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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변해야 하는가(요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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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3,177 2009.01.24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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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변해야 하는가(요 2:1-11)

미국은 변화를 택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흑인인 바락 오바마가 제44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따라서 바락 오바마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변화와 희망의 상징으로 우뚝 섰다. 유세 중에 그가 외친 “그래요, 우리는 할 수 있어요.”(Yes, we can!)는 유명 구호가 되었다. 이 구호가 심각한 경제위기와 국제문제들로 자존심이 깎인 미국인들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과 ‘변해야한다’는 각성제가 되고 있다.
우리 자신들도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지금의 이 정체상태를 벗어나 전진하기를 원하고, 침체를 벗어나 발전하기를 원하고, 동면에서 깨어나 활동하기를 원하고,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부활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해야하는가를 잘 모르고 있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고, 변해야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라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고, 변화가 두렵거나 자기 몸을 아끼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안락함이나 타성에 젖어 기계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가나혼인잔치의 표적은 변화에 관한 기적으로써 정체를 벗고 전진하기를 원하고, 침체를 벗고 발전하기를 원하고, 잠에서 깨어 활동하기를 원하고, 죽음에서 깨어 부활하기를 원하는 사람과 조직에 주는 교훈이 크다. 이 표적에서 물은 정체와 침체와 동면(冬眠)과 죽음을 상징한다. 버려야할 혹은 벗어나야할 옛 것의 상징이다. 그리고 포도주는 부활을 상징한다. 받아드려서 내 것으로 삼아야 할 새 것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때’에 아주 민감하셨다. 그것을 요한복음은 ‘자기의 때’, 혹은 ‘영광 받으실 때’라고 표현하고 있다. 변화의 때, 희생의 때, 헌신의 때를 말한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고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예수님(누가)은 2천 년 전에(언제) 예루살렘 골고다에서(어디서) 자기 몸을(무엇을) 제물로 바쳐(어떻게) 인류를 구원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왜) 헌신하셨다. 예수님은 그 ‘때’에 대해서 아주 예민하셨고, 적절한 ‘때’에 하나님의 일을 실천에 옮기셨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
켄 블랑카드(Ken Blancard)는 "사람은 선천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변화에 대한 호기심과 변화를 바라는 마음은 있지만, 정작 변화 그 자체는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블랑카드는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지식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태도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행동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조직의 변화를 두려워한다고 했다. 그러나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오만에 빠진 것이고, 자기도취나 자기 우상화의 늪에 빠진 것이다. 그 결과로 인해서 개인이 공동체가 조직이 심지어는 국가까지도 쇠퇴하고 해체되는 것이다. 토인비는 이것을 ‘응보’라고 불렀다. 개인이 됐든, 공동체가 됐든, 조직이 됐든, 민족이 됐든, 모든 쇠퇴와 해체의 원인은 변화에 대한 무신경증에서 비롯된다. 변화에 예민하게 대응하지 않고, 현실안주에 빠지는 오만과 자기도취는 인간을 파멸의 구덩이로 몰아가는 무서운 내면의 적이다. 대부분의 쇠퇴와 해체의 원인이 외부의 적이나 힘에서 비롯되기보다는 내부의 병폐 혹은 내면의 적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진단이다.
홍익출판사에서 출판한 올리비아 끌렉의 󰡔계란, 병아리, 그리고 오믈렛󰡕을 읽어보면,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평안함에 안주하려는 생활태도와 타성과 관성에 길들여져 기계처럼 움직이는 삶이라고 적고 있다.
차가운 물이 가득 담긴 냄비 안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개구리는 물이 서서히 가열되면 미지근한 물에 편안함을 느끼면서 아주 태평스럽게 헤엄을 치며 평화로움을 만끽한다. 수온이 점차 올라가면, 열기 때문에 피곤을 느낀 개구리의 몸놀림은 둔해진다. 물이 뜨거워지면, 개구리는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래도 개구리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알맞은 수온이 될 때를 기다리며 버틴다. 개구리는 그렇게 수온변화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하다가 결국 죽고 만다. 수온이 급격한 변화 없이 아주 서서히 상승했기 때문에 개구리는 냄비 밖으로 뛰쳐나가야 산다는 어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어떤 시도도,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결국 죽게 되는 것이다.
상황이 미세하게 서서히 나빠지면, 우리는 이 상황의 심각성을 잘 감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상황변화에 아무런 대응도 저항도 노력도 하지 않게 되고, 방치하거나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자기 몸이 서서히 병들어 가고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방치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말기 암 진단을 받는 거나 다름없다.
긍정의 변화든 부정의 변화든, 신체의 변화든 정신의 변화든, 대신 또는 대인관계의 변화든, 가정과 교회와 직장의 변화든,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든, 어떤 상황의 변화든, 아무튼 변화에 대해서 우리는 예민함을 가져야 한다. 무신경증과 안일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몸이 병들고, 인간관계가 깨지고, 가정이 붕괴되고, 교회와 직장이 문을 닫게 되고,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진다.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변화를 읽어내고 상황을 파악해 내고 시대흐름을 꿰뚫어 보는 예민함과 상황개선을 위한 간절한 기도와 변화를 추구하는 몸부림과 성서에 바탕을 둔 평가기준과 이루고자하는 목표의식과 그것에 도달하고자하는 노력이다.
밀랍이 두껍고 매끈하게 입혀진 그릇에 뜨거운 물을 조금씩 떨어뜨리면, 물은 표면을 녹이면서 마치 눈 위를 지나간 스키어의 흔적처럼 아주 미세한 자취를 남긴다. 최초의 뜨거운 물은 밀랍의 표면 위 어디라도 흐를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뜨거운 물을 떨어뜨리면, 물은 앞서 생긴 흔적을 따라 흐르게 된다. 그리고 그 세 번째부터는 더 깊게 파인 앞서의 흔적이 물의 흐름을 완전히 조종하기에 이른다. 뜨거운 물을 떨어뜨리면 떨어뜨릴수록 홈은 더욱 깊어져 결국 물은 이미 파인 골을 따라 흐르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길로도 흐르지 않게 된다.
이것은 타성과 관성에 서서히 길들여져 기계처럼 움직이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수많은 일들이 깊은 통찰이나 지식에 바탕을 둔 의식적인 결과가 아니라 단순한 습관과 타성의 결과란 사실을 밝혀주는 것이다. 우리가 습관처럼 해온 일들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기 때문에 밀랍에 새겨진 흔적의 원리가 계속 작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해서는 안 될 일들을 관성에 끌리듯 하게 만드는 것이다. 버려두면 망가지는 것이 자연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이다. 잘못에 길들여진 기계적 타성과 관습과 관행은 우리가 변화하는 것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려면, 생명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고치란 장벽을 찢고 나오는 피나는 고통이 따른다. 10개월을 뱃속에서 키운 아기가 세상으로 나와 빛을 보게 하려면, 살을 찢는 산통을 견뎌야 한다. 마찬가지로 크든 작든 긍정의 변화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만일 산모가 산통을 거부한다면, 옥동자를 품에 안을 수 없다. 병아리가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는 자기를 감싸고 있는 껍데기를 깨는 창조적 파괴가 선행되어야 한다. 변화가 없는 삶은 정체되고 퇴보될 뿐이다. 따라서 변하려는 의지나 신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의지나 신념은 마치 테이블 밑에 감춰진 지남철과 같다. 테이블 밑에 있어서 보이지는 않지만, 지남철은 보이는 현상인 책상위의 쇳가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 의지와 신념은 사람을 조정하는 힘이다. 의지와 신념이 바뀌지 않으면 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 틀을 깨지 않으면 변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이것을 가능케 하려면, 심층세계의 영혼과 성령님의 조종을 받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고 변화가 당장에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성장을 못하는 것이 우리만의 일도 아니다. 더군다나 성장이 성숙보다 더 가치 있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성장을 위한 내공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이다. 병아리가 성숙한 단계에 이르러 껍질을 깨고 나오게 될 때까지는 일정한 기간이 필요하다. 태아가 성장해서 세상에 나오려면 열 달이란 기간이 필요하다.
중국 대나무 중에는 씨앗을 뿌린 지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싹을 틔우고 단 1년 만에 무려 12미터가 자라는 특이한 종이 있다. 5년 동안 땅 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대나무는 땅속에서 아주 깊고 견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 대나무는 5년 동안 어둠 속에서 견고하게 뿌리를 키우기 때문에 세상 밖으로 화려하게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대나무가 주는 교훈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성장을 위한 인고의 세월과 철저한 준비기간이 얼마나 값진가를 교훈한다. 둘째는 지금 당장 열매를 수확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기울인 노력과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교훈한다. 셋째는 우리의 노력과 수고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넷째는 언젠가 빛을 보게 될 그날을 위해서, 비록 지금은 어둡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라는 것이다. 어둠이야말로 생명체들이 더 밝은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들이 하루를 밤부터 시작한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빛이 있기 전에 흑암이 있었고, 있음이 있기 전에 없음이 있었고, 생명이 있기 전에 죽음이 있었던 것이다. 다섯째는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가치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가시적인 결과가 나오기까지 우리에게 어쩌면 더 많은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은 정확히 100도가 되어야 끓는다. 99도가 되기까지 물은 자신의 용솟음을 준비할 뿐이다. 그러다가 물이 100도에 도달하게 되면 용솟음치며 끊는다. 이런 현상을 물리학에서 ‘양자도약’이라 한다. 정해진 일정 에너지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일단 수준에 도달하면 갑자기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도약하기를 원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착실한 내공쌓기란 것을 알 수 있다. 창조적 파괴가 성장을 위한 변화라면 내공쌓기는 성장을 위한 희망 키우기인 셈이다.
잡초에는 TR비율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TR에서 T는 top 즉 키를 말하고, R은 root 즉 뿌리를 말한다. 따라서 TR이란 잡초의 키와 뿌리의 비율을 말하는 것이다. 이 비율이 20대 80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잡초의 약 20퍼센트는 하늘로 솟아있고, 약 80퍼센트는 땅 속에 뻗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아무리 잡초를 뜯어내고 동물들이 아무리 많은 양의 잡초를 뜯어 먹어도 잡초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잡초의 뿌리가 그만큼 깊고 넓게 퍼져있기 때문이다. 민들레의 뿌리를 캐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하찮은 봄풀 한 포기라도 뽑아본 사람은 그것들이 땅속에 얼마나 깊은 뿌리를 뻗고 있는가를 알 것이다.
왜 변해야 하는가? 변하지 않으면 쇠퇴되고 해체되기 때문이다. 신앙도 삶도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변해야 성공할 수 있다. 보이는 현상이 변하기 위해서는 의지나 신념이 먼저 변해야 한다. 의지나 신념이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 그러나 신념이 바뀌기 위해서는 심층세계의 영혼과 성령님의 조종을 받아야 한다. 마치 테이블 밑에 숨겨진 지남철이 책상위의 쇳가루를 조정하듯이 강력한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의지나 신념이 바뀔 수 있다. 그래야 애벌레가 고치를 찢고 나비로 거듭나듯이, 병아리가 껍데기를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듯이, 새로운 세상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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