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침묵(시 4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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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침묵(시 42:1-11)
금년은 부활주일이 4월 12일에 닿는다. 사순 절기도 지난 2월 25일에 이미 시작되어 절반인 제3주째를 맞았다. 이때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듣거나 멜 깁슨의 DVD, ‘패션 어브 크라이스트’를 보거나 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뇌와 수난에 동참하려는 태도를 갖는다. 필자도 최근 틈틈이 마태수난곡을 들으면서 김은국의 순교자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었다.
이 두 권의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하나님의 침묵’이다. 그것은 마치 시편 기자가 42편 10절에서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사에 개입하고 계신가라는 실존적인 물음에 관한 글들이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외마디 울부짖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와 시편 22편 1절에서 다윗이 읊고 있는 시구(詩句),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 실존적 물음에 대한 고뇌들을 17세기와 20세기의 역사적 상황에서 펼쳐놓은 글들이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전쟁의 참화 속에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내버려두시며, 박해자들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시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인간들의 필사적인 기도에 아랑곳없이 완고하게 침묵을 지키고 계시는가? 배교자들이 천벌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득세하는 세상,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세상에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만일 존재한다면 어째서 이렇게 침묵하고 계신가? 하나님은 고통의 순간에 어디에 계시는가?
이런 무겁고 무서운 실존적인 물음을 던진 엔도 슈사쿠는 그의 침묵에서 우리에게 쉽지 않은 답을 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종종 겪게 되는 혹독한 시련이 욥의 경우에서처럼 사단의 테스트를 통과한 자들에게 복을 주기 위한 훈련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수난에서처럼 그것이 인류가 저지른 죄 때문이거나 인류의 죗값을 대신한 숭고한 희생이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하나님이 인간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고, 그것 때문에 존재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 게 아니라, 말없이 함께 그 고통을 나누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설사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신다할지라도 그분은 늘 인간의 곁에 계시면서 그들의 배반과 그들의 고통과 그들의 아픔을 참아내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나약한 인간을 사랑하실 수 있고, 용서하실 수 있다. 심지어 인간의 모든 고통과 죄를 대신 짊어지실 수가 있다.
이런 단순한 이유 때문에 인간들의 고뇌와 괴로움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라는 어둠 뒤에 오는 부활의 아침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사순 절기를 맞아서 무겁고 칙칙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내리는 결론까지 무겁고 칙칙한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과감하게 암울한 주제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겪는 고뇌와 고통 뒤에 찾아오는 부활의 아침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본부 유물전시관에는 다 닳은 성모상이 새겨진 작은 성화판(聖畵板) 하나가 전시되어있다고 한다. 일본인 엔도 슈사쿠가 침묵을 쓰게 된 것도 1960년대 초 나가사키에서 그와 같은 성화판을 보고난 다음이었다.
1637년 일본 큐슈우 시마바라(島原)에서 농민들이 과중한 세금과 기독교금지에 반항하여, 16세의 소년 아마쿠사 시로오(天草四郞)를 대장으로 삼아 난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이때는 3대 막부인 도쿠가와 이에미쯔 시대였는데, 시마바라 난이 일어난 1637년부터 1644년까지 기독교를 그 뿌리까지 썩게 만들어 박멸시키려는 무서운 박해가 있었고, 이때에 기독교인들을 색출할 목적으로 성모상이나 예수 십자가상을 동판이나 목판에 새겨 사람들로 하여금 발로 밟고 지나가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색출된 기독교인들은 갯벌에 세운 말뚝에 묶어 놓아 서서히 죽게 하는 수형, 산채로 묶어서 거적에 말아 먼 바다에 버리는 수장, 뜨거운 온천수를 서서히 부어 고통을 가하는 열탕고문, 그리고 양쪽 귓바퀴에 구멍을 뚫어 피가 한 방울씩 흐르게 한 다음 묶은 채로 거적에 말아 좁은 구멍 속에 거꾸로 매다는 일명 ‘구멍 매달기’ 방법 등으로 공포감을 자아내는 전시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이 가운데서도 ‘구멍 매달기’는 가장 악명 높은 고문방법으로써 믿음이 좋은 신부들을 배교시킬 때 사용되었다.
일본인 관리들은 뛰어난 믿음을 소유한 신부들을 배교시키기 위해서 이미 몇 번씩이나 주님을 저주하고 성화를 밟고 배교한 농민들을 놓아주지 않고 그들을 묶은 채로 거적에 말아서 좁은 구멍에 거꾸로 매단다. 그렇게 두면 금방 죽기 때문에 양쪽 귓바퀴에 구멍을 뚫어 한 방울씩 피가 흐르게 한다. 그러면 입과 코와 귀에서 피를 흘리고 심하게 코고는 소리를 내면서 서서히 고통 중에 죽어가게 된다. 그리고 신부에게 저 불쌍한 농민 신도들의 고통을 면해 주고 싶으면 어서 빨리 배교하라고 권한다. 저 불쌍한 농민 신도들이 죽느냐 사느냐는 신부에게 달려 있다고 말한다. “당신이 진정한 신부라면 저 신도들을 불쌍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고 말한다. “당신의 이기적인 신앙 때문에 저 불쌍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아느냐?”고 힐문한다. 이러한 힐문과 회유에 신앙의 열정과 헌신에 있어서 유달리 뛰어난 신부들조차 자기들 때문에 무고하게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출하려고 성화판을 밟고 지나간다. 이토록 극심한 상황에서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며, 고통의 순간에 숨어 계신가를 묻는 책이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다.
인간은 여러 가지 형태의 전쟁이나 박해의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그것이 비록 실제의 전투상황이나 박해상황은 아닐지라도 우리 인간들은 다양한 돌연변이 형태의 전투상황이나 박해상황에 내몰려 있고 그 현장에서 고투하고 있다. 우리는 때때로 배교에 직면하게 되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분의 존재를 의심하게도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순교자들의 삶을 회고해 보곤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약함을 위로하고, 용기를 준다. 그것은 마치 시편의 저자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뼈를 찌르는 칼 같은 대적의 비방을 받고 좌절감에 빠졌다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11절)라고 굳게 다짐하는 것과 같다.
성서는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과 이길 것을 권면하고 있고, 또 그들에게 보상하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은 회개한 배교자를 물리치지 않으신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 순교한 자에게나 고문과 죽음이 무서워 배교한 자에게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두 종류가 있다.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있고, 용감한 자와 비겁한 자가 있다. 강한 자는 불에 태워지고 바다에 던져져도 신앙을 지켜낼 수 있다. 하지만 약한 자는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고문을 이기지 못한다. 오늘날처럼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시대라면 배교자가 되지 않아도 좋았을 신자들이 무서운 고문 앞에서 배교의 탈을 쓰게 되는 현실에 배교자뿐만 아니라 순교자조차도 하나님의 침묵이란 냉엄한 현실 앞에서 고뇌하며 괴로워하게 된다. “주여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당신은 왜 언제나 침묵하고 계십니까?”라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외마디 소리를 토해내게 된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는 각기 다른 이유들로 배교한 두 주인공이 나온다. 한 사람은 지극히 약하고 겁이 많은 자여서 배교를 거듭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주인공인 신부를 관가에 고발한 기치지로이며, 기치지로에게 배신당한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는 자기가 지키려는 믿음 때문에 무고하게 당하는 농민 신자들의 고통만 아니라면 끝까지 신앙을 지켰을 뛰어난 신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는 자신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예수님일지라도 사랑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배교했을 것이란 점, 무엇보다도 배교행위는 단지 형식과 절차에 불과할 뿐 실은 지금까지 누구도 행하지 못한 위대한 사랑의 행위란 설득에 굴복되어 성화판 위에 자기 발을 올려놓게 된다. 저자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 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닭이 울고 동이 튼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닭의 울음은 동터오는 새 날에 대한 전령의 외침이요, 그 외침에 눈을 뜨고 통회하는 자는 부활의 새 날을 맞게 된다. 수탉의 외침에 눈을 뜨고 귀를 여는 자,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자만이 환희의 아침을 맛볼 수 있다. 서울대 미대 김병종 교수는 “닭이 울다”란 제목의 그림 밑에 이렇게 썼다. “닭이 우는 시간은 통회와 고통 그리고 환희의 시간이다.”
신부는 배신자 기치지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는 거요.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고통스럽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소.” 그는 또 주님이 자기에게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이다.”고 말씀하셨다고 설명하였다.
금년은 부활주일이 4월 12일에 닿는다. 사순 절기도 지난 2월 25일에 이미 시작되어 절반인 제3주째를 맞았다. 이때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듣거나 멜 깁슨의 DVD, ‘패션 어브 크라이스트’를 보거나 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뇌와 수난에 동참하려는 태도를 갖는다. 필자도 최근 틈틈이 마태수난곡을 들으면서 김은국의 순교자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었다.
이 두 권의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하나님의 침묵’이다. 그것은 마치 시편 기자가 42편 10절에서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사에 개입하고 계신가라는 실존적인 물음에 관한 글들이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외마디 울부짖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와 시편 22편 1절에서 다윗이 읊고 있는 시구(詩句),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 실존적 물음에 대한 고뇌들을 17세기와 20세기의 역사적 상황에서 펼쳐놓은 글들이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전쟁의 참화 속에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내버려두시며, 박해자들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시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인간들의 필사적인 기도에 아랑곳없이 완고하게 침묵을 지키고 계시는가? 배교자들이 천벌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득세하는 세상,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세상에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만일 존재한다면 어째서 이렇게 침묵하고 계신가? 하나님은 고통의 순간에 어디에 계시는가?
이런 무겁고 무서운 실존적인 물음을 던진 엔도 슈사쿠는 그의 침묵에서 우리에게 쉽지 않은 답을 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종종 겪게 되는 혹독한 시련이 욥의 경우에서처럼 사단의 테스트를 통과한 자들에게 복을 주기 위한 훈련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수난에서처럼 그것이 인류가 저지른 죄 때문이거나 인류의 죗값을 대신한 숭고한 희생이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하나님이 인간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고, 그것 때문에 존재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 게 아니라, 말없이 함께 그 고통을 나누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설사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신다할지라도 그분은 늘 인간의 곁에 계시면서 그들의 배반과 그들의 고통과 그들의 아픔을 참아내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나약한 인간을 사랑하실 수 있고, 용서하실 수 있다. 심지어 인간의 모든 고통과 죄를 대신 짊어지실 수가 있다.
이런 단순한 이유 때문에 인간들의 고뇌와 괴로움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라는 어둠 뒤에 오는 부활의 아침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사순 절기를 맞아서 무겁고 칙칙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내리는 결론까지 무겁고 칙칙한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과감하게 암울한 주제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겪는 고뇌와 고통 뒤에 찾아오는 부활의 아침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본부 유물전시관에는 다 닳은 성모상이 새겨진 작은 성화판(聖畵板) 하나가 전시되어있다고 한다. 일본인 엔도 슈사쿠가 침묵을 쓰게 된 것도 1960년대 초 나가사키에서 그와 같은 성화판을 보고난 다음이었다.
1637년 일본 큐슈우 시마바라(島原)에서 농민들이 과중한 세금과 기독교금지에 반항하여, 16세의 소년 아마쿠사 시로오(天草四郞)를 대장으로 삼아 난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이때는 3대 막부인 도쿠가와 이에미쯔 시대였는데, 시마바라 난이 일어난 1637년부터 1644년까지 기독교를 그 뿌리까지 썩게 만들어 박멸시키려는 무서운 박해가 있었고, 이때에 기독교인들을 색출할 목적으로 성모상이나 예수 십자가상을 동판이나 목판에 새겨 사람들로 하여금 발로 밟고 지나가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색출된 기독교인들은 갯벌에 세운 말뚝에 묶어 놓아 서서히 죽게 하는 수형, 산채로 묶어서 거적에 말아 먼 바다에 버리는 수장, 뜨거운 온천수를 서서히 부어 고통을 가하는 열탕고문, 그리고 양쪽 귓바퀴에 구멍을 뚫어 피가 한 방울씩 흐르게 한 다음 묶은 채로 거적에 말아 좁은 구멍 속에 거꾸로 매다는 일명 ‘구멍 매달기’ 방법 등으로 공포감을 자아내는 전시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이 가운데서도 ‘구멍 매달기’는 가장 악명 높은 고문방법으로써 믿음이 좋은 신부들을 배교시킬 때 사용되었다.
일본인 관리들은 뛰어난 믿음을 소유한 신부들을 배교시키기 위해서 이미 몇 번씩이나 주님을 저주하고 성화를 밟고 배교한 농민들을 놓아주지 않고 그들을 묶은 채로 거적에 말아서 좁은 구멍에 거꾸로 매단다. 그렇게 두면 금방 죽기 때문에 양쪽 귓바퀴에 구멍을 뚫어 한 방울씩 피가 흐르게 한다. 그러면 입과 코와 귀에서 피를 흘리고 심하게 코고는 소리를 내면서 서서히 고통 중에 죽어가게 된다. 그리고 신부에게 저 불쌍한 농민 신도들의 고통을 면해 주고 싶으면 어서 빨리 배교하라고 권한다. 저 불쌍한 농민 신도들이 죽느냐 사느냐는 신부에게 달려 있다고 말한다. “당신이 진정한 신부라면 저 신도들을 불쌍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고 말한다. “당신의 이기적인 신앙 때문에 저 불쌍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아느냐?”고 힐문한다. 이러한 힐문과 회유에 신앙의 열정과 헌신에 있어서 유달리 뛰어난 신부들조차 자기들 때문에 무고하게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출하려고 성화판을 밟고 지나간다. 이토록 극심한 상황에서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며, 고통의 순간에 숨어 계신가를 묻는 책이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다.
인간은 여러 가지 형태의 전쟁이나 박해의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그것이 비록 실제의 전투상황이나 박해상황은 아닐지라도 우리 인간들은 다양한 돌연변이 형태의 전투상황이나 박해상황에 내몰려 있고 그 현장에서 고투하고 있다. 우리는 때때로 배교에 직면하게 되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분의 존재를 의심하게도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순교자들의 삶을 회고해 보곤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약함을 위로하고, 용기를 준다. 그것은 마치 시편의 저자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뼈를 찌르는 칼 같은 대적의 비방을 받고 좌절감에 빠졌다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11절)라고 굳게 다짐하는 것과 같다.
성서는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과 이길 것을 권면하고 있고, 또 그들에게 보상하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은 회개한 배교자를 물리치지 않으신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 순교한 자에게나 고문과 죽음이 무서워 배교한 자에게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두 종류가 있다.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있고, 용감한 자와 비겁한 자가 있다. 강한 자는 불에 태워지고 바다에 던져져도 신앙을 지켜낼 수 있다. 하지만 약한 자는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고문을 이기지 못한다. 오늘날처럼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시대라면 배교자가 되지 않아도 좋았을 신자들이 무서운 고문 앞에서 배교의 탈을 쓰게 되는 현실에 배교자뿐만 아니라 순교자조차도 하나님의 침묵이란 냉엄한 현실 앞에서 고뇌하며 괴로워하게 된다. “주여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당신은 왜 언제나 침묵하고 계십니까?”라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외마디 소리를 토해내게 된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는 각기 다른 이유들로 배교한 두 주인공이 나온다. 한 사람은 지극히 약하고 겁이 많은 자여서 배교를 거듭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주인공인 신부를 관가에 고발한 기치지로이며, 기치지로에게 배신당한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는 자기가 지키려는 믿음 때문에 무고하게 당하는 농민 신자들의 고통만 아니라면 끝까지 신앙을 지켰을 뛰어난 신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는 자신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예수님일지라도 사랑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배교했을 것이란 점, 무엇보다도 배교행위는 단지 형식과 절차에 불과할 뿐 실은 지금까지 누구도 행하지 못한 위대한 사랑의 행위란 설득에 굴복되어 성화판 위에 자기 발을 올려놓게 된다. 저자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 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닭이 울고 동이 튼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닭의 울음은 동터오는 새 날에 대한 전령의 외침이요, 그 외침에 눈을 뜨고 통회하는 자는 부활의 새 날을 맞게 된다. 수탉의 외침에 눈을 뜨고 귀를 여는 자,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자만이 환희의 아침을 맛볼 수 있다. 서울대 미대 김병종 교수는 “닭이 울다”란 제목의 그림 밑에 이렇게 썼다. “닭이 우는 시간은 통회와 고통 그리고 환희의 시간이다.”
신부는 배신자 기치지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는 거요.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고통스럽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소.” 그는 또 주님이 자기에게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이다.”고 말씀하셨다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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