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문을 활짝 열자(창 12:1-2, 엡 4: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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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문을 활짝 열자(창 12:1-2, 엡 4:22-24)
태양은 365일 매일 아침 다시 떠오른다. 신년 새해에 떠오른 태양은 오늘도 또 다시 떠올랐다. 내일도 태양은 다시 떠오를 것이다. 다만 다른 것은 동지가 지난 연초에는 이미 날이 훤히 밝은 7시 반이 넘어서야 떠오르기 때문에 눈부신 해가 솟아오르고, 하지 때인 여름철에는 훨씬 동쪽에서 아직 많은 사람들이 잠에서 깨기 이전인 이른 아침에 떠오르기 때문에 붉은 해가 힘 있게 솟아오른다. 솟아오르는 속도가 여간 빠른 게 아니다.
새해가 밝았다. 무자년 새해 아침에 떴던 태양은 기축년 새해 아침에도 변함없이 솟아올랐다. 매일 혹은 매월 혹은 매년 다시 솟아오르는 태양을 볼 때마다 나 같은 사람에게 매번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게 된다. 지난 3일의 삶에 실패한 나에게 오늘 4일 다시 새날을 주시고 새 출발하게 하시고, 지난 12월의 삶에 실패한 나에게 이달 1월에 다시 출발하게 하시고, 지난 2008년의 삶에 실패한 나에게 금년 2009년 새해를 다시 주시고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번번이 쓰러지고 넘어지고 실패하고 좌절하며 낙심하는 나에게 “너는 할 수 있다”(Yes, you can)고 말씀하시고, “내가 너와 함께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시고,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기도란 매일 매순간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며 바로 이 하나님의 음성을 확인하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지시한 길을 진행해 가는 원동력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2009 기축년에는 하나님이 주실 풍성한 선물들을 기대하며 소처럼 우직하게 앞만 향해 전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소걸음이 천리를 간다.
2008 무자년은 무자비하게 쥐들에게 갉아 먹힌 한 해였다. 그러나 2009 기축년은 무자년의 쥐들의 기를 꺾어버리고 안정과 부를 가져다줄 소의 해다. 번영의 열매가 풍성한 기축년 새해가 될 것을 기대해도 좋다. 그래서 금년 우리 교회의 표어가 ‘열매를 맺는 교회’가 아닌가? 모두에게 풍성한 새해가 되기를 축복한다. 새해에는 모두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기를 축복한다. 복을 나눠줄 수 있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축복한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 그대로 여러분에게도 성취되기를 축복한다.
작년 2008년에서 8은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였다. 중국은 그들이 좋아하는 해에 올림픽을 개최하는 행운을 안았지만, 강한 지진으로 인해서 사상 유래 없는 피해를 입었다. 중국은 올림픽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세계경제에 불어 닥친 불황의 덫에 걸렸고, 호황을 기대했던 중국펀드는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이토록 2008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좌절과 실망을 안겨줬던 해였다. 그러나 2008년의 문은 이미 굳게 닫혔다. 열려야 열수 없는 막힌 문이 되었다.
그 대신 2009년 희망의 문이 활짝 열렸다. 9는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이다. 경제적으로 보면, 중국보다는 일본이 훨씬 앞서있고, 정치 경제 군사 모든 면에서 중국보다 수십 년을 앞서가는 나라인 만큼 2009년은 발전과 번영을 기대해도 좋은 해가 될 것 같다. 중국이 걸음마를 배우는 단계, 그래서 뭔가 미숙하고 경험이 부족한 2008년의 상징이었다면, 일본은 성숙한 중년의 단계, 그래서 원숙하고 경험이 풍부한 2009년의 상징이란 점에서 금년에는 희망을 품어도 좋을 것 같다.
1월은 '야누스(Janus)의 달'이다. 야누스는 '두 얼굴'의 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야누스는 로마의 신화에만 나오는 두 얼굴 혹은 네 얼굴을 가진 신으로서 성문과 대문을 지키며, 전쟁과 평화를 상징하는 신이다. 야누스는 출입문의 겉과 속 혹은 동서남북 사방을 지켜주는 문지기 신이다. 로마인들은 야누스가 공간의 문은 물론이고 낮과 밤의 문, 과거와 미래의 문까지도 지켜주는 신으로 믿었다. 로마인들에게 문은 새로운 시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또 야누스는 전쟁을 시작하는 신이었다. 야누스의 신화에서 문을 닫는 것은 평화를 뜻하지만, 문을 여는 것은 전쟁을 뜻한다. 1월은 지난해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굳게 닫아버리는 달이다. 슬픔과 괴로움과 절망과 좌절로 점철된 과거를 굳게 닫아버리는 달이다. 흑암과 혼돈과 죽음으로 점철된 과거를 굳게 닫아버리는 달이다. 그러므로 지난해의 일을 잊어야 한다. 생각에서 마음에서 덮어버려야 한다. 굳게 닫아버려야 한다. 과거의 문을 열어두는 행위는 갈등과 전쟁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갈등과 전쟁으로 얼룩지게 만드는 행위이다. 좌절과 절망과 슬픔과 고통과 흑암과 혼돈과 죽음으로 얼룩지게 만드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문은 굳게 닫아버려야 한다. 과거의 문을 닫아버리게 되면 평화와 기쁨과 용기가 솟아난다. 태양이 솟아오르듯이 희망이 솟아오른다. 빛과 생명의 능력이 넘쳐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어두웠던 2008년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희망찬 새해의 문을 활짝 열자. 하나님께서 주실 풍성한 복을 받아 담을 큰 그릇들을 준비하자.
아들이 없는 어느 임금이 대궐 밖을 암행하다가 다리 밑에서 잠자고 있던 거지 아이를 보고 데리고 와서 양자를 삼았다. 거지 아이는 임금의 호의로 왕자가 되었다. 저녁이 되자 새 왕자는 대궐 밖으로 나가려 했다. 신하들이 만류하자 그는 “나는 본래 거지라서 내 잠자리는 다리 밑에 있다.”고 말했다. 새 왕자는 아침이 되자 또다시 대궐 밖 강가로 나가려 했다. 신하들이 만류하자 그는 “나는 본래 거지라서 내가 세수할 곳은 저 강가다.”고 말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그가 아직 왕자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왕자다. 그러니 왕자답게 살자.’는 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신분이 바꿨다는 인식이 분명할 때 생활방식이 바뀔 수 있다. 인식이 바꿔야 행동이 바뀔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새로운 작품들이다. 하나님의 명품 자녀들이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왕자들이요 공주들이다. 왕자에게는 왕자에 어울리는 옷맵시가 있고, 말씨가 있으며, 걸음걸이가 있다. 공주에게는 공주에 어울리는 옷맵시가 있고, 말씨가 있으며, 걸음걸이가 있다. 해가 바꿔도 묵은해와 달라지는 것이 없다면, 삶이 바뀔 수 없고, 운명이 바뀔 수가 없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다. 우리 성도들은 더 이상 과거의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작품들이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명품들답게 과거에 묻히지 말고 희망찬 내일을 바라보자.
금년은 기축년 소띠 해이다. 소는 되새김질 과정에서 하루 200L의 메탄가스를 방출한다고 한다. 2006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 보고서는 전 세계에서 가축이 배출하는 메탄가스의 양이 지구온실효과를 높이는 가스방출 총량의 18%를 차지한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자동차, 기차, 비행기, 배가 배출하는 일산화탄소로 인한 지구온실효과보다 5%나 더 많은 양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호주에서는 메탄가스의 방출량이 거의 없는 캥거루 고기를 먹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되새김질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반성과 회개의 의미를 갖고 있고, 또 다른 한 가지는 반복과 되풀이의 의미를 갖고 있다. 반성과 회개의 의미를 갖는 되새김질은 과거에 매이지 않고 새 출발의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일이다. 유대인들은 새해 첫날부터 열흘 동안 철저히 지난해의 잘못을 회개하여 죄를 씻고, 용서받고 혹은 용서해주고 새 출발한다고 한다. 그들은 생명책의 주위를 돌면서 새해에는 지난해와 같은 잘못들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반복과 되풀이의 의미를 갖는 되새김질은 삶에 해로운 가스의 양만 높일 뿐이다. 과거의 잘못된 습관을 버린 후에 닫아버리지 못하는 되새김질 인생은 삶에 해로운 가스만 배출할 뿐이지 유익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된 삶을 철저히 반성하고 회개한다면, 되새김질이 소를 살찌우게 하듯이, 올해에는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다. 우리 모두 썩어질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과거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자. 그리고 새 출발에 걸맞은 새 사람을 입자.
퐁테느의 「우화(寓話)」에 보면, 쥐란 놈이 소에게 가서 지는 쪽이 뺨을 맞기로 하고 겨루기를 청한다. 빨리 달리기에서 소가 지고서 한 대 얻어맞고, 꾀를 겨루기에서 소가 져서 두 대를 얻어맞고, 새끼 낳기에서 소가 져서 세 대를 얻어맞는다는 이야기이다. 소같이 우둔한 내가 쥐같이 꾀 많은 사람들에게 당한 일이 어디 한두 번이겠는가? 그러나 우보천리란 말에서 보듯이 소걸음은 천리를 간다. 조선일보에 실린 한삼희 논설위원의 만물상을 보니까 덩치가 큰 코끼리는 심장박동수가 적고, 덩치가 작은 쥐는 심장박동수가 많다고 한다. 쥐나 코끼리나 일생동안 심장이 20억 번쯤 뛰는 것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끼리는 100년 가까이 살고 쥐는 2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한다(모토카와 다쓰오, 시간으로 보는 생물이야기). 반성과 회개의 의미를 갖는 되새김질의 소걸음이 천리를 간다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선조(宣祖) 때 재상(宰相)을 지낸 정탁(鄭琢/1526-1605)이 젊어서 벼슬을 얻게 되어 스승인 조식(曹植)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조식은 정탁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집에 소 한 마리가 있는데 갈 때 끌고 가게나.” 스승의 집에 소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던 정탁이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자 조식이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언어와 의기에 너무 민첩하고 날카로워 날랜 말(馬)과 같아서 하는 말일세. 말은 넘어지기 쉬운 동물이라 더디고 착실한 것을 참작해야 비로소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므로, 자네에게 내 소를 끌고 가라 한 것이네.” 조식이 정탁에게 준 것은 ‘마음의 소’였던 것이다. 그 후 정탁은 이 마음의 소를 항상 끌고 다니며 처세하였기 때문에 정승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면서 자녀들에게 이 마음의 소를 자자손손 대물림하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금년에는 소처럼 만사를 차분히 반추하는 여유와 신중함을 위해서 마음의 소를 한 마리씩 키우자. 히브리인들에게도 소는 굽이 갈라진 ‘코숴’ 곧 정한 동물로써 일 부리기에 적합하고 먹기에 적합하고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에도 적합한 동물이었다. 금년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에게나 사람 모두에게 쓰임받기에 적합한 거듭난 인물들이 되도록 하자.
태양은 365일 매일 아침 다시 떠오른다. 신년 새해에 떠오른 태양은 오늘도 또 다시 떠올랐다. 내일도 태양은 다시 떠오를 것이다. 다만 다른 것은 동지가 지난 연초에는 이미 날이 훤히 밝은 7시 반이 넘어서야 떠오르기 때문에 눈부신 해가 솟아오르고, 하지 때인 여름철에는 훨씬 동쪽에서 아직 많은 사람들이 잠에서 깨기 이전인 이른 아침에 떠오르기 때문에 붉은 해가 힘 있게 솟아오른다. 솟아오르는 속도가 여간 빠른 게 아니다.
새해가 밝았다. 무자년 새해 아침에 떴던 태양은 기축년 새해 아침에도 변함없이 솟아올랐다. 매일 혹은 매월 혹은 매년 다시 솟아오르는 태양을 볼 때마다 나 같은 사람에게 매번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게 된다. 지난 3일의 삶에 실패한 나에게 오늘 4일 다시 새날을 주시고 새 출발하게 하시고, 지난 12월의 삶에 실패한 나에게 이달 1월에 다시 출발하게 하시고, 지난 2008년의 삶에 실패한 나에게 금년 2009년 새해를 다시 주시고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번번이 쓰러지고 넘어지고 실패하고 좌절하며 낙심하는 나에게 “너는 할 수 있다”(Yes, you can)고 말씀하시고, “내가 너와 함께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시고,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기도란 매일 매순간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며 바로 이 하나님의 음성을 확인하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지시한 길을 진행해 가는 원동력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2009 기축년에는 하나님이 주실 풍성한 선물들을 기대하며 소처럼 우직하게 앞만 향해 전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소걸음이 천리를 간다.
2008 무자년은 무자비하게 쥐들에게 갉아 먹힌 한 해였다. 그러나 2009 기축년은 무자년의 쥐들의 기를 꺾어버리고 안정과 부를 가져다줄 소의 해다. 번영의 열매가 풍성한 기축년 새해가 될 것을 기대해도 좋다. 그래서 금년 우리 교회의 표어가 ‘열매를 맺는 교회’가 아닌가? 모두에게 풍성한 새해가 되기를 축복한다. 새해에는 모두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기를 축복한다. 복을 나눠줄 수 있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축복한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 그대로 여러분에게도 성취되기를 축복한다.
작년 2008년에서 8은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였다. 중국은 그들이 좋아하는 해에 올림픽을 개최하는 행운을 안았지만, 강한 지진으로 인해서 사상 유래 없는 피해를 입었다. 중국은 올림픽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세계경제에 불어 닥친 불황의 덫에 걸렸고, 호황을 기대했던 중국펀드는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이토록 2008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좌절과 실망을 안겨줬던 해였다. 그러나 2008년의 문은 이미 굳게 닫혔다. 열려야 열수 없는 막힌 문이 되었다.
그 대신 2009년 희망의 문이 활짝 열렸다. 9는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이다. 경제적으로 보면, 중국보다는 일본이 훨씬 앞서있고, 정치 경제 군사 모든 면에서 중국보다 수십 년을 앞서가는 나라인 만큼 2009년은 발전과 번영을 기대해도 좋은 해가 될 것 같다. 중국이 걸음마를 배우는 단계, 그래서 뭔가 미숙하고 경험이 부족한 2008년의 상징이었다면, 일본은 성숙한 중년의 단계, 그래서 원숙하고 경험이 풍부한 2009년의 상징이란 점에서 금년에는 희망을 품어도 좋을 것 같다.
1월은 '야누스(Janus)의 달'이다. 야누스는 '두 얼굴'의 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야누스는 로마의 신화에만 나오는 두 얼굴 혹은 네 얼굴을 가진 신으로서 성문과 대문을 지키며, 전쟁과 평화를 상징하는 신이다. 야누스는 출입문의 겉과 속 혹은 동서남북 사방을 지켜주는 문지기 신이다. 로마인들은 야누스가 공간의 문은 물론이고 낮과 밤의 문, 과거와 미래의 문까지도 지켜주는 신으로 믿었다. 로마인들에게 문은 새로운 시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또 야누스는 전쟁을 시작하는 신이었다. 야누스의 신화에서 문을 닫는 것은 평화를 뜻하지만, 문을 여는 것은 전쟁을 뜻한다. 1월은 지난해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굳게 닫아버리는 달이다. 슬픔과 괴로움과 절망과 좌절로 점철된 과거를 굳게 닫아버리는 달이다. 흑암과 혼돈과 죽음으로 점철된 과거를 굳게 닫아버리는 달이다. 그러므로 지난해의 일을 잊어야 한다. 생각에서 마음에서 덮어버려야 한다. 굳게 닫아버려야 한다. 과거의 문을 열어두는 행위는 갈등과 전쟁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갈등과 전쟁으로 얼룩지게 만드는 행위이다. 좌절과 절망과 슬픔과 고통과 흑암과 혼돈과 죽음으로 얼룩지게 만드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문은 굳게 닫아버려야 한다. 과거의 문을 닫아버리게 되면 평화와 기쁨과 용기가 솟아난다. 태양이 솟아오르듯이 희망이 솟아오른다. 빛과 생명의 능력이 넘쳐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어두웠던 2008년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희망찬 새해의 문을 활짝 열자. 하나님께서 주실 풍성한 복을 받아 담을 큰 그릇들을 준비하자.
아들이 없는 어느 임금이 대궐 밖을 암행하다가 다리 밑에서 잠자고 있던 거지 아이를 보고 데리고 와서 양자를 삼았다. 거지 아이는 임금의 호의로 왕자가 되었다. 저녁이 되자 새 왕자는 대궐 밖으로 나가려 했다. 신하들이 만류하자 그는 “나는 본래 거지라서 내 잠자리는 다리 밑에 있다.”고 말했다. 새 왕자는 아침이 되자 또다시 대궐 밖 강가로 나가려 했다. 신하들이 만류하자 그는 “나는 본래 거지라서 내가 세수할 곳은 저 강가다.”고 말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그가 아직 왕자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왕자다. 그러니 왕자답게 살자.’는 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신분이 바꿨다는 인식이 분명할 때 생활방식이 바뀔 수 있다. 인식이 바꿔야 행동이 바뀔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새로운 작품들이다. 하나님의 명품 자녀들이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왕자들이요 공주들이다. 왕자에게는 왕자에 어울리는 옷맵시가 있고, 말씨가 있으며, 걸음걸이가 있다. 공주에게는 공주에 어울리는 옷맵시가 있고, 말씨가 있으며, 걸음걸이가 있다. 해가 바꿔도 묵은해와 달라지는 것이 없다면, 삶이 바뀔 수 없고, 운명이 바뀔 수가 없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다. 우리 성도들은 더 이상 과거의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작품들이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명품들답게 과거에 묻히지 말고 희망찬 내일을 바라보자.
금년은 기축년 소띠 해이다. 소는 되새김질 과정에서 하루 200L의 메탄가스를 방출한다고 한다. 2006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 보고서는 전 세계에서 가축이 배출하는 메탄가스의 양이 지구온실효과를 높이는 가스방출 총량의 18%를 차지한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자동차, 기차, 비행기, 배가 배출하는 일산화탄소로 인한 지구온실효과보다 5%나 더 많은 양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호주에서는 메탄가스의 방출량이 거의 없는 캥거루 고기를 먹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되새김질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반성과 회개의 의미를 갖고 있고, 또 다른 한 가지는 반복과 되풀이의 의미를 갖고 있다. 반성과 회개의 의미를 갖는 되새김질은 과거에 매이지 않고 새 출발의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일이다. 유대인들은 새해 첫날부터 열흘 동안 철저히 지난해의 잘못을 회개하여 죄를 씻고, 용서받고 혹은 용서해주고 새 출발한다고 한다. 그들은 생명책의 주위를 돌면서 새해에는 지난해와 같은 잘못들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반복과 되풀이의 의미를 갖는 되새김질은 삶에 해로운 가스의 양만 높일 뿐이다. 과거의 잘못된 습관을 버린 후에 닫아버리지 못하는 되새김질 인생은 삶에 해로운 가스만 배출할 뿐이지 유익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된 삶을 철저히 반성하고 회개한다면, 되새김질이 소를 살찌우게 하듯이, 올해에는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다. 우리 모두 썩어질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과거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자. 그리고 새 출발에 걸맞은 새 사람을 입자.
퐁테느의 「우화(寓話)」에 보면, 쥐란 놈이 소에게 가서 지는 쪽이 뺨을 맞기로 하고 겨루기를 청한다. 빨리 달리기에서 소가 지고서 한 대 얻어맞고, 꾀를 겨루기에서 소가 져서 두 대를 얻어맞고, 새끼 낳기에서 소가 져서 세 대를 얻어맞는다는 이야기이다. 소같이 우둔한 내가 쥐같이 꾀 많은 사람들에게 당한 일이 어디 한두 번이겠는가? 그러나 우보천리란 말에서 보듯이 소걸음은 천리를 간다. 조선일보에 실린 한삼희 논설위원의 만물상을 보니까 덩치가 큰 코끼리는 심장박동수가 적고, 덩치가 작은 쥐는 심장박동수가 많다고 한다. 쥐나 코끼리나 일생동안 심장이 20억 번쯤 뛰는 것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끼리는 100년 가까이 살고 쥐는 2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한다(모토카와 다쓰오, 시간으로 보는 생물이야기). 반성과 회개의 의미를 갖는 되새김질의 소걸음이 천리를 간다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선조(宣祖) 때 재상(宰相)을 지낸 정탁(鄭琢/1526-1605)이 젊어서 벼슬을 얻게 되어 스승인 조식(曹植)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조식은 정탁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집에 소 한 마리가 있는데 갈 때 끌고 가게나.” 스승의 집에 소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던 정탁이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자 조식이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언어와 의기에 너무 민첩하고 날카로워 날랜 말(馬)과 같아서 하는 말일세. 말은 넘어지기 쉬운 동물이라 더디고 착실한 것을 참작해야 비로소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므로, 자네에게 내 소를 끌고 가라 한 것이네.” 조식이 정탁에게 준 것은 ‘마음의 소’였던 것이다. 그 후 정탁은 이 마음의 소를 항상 끌고 다니며 처세하였기 때문에 정승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면서 자녀들에게 이 마음의 소를 자자손손 대물림하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금년에는 소처럼 만사를 차분히 반추하는 여유와 신중함을 위해서 마음의 소를 한 마리씩 키우자. 히브리인들에게도 소는 굽이 갈라진 ‘코숴’ 곧 정한 동물로써 일 부리기에 적합하고 먹기에 적합하고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에도 적합한 동물이었다. 금년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에게나 사람 모두에게 쓰임받기에 적합한 거듭난 인물들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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