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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다(요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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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553 2008.11.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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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다(요 16:33)

'애늙은이'라는 별명을 가진 굴뚝새가 오늘도 굴뚝 위에 앉아서 시름에 젖어 있었다. 어미 참새가 아기 참새를 데리고 굴뚝 위로 날아가면서 말했다.
"걱정은 결코 위험을 제거한 적이 없다. 그리고 걱정은 결코 먹이를 그냥 가져다 준 적이 없으며, 눈물을 그치게 한 적도 없다."
아기 참새가 말참견을 하였다. "엄마, 걱정을 그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요?" "네 날개로, 네 발로 풀어야지. 어디 저렇게 한나절 내내 걱정하고 있을 틈이 있겠느냐?"
어미 참새가 창공으로 더 높이 날며 말했다. "걱정은 결코 두려움을 없애 준 적이 없어.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여지가 없지."
이 때 아래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굴뚝 위에 앉아서 걱정에 잠겨 있던 굴뚝새가 땅으로 뚝 떨어지고 있었다. <정채봉>

정채봉의 이 글에서 근심과 시름에 젖어 있던 굴뚝새는 사냥꾼의 표적이 되어 죽게 되지만, 하늘을 높이 나는 새는 그것이 비록 참새일지라도 스스로 보호를 받는다. 어미 참새가 아기 참새에게 주는 교훈은 걱정은 결코 위험을 없애주지 못하고, 먹을 것을 가져다주지 못할 뿐 아니라, 눈물과 두려움을 그치게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제 날개로 날고, 제 발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먹을 것을 찾아 하늘을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다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교훈의 잠언이다.
우리는 이 글의 “네 날개로, 네 발로 풀어야지”란 구절을 “네 힘만으로 살라”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하나님은 하늘을 나는 작은 새도 먹이고 입히신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제 노력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때, 우리의 삶에 시너지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부정하는 자들은 - 그들이 믿든 믿지 않던 하나님은 여전히 계시고, 그분을 인정하는 자들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신다. - 사람은 스스로 제 문제를 해결해야하며, 자기를 구원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신앙심을 나약한 자들의 자기 투영이라고 말한다.
빛, 질서, 생명은 좋은 것이고, 어둠, 혼돈, 죽음은 나쁜 것이다. 이런 상식에 반기를 들고, 모든 가치를 뒤집어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철학자 니체이다. 니체의 주장은 매우 파격적이고 파괴적이며 해체적이다. 다음의 몇 가지 사례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용감성과 권력을 키우는 것이 선이고, 연약하고 약한 것, 병든 것은 악이다. 겸손과 이타심은 무력한 것이고, 강한 권력과 힘에 도달하려는 의지는 가장 선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노력하는 목적이 이웃과 인류를 위한 데 있지 않고, 강한 개인을 만드는데 있으며, 일상의 안일과 대중에 묻힌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위험과 투쟁을 즐기는 사람이 초인이다 고 했다.
초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과 좌절감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몸과 마음을 잘 단련하고 헛된 희망을 버려야 하며, 종교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사람이 살면서 꼭 행복할 필요가 있는가? “인간이 정말 행복해야만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아마 “이 사람 혹시 돈 것 아니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도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들은 행복이 거짓 위안일 뿐이고, 오히려 슬픔과 고통이 더 인간적이라고 했다. ‘불행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강박관념이라고 했다.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이나 그런 고집스런 주장이 세상을 모순덩어리로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외치면서 종교에서 위안을 찾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오히려 헤라클레스처럼 모든 고난을 극복한 영웅, 곧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이 처한 곤경에 당혹해할 것이 아니라 그 곤경에서 무언가 아름다움을 창조하지 못하는 사실에 당혹해 해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뿐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하며, 타고난 운명이외에 아무 것도 되기를 원치 않는 인간이 되라고 말한다.
니체는, 만약 운명의 신이 당신에게 나타나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야할 당신의 인생이 가감 없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고 묻는다. 모든 행동에 앞서 또는 모든 행동을 한 후에 ‘이 행동이 영원히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가?’고 묻고, 그 물음에 환희에 찬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다면, 그는 권력에의 의지를 긍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초인이라고 말한다. 약한 자는 내세에 희망을 걸고 살지만, 강한 자는 현재의 삶을 즐긴다는 것이다.
니체는 외로움과 싸운 한 마리의 고독한 늑대였다고 보인다. 자신이 타고난 불행한 운명에 몸부림쳤으며 이를 극복하는 한 방법이 모든 희망과 기대와 의존을 깡그리 버린 채 철저하게 자신의 운명을 즐기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자신을 위로하고자한 말이 ‘초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이런 그의 주장은 실체가 없는 몸체를 주장하는 가현설(假現說, 허깨비)적인 것이고 지나치게 숙명적인 것이다. 그 숙명을 영원히 껴안고 가야할 판에 어디서 위안을 얻고, 어디서 쉼을 얻는단 말인가? 어떤 이의 운명은 초호화판이고, 다른 이의 운명은 처참하기 그지없는데, 그 운명을 영원히 껴안고 가야한다면, 정의는 어디에서 구하며, 평등은 또 어디에서 얻겠는가?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의 신실하심과 공의로우심을 의지할 때, 또 성령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믿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현실과 운명조차도 즐길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에는 확연히 달라질 새로운 운명을 믿기 때문이다. 신이 죽고 없는 상황에서는 우연히 숙명이고, 권력이 운명을 바꿔놓는 힘이 될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를 최고의 선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웃과 인류공동체가 부정된 각개 전투식 권력에의 의지는 인간집단을 살인과 방화와 폭력과 강간과 착취와 전쟁으로 몰아넣어 지옥의 소굴로 만들고 말 것이다. 이미 우리는 일이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또는 히틀러의 6백만 유대인 대학살을 통해서 경험한 바가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부모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부모 없이 살아온 사람은 있어도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다. 부모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부모가 없는 것이 아니다. 또 부모 없이 살아왔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자기 힘으로 살았다고 말하는 것도 거짓말이다. 톨스토이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지적한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걱정하고 근심함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풂으로써 사는 것이다. 꼭 부모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 의한, 예를 들면, 친인척과 후원자와 같은 이들의 사랑의 베풂이 없었다면, 자기의 존재란 것이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비록 현실이 어둡고 죽음에 처한 것 같고 또 이 현실이 이생에서는 바뀔 가능성이 없다할지라도, 더 좋은 다음 세상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생을 즐길 수가 있고, 견디며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외로운 늑대처럼 혹은 권력을 다투는 무리짐승들의 처절한 싸움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에 선하고 겸손하고 온유한 성품을 가진 자라도 상황전환이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현실을 절대운명이나 숙명으로 받아 드려서 그것을 영원히 껴안고 가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사랑과 감사가 넘치고, 현실극복의 의지가 있고, 능력과 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도움이 있고, 또 그 도움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면, 현실극복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제 발로 일어서고, 제 발로 걸으며, 제 날개로 날아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야할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시기 때문이다. 

김남조의 시 가운데, ‘설일’이 있다.
겨울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이 시구가 말해주듯이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매서운 칼바람을 맞고 선 겨울나무조차도 혼자가 아니란 것이다. 도와줄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아무도 없는 암담한 상황에서도 결코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성령님도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근심과 걱정이 많은 사람이 치매에 걸린 확률이 2배, 당뇨병에 걸릴 위험이 2.2배로 증가한다는 연구발표가 있다. “걱정의 대부분은 절대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거나 단지 사소한 고민거리에 불과할 뿐이다.”고 한다. 사람의 심신을 황폐케 하는 근심과 걱정은 타의에 의한 것보다 스스로 만들어내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한다. 걱정거리들이 해결된 후에 되돌아보면 대부분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얻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걱정은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라 나쁜 습관이라는 말도 있다. 근심걱정의 특징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데 있다. 근심걱정은 근심걱정을 낳고, 근심걱정을 하면 할수록 눈덩이처럼 더 커진다.
데일 카네기가 󰡔근심이여 안녕󰡕이란 책에서 소개한 예화를 보면, 근심걱정은 사람의 심령을 병들게 하는 벌레란 것을 알 수 있다. 
콜로라도 주의 한 봉우리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그 나무는 400여 년 동안 열네 번이나 벼락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았고, 수많은 눈사태와 폭풍우를 겪고도 살아남았던 나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가 쓰러진 것은 다름 아닌 딱정벌레 떼들이 나무속을 파먹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폭풍과 벼락을 견뎌 온 거목이 작은 벌레들의 공격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우리도 이 거목처럼 인생의 폭풍우와 눈사태와 벼락은 이겨 내면서도 근심걱정이란 벌레에게 우리의 심장을 갉아 먹히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근심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과 관련되어 있다. 성령님이 우리 자신의 정욕에 눌리어 근심케 되고, 불이 소멸되어가듯 성령님이 소멸되어가고, 샘의 근원이 말라가듯 성령님이 말라 가기 때문이다. 성령님을 좇아 행하지 않고, 성령님과 더불어 기도하지 않고, 성령님으로 봉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님을 좇아 행하여야 한다. 성령님을 좇아 무시로 기도하고 봉사하면서 성령님의 샘의 근원이 샘솟게 해야 한다. 성령님의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근심걱정은 사라지고,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게 된다. 거울을 볼 때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미소를 지어 보라. 분명히 삶이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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