중은 그 부인에게 부처님의 심부름으로 남편을 벌주기 위해 왔다면서 내일 아침 그 집을 피해 뒷산으로 달아나되 무슨 소리가 나도 뒤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튿날 부인은 어린아이를 업고 뒷산으로 올라가던 중에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에 놀라 금기(禁忌)를 깨고 뒤를 보았더니 있던 집은 간 곳없고 물만 괴어 있었다. 여인이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아이와 함께 돌로 변하고 말았다. 이후로 큰 부잣집은 큰 연못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 설화는 롯의 처가 천사의 지시를 어기고 뒤를 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이 두 개의 닮은 이야기는 모두 다 앞만 보고 달려도 살까 말까한 위급한 상황에서 뒤를 보았다가 돌이 된 이야기들이다.
아브라함과 롯은 향락과 우상숭배로 타락한 여러 도시들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찾아 길을 떠난 유목민들이었다. 이라크의 우르를 떠났고, 터키의 하란을 떠났으며, 이집트를 떠나왔다. 그들이 떠나온 도시들은 롯이 정착한 소돔시보다 더 크고 화려한 도시들이었고, 문화경제적인 면에서도 월등하게 발달된 곳이었다. 그런데 롯은 무엇 때문에 소돔시에 뿌리를 박으려 했을까? 아마 롯은 늘 떠나온 도시생활을 동경하였고, 잘 발달된 도시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곳저곳으로 유랑하는 삼촌 아브라함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할 약속의 땅을 향해서 계속 나아가기를 원했지만, 롯은 세속도시에 정착하기를 원했다. 롯은 열린 미래세계를 향해서 전진하기보다는 늘 세속세계에 안주하기를 바랐다. 롯과는 반대로 아브라함은 세속세계에 정착하기보다는 늘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아브라함은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1-2)고 하신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 한편 롯은 삼촌의 권유를 받고 고향을 떠나기는 했지만 떠나온 세속도시들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끊임없이 떠나온 세상을 향해서 뒤를 봤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고 한 류시화의 시구처럼, 뒤를 본 롯과 그의 가족의 운명은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롯의 처는 뒤를 보지 말라는 천사의 명령을 어기고 떠나온 파멸의 도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뒤를 봤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고, 천사들의 배려와 도움으로 소돔시를 빠져나온 롯과 그의 두 딸은 아브라함이 거주하는 약속의 땅을 향해서 떠나지 않고, 오히려 산속 동굴로 피신하였다. 이 역시 파멸의 굴이었다. 활짝 열린 밝은 세상을 향해서 동굴에서 빠져나와야할 믿음의 사람들이 오히려 흑암의 동굴로 기어들어갔던 것이다.
롯의 두 딸이 아버지로부터 자식을 낳아 후손을 퍼뜨리려했던 것도 떠나온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그들이 자식을 원했던 것은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얻고 그것들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한 것이었다. 고대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근친혼은 부도덕한 행위이기보다는 권력에의 욕망이 얼마나 강했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황실귀족들 사이에는 근친혼이 많았는데, 그 이유가 권력에의 집착과 무관하지 않다. 롯의 가족의 파국은 그들이 늘 뒤를 돌아다보는 보수적 태도 때문이었다. 떠나온 도시에로 회귀와 동굴 속으로의 피신은 롯의 가정에 파멸을 가져왔다.
성서에도 뒤돌아보지 말라는 경고가 많다. 특히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던 유대인들 가운데 이런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떠나온 유대교를 못내 잊지 못했고, 동족의 박해를 면키 위해서 유대교에로 회귀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큰 불행인가를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 불행은 마치 롯의 아내가 떠나온 소돔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던 것과 같다. 그래서 성서는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전진할 것을 성도들에게 신신당부한다. “과거에 집착하지 마라. 뒤를 보지 마라. 떠나온 세계, 떠나온 놀이와 문화, 떠나온 습관, 떠나온 지식과 종교에 대한 향수를 버려라. 그것들은 멸망으로 이끄는 길이다. 그 길을 돌아보지 마라.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하라. 그는 우리를 영원히 살릴 새롭고 산길이다. 그는 우리를 진정으로 위하실 하늘에 오르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고 히브리서는 말한다.
앞서 소개한 두 건의 사례는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을 때 사람이 변하여 돌이 된 경우들이었다. 부잣집 부인도 그렇고, 롯의 처도 마찬가지였다. 이밖에도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 363년~419년경)의 부인이 치술령에 올라가 일본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고, 제우스의 인간아들인 페르세우스가 창공을 떠받치고 있던 아틀라스에게 메두사의 목을 보여줘 그를 바위산으로 변하게 했다는 신화가 있다. 또 테바이의 왕비였던 니오베는 그의 오만방자함으로 인하여 신들의 노여움을 샀는데, 활의 신인 아폴론이 쏜 화살들에 14명의 자녀들이 모두 비참하게 죽었고, 남편은 자살하였다. 이 슬픔과 분노를 어찌하지 못한 니오베는 돌이 되고 말았다는 신화가 있다.
이들 전설이나 신화들은 모두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을 때 그 좌절과 절망이 너무 커서 돌로 굳어버린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은 돌이 변하여 사람이 되게도 한다. 이런 교훈을 주고 있는 이야기가 피그말리온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돌로 빚어졌던 갈라테이아가 피그말리온의 신에 대한 경건한 믿음과 감사 덕분에 사람으로 변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 섬사람으로서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겼던 조각가였다. 키프로스는 고린도에 못지않게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였기 때문에 피그말리온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난장이었을 그에게 시집을 오겠다는 처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자 산 것은 아니고, 정교한 솜씨로 조각한 눈같이 흰 여인의 석상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이 석상을 사랑하고 있었다. 아니 석상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석상 같은 여성을 아내로 맞기를 염원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아프로디테 축제 때, 제 몫의 제물을 바치고 나서 제단 앞에서 더듬거리며 기도했다. “신들이시여, 기도하면 만사를 순조롭게 하신다는 신들이시여, 바라건대 제 아내가 되게 하소서. 저 처녀의 석상을.....” 하려다가 차마 그럴 용기가 없어서 “석상 같은 여자를.....”, 하고선 기도를 마쳤다. 때마침 제단으로 내려와 제물을 흠향하고 있던 아프로디테 여신은 그 기도의 참 뜻을 알아차리고, 그 기도를 알아들었다는 표적으로 제단의 불길이 세 번 하늘로 치솟게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예전과 같이 석상을 대상으로 혼자말도하고, 어루만지기도 하였는데, 예전과는 달리 석상 처녀의 몸에서 온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석상 처녀가 아프로디테의 축복을 받고 생명을 얻어 인간의 몸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감사예배를 드린 후에 여신의 축복을 받으며 돌이 변해서 사람이 된 여성 갈라테이아와 결혼하여 아기 파포스를 낳아 잘 살았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이 신화가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리스인들도 믿지 않는다. 지난 2천 년간 대부분의 그리스인들은 기독교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난장이었을 피그말리온의 믿음과 감사, 희망을 놓지 않는 불굴의 정신, 그리고 그의 믿음이 가져다준 변화의 능력만은 믿어야 한다. 우리들의 믿음과 감사, 그리고 정성과 희망과 기대에 따라서는 돌이 변해서 사람도 되게 할 수 있다는 진실만은 믿어야 한다. 절망과 좌절은 사람을 돌이 되게 할 수도 있고, 희망과 기대는 돌을 사람이 되게 할 수도 있다. 절망과 좌절을 마음에 심는 것은 사단이고, 희망과 기대를 심는 것은 성령님이시다.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서 성도들 앞에 펼쳐진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크고 넘치는가를 보게 하시기를 바란다. 절망과 좌절은 살아있는 것을 죽게 하지만, 기대와 희망은 죽어 있는 것을 살린다. 절망적인 절대미궁에 갇히는 불운한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로 희망의 끈과 믿음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능력과 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창세기 19장의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것이다.
노사연의 만남이란 노래에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는 노랫말이 있듯이, 성서에도 뒤돌아보지 말라는 경고가 대단히 많다. 성서에서 뒤돌아보지 말라는 대부분 배교하지 말라는 경고지만, 어떻든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뒤돌아보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류시화의 시에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가 있다. 그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옛날 전북 옥구군 미면(米面) 미제지(米堤池)에 오늘날 군산의 은파유원지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욕심이 많고, 포악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중이 시주를 부탁하였는데, 그는 시주 대신 쇠똥을 주었다. 때마침 그 광경을 보던 부인이 몰래 중을 불러 쌀을 주면서 남편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중은 그 부인에게 부처님의 심부름으로 남편을 벌주기 위해 왔다면서 내일 아침 그 집을 피해 뒷산으로 달아나되 무슨 소리가 나도 뒤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튿날 부인은 어린아이를 업고 뒷산으로 올라가던 중에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에 놀라 금기(禁忌)를 깨고 뒤를 보았더니 있던 집은 간 곳없고 물만 괴어 있었다. 여인이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아이와 함께 돌로 변하고 말았다. 이후로 큰 부잣집은 큰 연못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 설화는 롯의 처가 천사의 지시를 어기고 뒤를 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이 두 개의 닮은 이야기는 모두 다 앞만 보고 달려도 살까 말까한 위급한 상황에서 뒤를 보았다가 돌이 된 이야기들이다.
아브라함과 롯은 향락과 우상숭배로 타락한 여러 도시들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찾아 길을 떠난 유목민들이었다. 이라크의 우르를 떠났고, 터키의 하란을 떠났으며, 이집트를 떠나왔다. 그들이 떠나온 도시들은 롯이 정착한 소돔시보다 더 크고 화려한 도시들이었고, 문화경제적인 면에서도 월등하게 발달된 곳이었다. 그런데 롯은 무엇 때문에 소돔시에 뿌리를 박으려 했을까? 아마 롯은 늘 떠나온 도시생활을 동경하였고, 잘 발달된 도시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곳저곳으로 유랑하는 삼촌 아브라함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할 약속의 땅을 향해서 계속 나아가기를 원했지만, 롯은 세속도시에 정착하기를 원했다. 롯은 열린 미래세계를 향해서 전진하기보다는 늘 세속세계에 안주하기를 바랐다. 롯과는 반대로 아브라함은 세속세계에 정착하기보다는 늘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아브라함은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1-2)고 하신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 한편 롯은 삼촌의 권유를 받고 고향을 떠나기는 했지만 떠나온 세속도시들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끊임없이 떠나온 세상을 향해서 뒤를 봤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고 한 류시화의 시구처럼, 뒤를 본 롯과 그의 가족의 운명은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롯의 처는 뒤를 보지 말라는 천사의 명령을 어기고 떠나온 파멸의 도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뒤를 봤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고, 천사들의 배려와 도움으로 소돔시를 빠져나온 롯과 그의 두 딸은 아브라함이 거주하는 약속의 땅을 향해서 떠나지 않고, 오히려 산속 동굴로 피신하였다. 이 역시 파멸의 굴이었다. 활짝 열린 밝은 세상을 향해서 동굴에서 빠져나와야할 믿음의 사람들이 오히려 흑암의 동굴로 기어들어갔던 것이다.
롯의 두 딸이 아버지로부터 자식을 낳아 후손을 퍼뜨리려했던 것도 떠나온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그들이 자식을 원했던 것은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얻고 그것들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한 것이었다. 고대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근친혼은 부도덕한 행위이기보다는 권력에의 욕망이 얼마나 강했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황실귀족들 사이에는 근친혼이 많았는데, 그 이유가 권력에의 집착과 무관하지 않다. 롯의 가족의 파국은 그들이 늘 뒤를 돌아다보는 보수적 태도 때문이었다. 떠나온 도시에로 회귀와 동굴 속으로의 피신은 롯의 가정에 파멸을 가져왔다.
성서에도 뒤돌아보지 말라는 경고가 많다. 특히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던 유대인들 가운데 이런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떠나온 유대교를 못내 잊지 못했고, 동족의 박해를 면키 위해서 유대교에로 회귀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큰 불행인가를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 불행은 마치 롯의 아내가 떠나온 소돔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던 것과 같다. 그래서 성서는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전진할 것을 성도들에게 신신당부한다. “과거에 집착하지 마라. 뒤를 보지 마라. 떠나온 세계, 떠나온 놀이와 문화, 떠나온 습관, 떠나온 지식과 종교에 대한 향수를 버려라. 그것들은 멸망으로 이끄는 길이다. 그 길을 돌아보지 마라.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하라. 그는 우리를 영원히 살릴 새롭고 산길이다. 그는 우리를 진정으로 위하실 하늘에 오르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고 히브리서는 말한다.
앞서 소개한 두 건의 사례는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을 때 사람이 변하여 돌이 된 경우들이었다. 부잣집 부인도 그렇고, 롯의 처도 마찬가지였다. 이밖에도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 363년~419년경)의 부인이 치술령에 올라가 일본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고, 제우스의 인간아들인 페르세우스가 창공을 떠받치고 있던 아틀라스에게 메두사의 목을 보여줘 그를 바위산으로 변하게 했다는 신화가 있다. 또 테바이의 왕비였던 니오베는 그의 오만방자함으로 인하여 신들의 노여움을 샀는데, 활의 신인 아폴론이 쏜 화살들에 14명의 자녀들이 모두 비참하게 죽었고, 남편은 자살하였다. 이 슬픔과 분노를 어찌하지 못한 니오베는 돌이 되고 말았다는 신화가 있다.
이들 전설이나 신화들은 모두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을 때 그 좌절과 절망이 너무 커서 돌로 굳어버린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은 돌이 변하여 사람이 되게도 한다. 이런 교훈을 주고 있는 이야기가 피그말리온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돌로 빚어졌던 갈라테이아가 피그말리온의 신에 대한 경건한 믿음과 감사 덕분에 사람으로 변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 섬사람으로서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겼던 조각가였다. 키프로스는 고린도에 못지않게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였기 때문에 피그말리온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난장이었을 그에게 시집을 오겠다는 처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자 산 것은 아니고, 정교한 솜씨로 조각한 눈같이 흰 여인의 석상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이 석상을 사랑하고 있었다. 아니 석상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석상 같은 여성을 아내로 맞기를 염원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아프로디테 축제 때, 제 몫의 제물을 바치고 나서 제단 앞에서 더듬거리며 기도했다. “신들이시여, 기도하면 만사를 순조롭게 하신다는 신들이시여, 바라건대 제 아내가 되게 하소서. 저 처녀의 석상을.....” 하려다가 차마 그럴 용기가 없어서 “석상 같은 여자를.....”, 하고선 기도를 마쳤다. 때마침 제단으로 내려와 제물을 흠향하고 있던 아프로디테 여신은 그 기도의 참 뜻을 알아차리고, 그 기도를 알아들었다는 표적으로 제단의 불길이 세 번 하늘로 치솟게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예전과 같이 석상을 대상으로 혼자말도하고, 어루만지기도 하였는데, 예전과는 달리 석상 처녀의 몸에서 온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석상 처녀가 아프로디테의 축복을 받고 생명을 얻어 인간의 몸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감사예배를 드린 후에 여신의 축복을 받으며 돌이 변해서 사람이 된 여성 갈라테이아와 결혼하여 아기 파포스를 낳아 잘 살았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이 신화가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리스인들도 믿지 않는다. 지난 2천 년간 대부분의 그리스인들은 기독교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난장이었을 피그말리온의 믿음과 감사, 희망을 놓지 않는 불굴의 정신, 그리고 그의 믿음이 가져다준 변화의 능력만은 믿어야 한다. 우리들의 믿음과 감사, 그리고 정성과 희망과 기대에 따라서는 돌이 변해서 사람도 되게 할 수 있다는 진실만은 믿어야 한다. 절망과 좌절은 사람을 돌이 되게 할 수도 있고, 희망과 기대는 돌을 사람이 되게 할 수도 있다. 절망과 좌절을 마음에 심는 것은 사단이고, 희망과 기대를 심는 것은 성령님이시다.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서 성도들 앞에 펼쳐진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크고 넘치는가를 보게 하시기를 바란다. 절망과 좌절은 살아있는 것을 죽게 하지만, 기대와 희망은 죽어 있는 것을 살린다. 절망적인 절대미궁에 갇히는 불운한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로 희망의 끈과 믿음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능력과 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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