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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궤를 운반한 암소들(삼상 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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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556 2009.01.08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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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궤를 운반한 암소들(삼상 6:10-16)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기록했던 사가들은 한 개인의 길흉화복뿐 아니라, 한 국가의 길흉화복의 원인이 죄와 회개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인간사의 길흉화복이 어떤 정해진 운명에 의해서 결정되기보다는 죄로 인해서 화가 닥치고, 회개로 인해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돌보심을 입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때에는 그분의 영광과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앞세워 육지로 홍해와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고, 화살 하나 쏘지 않고 여리고 성을 점령할 수 있었으나 죄를 범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앞세워 적군에 맞설지라도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했다. 죄를 범한 후에 회개하지 않으면 아무리 큰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외면을 당하게 되지만 아무리 큰 죄를 범한 사람일지라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된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관이다.
사무엘상을 보면, 이스라엘이 범죄 후 회개 없이 ‘에벤에셀’에서 블레셋과 전투를 펼쳤을 때 1차 싸움에서 4천 명 가량이 죽었고, 2차 싸움에서 3만 명의 보병이 죽었다. 그러나 20년 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동일한 전투에서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대승을 거두게 된다. 승리의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간 섬기던 우상들을 모두 제거한 후에 ‘에벤에셀’에서 멀지 아니한 ‘미스바’에 모여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블레셋 군이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스라엘을 급습했지만, 하나님이 죄를 회개한 이스라엘 편에 서셨기 때문에 블레셋 군이 대패를 당한 후에 추격을 받아 ‘벧갈’이란 곳까지 물러가게 되었다. 이곳에 사무엘이 돌을 세우고, 그곳 지명을 ‘에벤에셀이라 불렀다.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란 뜻이지만,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신앙을 담은 고백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가들은 자기 민족의 길흉화복을 신앙의 관점에서 성찰하였는데, 이 역사관이 소수에 불과한 이스라엘 민족을 수천 년의 시련의 용광로 속에서 순금으로 제련 되게 한 힘이다. 오늘 우리 자신들이 겪는 불행을 우연이나 남의 탓만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의 문제에서 찾는 지혜를 발견하기 바란다.
사무엘상 1-7장까지의 사건들은 대략 3천 년 전에 일어난 것들이다. 당대에는 민족과 민족이 싸울 때 자기 민족의 신의 명예를 걸고 싸웠다. 이스라엘은 ‘야훼’의 명예를 걸고 싸웠고, 블레셋은 ‘다곤’의 이름을 걸고 싸웠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중동에서는 신들의 이름으로 싸우고 있다. 이스라엘은 ‘야훼’의 이름으로 싸우고 있고, 아랍인들은 ‘알라’의 이름으로 싸우고 있다. 전쟁에 지는 것은 패배자의 신(神)이 진 것이나 다름없다. 3천 년 전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두 차례나 연이어 패한 후에 급기야 야훼의 상징인 법궤까지 빼앗긴 것은 야훼 신이 다곤 신에게 패하여 무릎을 굻게 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절망감은 더없이 컸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가는 이스라엘의 패배가 결코 그들의 야훼가 능력이 약하거나 지략이 부족한 때문이 아니라, 자기 민족의 죄악 때문이라고 확신하였다. 그 점을 두 가지 사건들에서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신전에 세워진 다곤 신상이 야훼의 법궤 앞에서 두 번이나 꺼꾸러져 산산 조각이 난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에 머문 7개월 동안 법궤를 둔 도시들에 예외 없이 죽음의 재앙이 덮쳤고,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독한 종양이 돋게 된 것이다.
오늘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우리들 속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보는 것이다. 이런 예민함을 일컬어 영성이라고 부른다. 금년은 우리 모두에게 영성이 풍부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사람이 겪는 모든 불행이 모두 당사자의 죄 때문에 빚어진 것은 아니란 점이다. 사람이 겪는 고난의 원인에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도 아주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의인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갖고 계신 선한 계획 때문이다.
지금 중동의 화약고인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하마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3천 년 전에 벌어졌던 똑 같은 전쟁 상황이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가자지구는 3천 년 전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던 지역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혔고 그들과 이스라엘의 전쟁도 끝이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의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전쟁은 이미 3천 년 전부터 시작된 끝없는 전쟁의 연속인 셈이다.
사무엘상에 기록된 3천 년 전의 전투나 오늘의 매스컴에 보도되는 전시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때에는 가자지구의 블레셋이 이스라엘보다 강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스라엘의 전력이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의 것보다 더 나아가 주변 아랍국들의 전력보다 월등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사무엘상 7장까지의 기록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북서쪽으로 사방 40킬로미터, 즉 100리쯤 거리이내에서 벌어진 사건들이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00리쯤에 법궤를 놓는 하나님의 집이 있었던 ‘실로’가 있었고, 실로에서 지중해 방향인 서쪽으로 100리쯤에 블레셋 군과 전투를 펼쳐서 대패했던 ‘에벤에셀’이 있었으며, 에벤에셀에서 남쪽으로 100리, 곧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방향 서쪽으로 100리쯤에 ‘벧세메스’가 있었다. 이처럼 사무엘상 7장까지의 사건들은 모두 오늘의 가자지구 인근에서 펼쳐졌던 일들이다. 지금 이스라엘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법궤를 놓는 하나님의 집이 있었던 실로는 ‘보낸다’는 뜻을 갖고 있다. 불리한 전세를 바꿔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전쟁터에 법궤를 보냈지만, ‘도움의 돌’을 뜻하는 에벤에셀에서 1-2차에 걸려 무려 3만4천명이 죽는 대패를 당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상징이었던 법궤도 도움의 상징인 에벤에셀에서 빼앗겼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뜻하는 에벤에셀에서조차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기는 치욕을 맛봐야했다. 하나님의 법궤의 뚜껑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결국 하나님을 빼앗긴 거나 다름없는 치욕이었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엘리 제사장이 의자에 앉은 채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 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
이후의 사건은 하나님의 법궤가 ‘태양의 집’이란 뜻을 가진 ‘벧세메스’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하나님의 법궤를 태양의 집 벧세메스로 운반한 것은 두 마리의 암소들이었다. 이곳은 당시 이스라엘 진영으로써 본래 태양신 숭배가 행해지던 곳이었지만, 인류의 진정한 태양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란 점에서 하나님의 법궤가 태양의 집인 벧세메스로 돌아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금년은 기축년 소의 해이다. 법궤를 운반한 이 두 마리의 암소들한테서 뭔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들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새끼를 낳아 기르고 있는 어미 소들이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멍에를 매어보지 않았던, 그러니까 일을 해본 경험이 없는 소들이었다는 점이며, 셋째는 그들이 끌었던 수레가 새로 제작된 것이었다는 점이고, 넷째는 이끌어주는 사람 없이 가야할 목적지를 향해 갔고, 정확하게 목적지에서 멈췄다는 점이다.
이 미숙하고 경험이 전무(全無)한 소들이 제 새끼들로부터 강제로 떨어진 채 서럽게 울면서도 길들지 아니한 새 수레에 야훼 하나님의 법궤를 싣고 운반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블레셋 지도자들이 그들에게 내린 재앙이 우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야훼 신(神)의 능력 때문이었는지를 시험코자 한 때문이다. 그들은 암소들을 추적하여 결과를 다 지켜본 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암소들에는 블레셋 지도자들이 기대했던 동물로써의 자연스런 행동들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강제로 떨어져 어미 소를 찾는 제 새끼들 때문에 강제로 끌지 않으면 제 새끼들이 있는 집으로 가게 된다는 점이다. 미물에 지나지 않은 소라도 자신의 분신인 새끼와 생이별을 한다는 것은 아픔일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암소들은 찢어지는 아픔을 참아내며 울면서 그들이 가야할 길을 걸었다. 그들을 강제로 끄는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새끼들을 찾아 집으로 향하지 않고, 태양의 집 벧세메스를 향해서 앞으로 나갔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블레셋 지도자들이 새끼를 가진 암소 두 마리로 수레를 끌게 한 것은 어미젖을 찾는 송아지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하다못해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만이라도 발걸음을 옮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고서는 배고파 우는 새끼들의 소리를 들은 암소들이 강제로 끄는 사람도 없는데 제 발로 벧세메스로 발걸음을 옮긴다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암소가 울면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태양의 집 벧세메스로 올라간 것은 야훼가 참 신(神)이신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둘째는 이 두 암소들은 멍에를 매어본 일이 없고 일을 해본 일이 없기 때문에 수레를 끌고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암소들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는 않지만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인도되었던 것이다. 미숙하고 재능 없고 서툴기만 한 미물조차도 하나님의 능력에 이끌림을 받았을 때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었고, 수많은 인명을 살리는 큰일을 해낼 수 있었다. 하물며 사람이 못하겠는가?
셋째는 일 해본 경험이 전무(全無)한 이 암소들이 끈 수레는 길이 전혀 나지 아니한 새 것이었기 때문에 초자들이 끌기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 암소들은 맡겨진 일을 잘 감당했다. 초자라도 하나님의 능력에 이끌림을 받는다면, 능히 맡겨진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 문제는 항상 제 능력 제 수완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서 발생된다. 기계의 힘을 빌리는 것과 육체의 힘만으로 하는 일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과 자기 능력만을 의지하는 일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금년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보자. 일의 성과가 엄청나게 다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넷째는 이 암소들을 강제로 이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목적지를 향해서 방향을 잡고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암소들은 사람의 인도를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물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임무를 수행해 내는데, 하물며 사람이 못하겠는가?
암소들은 사명을 잘 마쳤을 뿐 아니라, 수많은 인명을 살려내는 큰일을 해냈다. 미물에 불과한 암소들이 깨닫지는 못했겠지만, 새끼와 떨어지는 아픔이 컸던 만큼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끄는 영광도 컸다. 소의 일생은 기껏해야 사람을 위해 일하다가 사람에게 잡아먹히는 것에 불과하다. 같은 값이면 하나님께 드려진 일생이 사람을 위해서 수고하다가 사람에게 먹힌 것보다 훨씬 값진 생이 아니었을까? 이런 맥락에서 법궤를 나른 암소들은 귀하고 값진 영광을 누렸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3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칭송을 듣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고 난 후에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아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는 것과 같다. 소의 해를 맞아서 우리도 이 암소들처럼 하나님의 일에 귀히 쓰이는 일군이 되고, 사람들로부터 칭송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복된 자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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